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6:1~11 가만히 있어! 2021. 4. 7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1)피난처시로다 (셀라) 8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 그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1)피난처시로다 (셀라)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알라못에 맞춘 노래’ 알라못은 무슨 뜻인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말도 여러 곡조 중의 하나로 봅니다. 같은 말이 역대상 15:20 절에 나옵니다. 역대상 15장은 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올 때 처음에 수레에 싣고 오다가 실패하고 두 번째는 율법에 규정된 대로 레위인이 메고 오게 합니다. 이때 찬양을 하는데 그 찬양의 곡이 ‘알라못’입니다. 15:21 절에는 ‘여덟째 음’이라는 곡도 있습니다. 시편 46편을 배경으로 된 찬송이 찬송가에 두 곡이 있습니다.
찬송가 70장입니다. 작사자는 미상인데 우리나라 ‘찬숑가’에 있던 것이고 곡은 영국국가입니다. “1.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3.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없네 4.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
585장입니다. 이 곡은 마르틴 루터가 1529년에 독일 민요를 바탕으로 작사 작곡한 것입니다.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이제 본문 1~3절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며 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만 보면 환난 중에 도와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환난이란 지금도 일어나는 질병과 가난과 어려운 사고들을 환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환난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에게나 다 일어납니다. 그러면 무엇을 환난이라고 합니까?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고 바닷물이 솟아나고 그것이 넘쳐서 산이 흔들립니다. 이런 환난은 우리가 말하는 환난의 극심함이 아니라 창조 세계가 무너지는 노아 때 홍수와 같은 일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 가장 높은 산보다 물이 십오 규빗이나 더 덮였습니다. 십오 규빗은 약 7m입니다. 그 상태로 150일 동안 잠겼으니 코로 호흡하는 모든 것들이 다 죽었습니다(창7장). 지금 이 지구의 바다가 얼마나 크냐 하면 지구의 70%를 덮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산이라는 에베레스트가 해발 8,848m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깊은 해구는 마리아나 해구로 11,034m라고 합니다. 산을 다 깎아 바다에 넣으면 다 잠겨버립니다. 지금 지구상의 모든 인구를 바다에 다 던져 넣으면 해수면이 얼마나 높아질까요? 며칠 전에 인터넷에 이런 기사가 떠서 읽어 보니 약 80억의 인구를 바다에 다 넣어도 머리카락 하나만큼의 높이도 올라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머리카락 두께가 0.05mm인데 80억 인구가 바다에 다 빠져도 해수면은 0.0044mm만큼 상승한다고 수학적으로 계산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 인생이 먼지라는 겁니다. 80억의 인구를 바다에 던져 넣었는데도 해수면의 높이가 높아진 것을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우리가 세상이 어떠하고 하나님이 어떠하다고 함부로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땅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인데 타락하고 나니 자기 주제를 모르고 쓸데없는 것을 욕망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불안하고 염려합니다. 땅의 먼지인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땅이 흔들려 바다에 빠지든지 바닷물에 땅이 다 덮여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은혜로 방주에 탄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영원한 피난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4~7절입니다. 한 시내가 있어서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성소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처음 지상에 계신 곳은 에덴동산입니다. 그 동산 중앙에서 네 강이 흘러나왔습니다. 시냇물이 흐른다는 것은 생명을 말합니다. 모든 생물은 물이 있기에 살아갑니다. 생물에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 그런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새벽에 하나님 도우십니다. 새벽이란 밤이 끝나는 시점입니다. 시편 2편도 뭇 나라가 소란한 이유는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소리를 내시면 땅이 녹아버립니다. 천지가 다 녹아내려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왜 야곱의 하나님입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성경은 자주 말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먼저 나오고, 이삭을 낳고 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런데 야곱이 나오고 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내용이 많이 나오지만, 특히 시편에서는 야곱의 하나님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시편이라 축약하여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을 우리는 창세기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은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를 계시하는 겁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도 언약의 신실함을 말씀합니다.
다시 본문 4~7절에서 시냇물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랠프 어스킨’이라는 사람은 강을 성부 성자 성령의 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생수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스가랴 13:1절입니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메시아 예언이니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7:38~39절입니다.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온다는 말씀이 성령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생명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우물이라고도 합니다(사12:3).
이뿐 아니라 성경은 여러 곳에서 생명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 동쪽에서 생명수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자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수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22:1~3절을 보면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여주는데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 생명수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그곳에는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이런 곳이 있기에 여기에 참여한 자들은 천지가 사라져도 두렵지 않습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의 행적을 어디서 봅니까? 성경을 통하여 봅니다. 성경을 보면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그 흥망성쇠가 어떠한지 말씀대로 되었음을 봅니다. 세계의 제국이라는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제국들이 성경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십니다. 그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십니다. 세상의 무기를 없애버립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행적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시편 76:1~3절입니다. “1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2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3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셀라)” 시편 76편을 볼 때 다시 볼 것이기에 오늘은 이 말씀만 봅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살렘에 있습니다. 살렘이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장막은 시온에 있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말하지만 예루살렘에 참된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무기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애버린 곳이 천국입니다.
이사야 2:3~4절입니다. “3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1)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이 평화를 말씀합니다.
이사야 9:5~7절입니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전쟁을 없애는데 한 아기가 옵니다. 한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며 평강의 왕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메시아를 예언하는 데도 사람들은 힘의 메시아를 원합니다.
스가랴 9:9~10절입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몇 곳만 찾아보았습니다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는 전쟁을 없애는 평화의 왕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나 오늘 우리나 간에 어떤 메시아를 원하였습니까?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2009년에 요한계시록 땅의 전쟁을 설교하면서 인용한 내용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장 지글러 라는 사람이 지은 ‘탐욕의 시대’라는 책을 보면 120억 명이 먹고살 양식이 생산됨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것은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편성된 세계의 경제, 사회, 정치적 질서가 살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부조리라고 합니다. 온갖 구제정책(평화기구, 난민 정착, 기아 퇴치, 부채탕감)에 투입되는 돈이 560억 달러인데 한 해 군비로 지출되는 돈이 7,800억 달러라고 합니다. 약 14배가 전쟁 비용입니다. 세상에 전쟁 준비만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굶어 죽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쟁 준비를 하는 이유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들이 다 녹아버립니다(벧후3장).
본문 10절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세상이 요란한 이유는 더 많은 전쟁 무기를 갖추기 위함입니다. 전쟁 억제력은 강한 군사력에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인들 이렇게 말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온통 소란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무기를 준비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본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행적을, 하나님의 일 하심을 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14:10~12절입니다.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진퇴양난의 홍해 바다 앞입니다. 오늘 우리도 환난을 만나면 이런 고함을 지르고 있습니다. 이때 모세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어지는 13~14절입니다.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이 없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구원은 그들의 안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홍해가 갈라지고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바닷물에 잠겨버리는 그런 구원을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한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온 세상이 요란합니다. 개인이나 어떤 단체나 간에 요란한 것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이란 여러 의미로 사용됩니다. 세상살이를 목적으로 하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한 요란함이 있습니다. 내세적인 구원을 생각하면 그곳에서도 더 나은 상을 위하여 또 다른 요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랍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그에게서만 나오고 소망이 그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시편 62:1,5).
본문 11절입니다. “봉독”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실패라고 여기는 이 세상에서 잠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있음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구약의 말씀들을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 말씀을 지금 여기서부터 맛보는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