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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프라시압을 온 목적은 궁전벽화에 고구려인의 복장을 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그것을 보기 위함이다.
대한민국에서 2년에 걸쳐 복원한 그림...오른쪽 조우관(鳥羽冠)과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찬 사람이 고구려사람일 것이라고
아프라시압 유적지
아프라시압 언덕에 도착한 시간이 네 시 반으로 아프라시압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언덕에 가축이 풀을 뜯고 있었다.
박물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우호협력비...이곳에서 발굴한 것을 복원하는데 참여하였다.
박물관 옆에 있는 실크로드를 가는 대상들
곧바로 박물관으로 들어가서 제일먼저 비디오를 상영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만든 비디오라고 한다.
비디오 상영이 끝나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현지인 가이드가 나와서 아프라시압의 역사와 아프라시압
궁전의 벽화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준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굴되어서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는데 그리 관심들이 없어 보인다.
박물관의 고대 유물들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려면 일단 세계사 등 관련 학문분야에 관심과 흥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만든 아프라시압 벽화 동영상
복원된 그림...한국에서 복원한 것이라고...
동서남북의 벽면에 있는 벽화로 뒤에 있는 벽화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고구려 사신이 있는 벽면의 그림...
그런데 고구려 사신이 6천키로가 넘는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사신 행렬도를 그릴 때는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의례적으로 그려 넣었을 것이라고 한다.
설명하는 사람이 스스로 소그드인의 후예라고 하는데....아프라시압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로 중에 포함되어 있는 사마르칸트...당시의 이름은 마라칸다였다.
그리스(마케도니아)와 연관된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생활용품들...우리나라의 고드렛돌과 같은 것으로 돚자리를 엮을 때 쓰는 돌인데...이돌도 그런 용도로??.
실크로드 속의 사마르칸트
곡식항아리...
이곳에서 발굴된 두골?? 세번째 두골이 머리가 긴 것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세계 여러곳에서 이런 두골이 발굴된다.
자세히 읽어 볼 시간도 없고...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의 브리나탑에서 본 발발석의 모습과 흡사하다.
1965년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도로 설치를 위한 사전 발굴조사를 하던 중 상부가 잘려나간 벽화 하나가 발견되었다.
전체 발굴 조사 후 드러난 벽화의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7세기 번영했던 소그디아나의 모습을 각 11미터
길이의 4개 벽면에 나눠 그린 총 44미터의 초대형 벽화였기 때문이다. 소그드 시대의 종교, 의례, 정치, 외교,
문화, 신화 등을 담은 이 벽화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던 7세기 소그드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외교를 묘사한 서벽에는 차가니안, 차치, 티벳(추정), 투르크, 당, 고구려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사절들이
그려져 있어 이 지역이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란듯이 증명했다. 이 중 고구려인의 존재는 한국인들보다도 먼저 러시아와 일본의 학자들이 증명하며 한국 학계와 언론에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무려 6000km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나타났으니, 역사학계 뿐 아니라 이 지역과 긴밀한 공조를 원하는 대한민국 정치권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 이후 역대 한국의 대통령이 모두 직접 방문했으며, 2013년과 2014년에는 한국에서 문화 ODA
사업을 통해 현지 아프라시압 박물관과 협업하여 디지털 기술을 통한 벽화와 벽화 궁전의 복원에 성공했다.
10분 분량의 컴퓨터 그래픽 영상과 가상현실(VR), 증강현실로 제작된 복원 결과물은 현지 박물관에서 인기리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나무위키 백과)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궁전 벽화가 발견되었던 언덕으로 올라가는데 군데군데 발굴흔적과 뱍벽화과 발굴
되었던 곳에 검은 돌로 만들어진 표지판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폐허이다.
몽골이 이곳을 침략하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프라시압 세틀먼트(정착지)
벽화과 발견된 곳의 표지판
아래 박물관이 보인다.
아에 보이는 언덕의 흙무덤이 다 사람이 살던 곳인데...몽골군이 이렇게 만들었다.
아프라시압은 몽골 침입 이전 사마르칸트의 구도심(舊都心)이기 때문에 13세기 이전 사마르칸드트의 역사가
바로 아프라시압의 역사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처음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이곳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일부였다가,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때 알렉산드리아의 일부가 되며 헬레니즘이 번성하기도 하였다.
당시 명칭은 마라칸다였었다. 이후 다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조로아스터교가 번성하였으며
페르시아 영향을 오랜 시간 받은 덕분에 이후 지배 왕조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현대에도 여전히 이곳의 주민은
이란계 타지크인들(중앙아시아에 사는 백인)이 절대 다수이다. 기원 후에는 주로 소그드인(Sogd)이라 불리며 도시국가 연합체인 소그디아나를 구성했다. 이 지역은 실크로드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서 문명의 충돌지이면서 동시에 상호교류하고 무역하는 허브 도시로 기능했다.
7세기 무렵부터 이 지역은 신당서(新唐書) 등의 중국 기록에 강국(康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투르크(돌궐)와 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기의 유적인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서는 총 4벽면 중 서쪽 벽면에 소그디아나의 지배자(바르쿠만Varkhuman, 신당서의 불호만으로 추정)를 접견하기 위해 유라시아 각지에서 찾아온 사절들과, 지배자와 함께 이들을 맞이하는 수많은 투르크(돌궐)인 권력자들이 등장하고,
북쪽 벽면에는 온통 당나라 황실과 관련된 도상들이 등장하며 당서의 책봉 기록과 일치하는 점을 보여준다.
8세기에는 아랍 세력의
침공(고선지의 탈라스 전투가 이 근처에서 이뤄졌다)으로 중국의 제지술이 서양으로 전파되는 거점이 되었으며, 이후 완전히 아랍문명권으로 들어서게 된다. 아랍 세력의 지배 아래서도 아프라시압 도성(都城)은
국제무역도시로서 눈부시게 번영했지만 13세기 발흥한 몽골의 침략 아래 아프라시압은 이름만 남긴 채
완전한 폐허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완전히 잊혀져 있다가 1950년대 양치기 목동 소년이 우연히 발견한 옛 유물을 통해 구 소련이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아프라시압 도성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전술한 이러한 역사성에 힘입어
아프라시압 도성을 포함한 신, 구 사마르칸트드 전체가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마르칸드 - 문화교차로'
로 등재되게 된다.
(나무위키 백과에서)
이제 아르라시압 폐허 옆에 있는 사히진다로 간다.
사마르칸트 유적지는 걸어서 구경할 수 있게 다 가깝게 있다.
샤히진다는 영묘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전설에 의하면 이곳의 역사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인 쿠삼 이븐
아바스(Kussam-ibn-Abbas)가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소그디아나 지역을 개종시키기 위해 이곳에
도착했다고 하는 6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그가 기도하는 동안에 조로아스터교도들이 그의 목을 베어버렸는데, 쿠삼은 자신의 머리를 들고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쿠삼은 사마르칸트에 와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이후에 아랍인들이 이슬람 이전 시기부터
있었던 지하에서 저승 세계를 다스린다는 왕의 신화를 차용하여 샤히진다(Shah-i-Zinda '살아 있는 왕'이라는
뜻이다)에 대한 숭배를 만들어서 이곳의 이름이 샤히진다가 되었다고 한다.
샤히 진다로 들어가는 입구
아래 보이는 비석들은 이곳에 살다가 죽은 이슬람인의 무덤들이고 앞에 보이는 모스크는 비비하눔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이 건물들이 누구에세서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그냥 열심히 볼 뿐
이런 길을 따라서 올라간다.
영묘의 내부들
목재???
천정의 모자이크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관들
같은 모양 같은 문양이 없다고...
일반인들의 비석이 외부에 보인다.
돔들도 모자이크나 모양들이 다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영묘들은 대부분 티무르 왕조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다른 영묘와 동일한 형태를 지닌 영묘는
하나도 없다고 한다.
아프로시압 언덕 남동쪽에 8세기 아랍 침입 이후 형성된 이슬람교도들의 묘지로 주로 14-15세기에 걸쳐
11개의 묘를 건설하였는데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촌 쿠삼(Kusam)과 티무르 일족, 울르그벡의 은사, 자녀 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샤히진다 입구 정문에는 “이 장엄한 건물은 883년(1334년)에 아미르 티무르 구르간의 아들, 샤흐루흐의 아들,
울르그벡구르간의 아들, 압둘아지즈한에 의해 세워졌다”라고 씌어있다고 한다.
샤히 진다를 구경하면서 어느 영묘가 누구의 영묘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이곳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일반관광객들에게는 그냥 티무르와 가족들과 관련된 무덤인가 보다 하는 것으로 끝을
낼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도 기념품등을 판다.
구경을 하고 내려가는 길...
이곳이 사히진다???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들
지붕의 서까래가 우리나라의 단청을 닮았다.
아프라시압과 사히진다를 보고 숙소로...아프라시압 정착지를 가로 질러 난 길
샤히 진다를 보고 숙소로 돌아오니 6시 반이다.
전체 건물군은 3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434-1435년에 울르그벡은 샤히진다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웅장한 정문을 세웠다.
그 뒤에는 첫번째 초르탁(돔 구조로 된 통로)이 나타나며, 그것은 달옛 쿠쉬베기 사원(Dalvet Kushbegi Madrassah(1813))과 19세기에 세워진 모스크로 이어지며, 계단을 반쯤 올라가면 푸른색의 돔이 두 개 있는
카지 자데 루미(Qazi Zade Rumi) 영묘 (1420-1425)가 보인다. 카지 자데 루미는 울르그 벡의 천문 선생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영묘에 있던 시신은 여성이었으며, 그녀는 아마도 티무르의 유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두 번째 초르탁을 통과하면 오른편에 에미르 후세인(Emir Hussein) 영묘가, 왼편에 에미르 자데(Emir Zade)
영묘 (1386)가 나타나는데, 아미르 후세인 영묘는 티무르의 장군이었던 후세인의 어머니의 이름이 따서
투글루 테킨(Tuglu-Tekin)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아미르 자데 영묘는 알려지지 않은 아미르의 아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 뒤로는 오른편에 쉬린 비카 아카(Shrin Bika Aka) 영묘 (1385), 왼편에 샤디 물크 아카(Shadi Mulk Aka)
영묘 (1372)가 자리잡고 있다. 샤디 물크 아카 영묘는 사마르칸트에 세워진 티무르 조 최초의 구조물이다.
이곳에는 티무르의 아름다운 질녀인 샤디 물크 아카가 묻혀있으며, 이후에 티무르의 누나인 투르한 아카도
이곳에 합장되었다. 시린 비카 아카 영묘는 티무르의 또 다른 누이를 위한 것으로, 원래의 장식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진정한 모자이크 타일 제작이 사마르칸트에서 시작된 시기가 언제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입구는 전부 부조가 아니라 마졸리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그 옆에는 15세기에 지어진 팔각형 영묘가 있다. 이것과 그 다음의 세 영묘들-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알림 나사피(Alim Nasafi) 영묘(1385년경), 울르그 술탄 베굼(Ulug Sultan Begum) 영묘 (1385년경),
완성되지 않은 에미르 부룬둑(Emir Burunduk) 영묘(1390년경)-의 주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마지막 초르탁은 쿠삼의 성소와 북쪽 안뜰을 잇는다. 왼쪽에는 티무르가 가장 사랑했던 부인인 투만
아카(Tuman Aka)를 위해 지어진 모스크와 영묘(1404-1405)가 있다. 문 위쪽에는 "무덤은 하나의 문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간다"고 쓰여져 있다. 길의 끝에는 이곳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인
홋자 아흐마드(Khodja Akhmad) 영묘(1350년경)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티무르의 부인인 쿠틀룩 아카(Kutlug Aka) 영묘(1361)가 있다.
초르탁 안에서는 벽돌로 지어진 11세기의 미나렛의 일부가 보인다. 이것은 사마르칸트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몽골침입 이전 시기의 구조물이다. 초르탁 동쪽에는 쿠삼 이븐 압바스(Kussam-ibn-Abbas)
모스크(1460)와 11세기에 지어졌다가 1334년에 재건된 지아랏호마(Ziaratkhoma(순례의 방))이 있다.
출입구 옆에는 포도와 아라비아 문자를 표현한 목제 프리즈가 보인다. 지하에는 40일 간의 단식을 위한 칠랴호마(Chillyakhona) 방들이 있다. 그리고 목재 격자창을 통해서 쿠삼의 무덤 (1380년경)이 있는 구르호나(Gurkhona(묘실))이 보인다.
샤히진다 내부의 첫번 째 푸른 돔이 있는 건물이 울르그벡 일족의 묘이며, 계단 끝 왼편에 푸른 빛 아라베스크
모양의 묘가 조카 딸 샤디 물크 아카(Sha야 Mulk Aka)의 묘이다. 이 조카는 어려서 죽었는데 이를 가엽게 여긴
티무르가 자신의 여동생인 쉬린 비비아카(Shirin Bibi Aka) 에게 명하여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묘소를 지을
것을 명했다.
조카의 묘를 완공한 그녀는 그 건너편에 자신의 묘를 만들것을 지시했으며 이 두 개의 무덤은 1371년부터
1373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 샤디 물크 아카 묘소는 푸른 색 모자이크 타일이 매우 인상적이다.
사마르칸드 사람들은 지금도 푸른빛의 아름다운 영묘에 찾아와 기도를 드린다.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