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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저- 고레에디 히로카즈 영화 자서전
출-바다(2018.6.5.)
독정- 2018. 9. 26. 수
·영화는 감독 개인의 작품이고 개인적인 채로 영화라는 거대한 강의 한 방울이 된다 나고 자란 고향과는 다른 향토이지만 국적이나 민족, 언너에 폐쇄적이지 않은 향토이며 건전한 향토애다. 창작자도 스폰사도 공공에 참가할 때는 어떤 권리관계나 이윤 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양하고 성숙한 공공의 공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모여야 한다. 가장 애매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풍성한 세계, 즉 공공에 다 함께 참가하고 기여하고 가담하는 것, 이것이 방송의 근본에 있는 철학이자 가치다. 스폰서는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매력적 공간을 만들어 사회를 성숙시키고 물건은 그 결과 팔려야 하는 그런 발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방송이다. 초상권 비롯 여러 무제가 있지만 방송은 기본적으로 저작권 프리로 만들어서 재이용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사회 공동체 재산으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잇게 하고 무엇에든 상용되도록 바꾸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는 쪽도 만드는 쪽도 방송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지 모른지 되어 어느새 인터넷 세계에 유린당할 것이다.
· 교사가 생기 넘치는 것은 아이들에게 중요하다. 아이들도 소 볼보기 귀찮다고 생각하지만 학급회의를 하면 “모모세 선생님이 열심히 하시니까 해드리자”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열심히 일하는 선생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소가 설 연휴에 일정일보다 한 달 가까이 새끼를 낳다가 죽자 아이들은 울면서 새끼 소의 장례식을 치렀다. 사산이어도 어미 소는 젓이 나와 매일 짜 줘야 한다. 아이들은 처음 목표였던 젖 짜기를 하고 급식 때 데워 먹으며 그 느낌을 시로 지었다.
쭉쭉쭉쭉
오늘도 젖을 짠다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모두 함께 젖을 짠다
모두 기쁘다
그리고 슬프다
젖은 나온다
하지만 새끼는 없다
슬프지만 젖을 짠다
· “맛없어 이건 카레가 아니야.”라고 비판받아 본교장의 맛을 배우기 위해 홈스테이 생활을 시작한다는 구성이다. 그런데 예상과 반대로 학생이 만든 버몬트 카레가 맛있다는 호평을 받아버렸다. 학생은 기뻤지만 나는 스리랑카 남자에게 “뭐라고 이유 대며 맛없다고 해 주세요.” 부탁했다. 남자는 고기 볶는 방식에 트집을 잡으며 맛없다고 하자 학생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풀이 죽었다.
· 30년간 후생 복지 행정에 몰두하여 책을 쓴 사람이 자살하자 그의 아내를 인터뷰하려고 찾아갔을 때 “제게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남편의 죽음일 뿐이지만, 남폄의 직업상 아주 공적이며 사회적인 죽음이라는 측면도 있겠지요. 그러니 남편이 인생을 걸고 힘쓴 복지에 대한 방송이라면 아마 제가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그이도 바랄 거라고 생각해요.”하며 승낙받는다. 인터뷰 중에 필요한 기록은 화장실에 들어가 몰래 적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했다. 매달 몇 번씩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미망인에게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완성된 책을 들고 갔을 때 “제가 왜 당신의 취재에 응하기로 했는지 아세요? 처음 취재하러 온 날, 거기서 쭈삣쭈삣 앉아 있는 당신이 맞선 봤을 때 남편과 무척 닮아서요.”라고 했다. 내가 그녀에게 이끌린 것은 그가 쓴 시나 작문이 나와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복지를 주제로 삼았지만 한 쌍의 부부 모습, 한 여성의 슬픔 치유 과정을 향해 있었다.
대부분은 미디어는 죽음의 사적 부분, 즉 자살에 대한 충격이나 유족의 슬픔을 취재하려 한다. 개인적 슬픔이 임팩트가 더 강하고, 별 생각 없이 스토리를 구축할수 있기 때문. 하지만 텔레비전 저널리즘은 공공, 사회 측면에 눈길을 줘야 한다. 개인적 부분만 찍을 때도 개인적 부분 건너편에 항상 공적 부분을 바라보고 방송에서 묘사하는 대상이 열리도록.
우연히 내가 카메라를 드는 쪽이 되었고 당신이 찍히는 쪽이 되었지만, 그로써 만들어지는 작품 혹은 프로그램에서 서로의 노력으로 뜻 깊은 공적 장소와 공적 시간을 창출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방송이다.
·배우에게 에드리브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 역할에 완전히 빠져서 분출하는 단 한 번의 대사나 움직임, 표정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것이다.
·전쟁을 기억하는 형태는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다. 전승 기념으로 세우는 기념비와 희생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비가 있는데 멋진 부분은 피해자 이름과 가해자 이름이 양쪽 다 함께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피해자 측에서 가해자 측에도 서지 않는 자세는 매우 신선하였다.
·가해를 망각하기 쉬운 국민성-가해의 기걱은 없던 샘 치거나 다들 그렇게 했으니까라고 정색하거나 불문에 부친다. 즉 나라 전체가 잊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작품 제목으로 붙인 망각은 그런 점을 가리킨다. 헌법 제 9조는 대담하게 말하자면 성서에서의 원죄다. 가해를 망각하기 쉬운 국민성에 대한 일종의 쐐기로 우리가 항상 죄의식을 자각하며 전후를 살아가는 데 필요했던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살해당한 자식이나 부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남자가 홀로 여럿에 맞서는 꿈같은 이야기가 수없이 만들어지고, 한국영화에서도 복수는 가장 자주 다루어지는 모티브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
· 네 번 째 작품<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도쿄에서 일어난 네 아이 방치 사건을 각본으로 썼다. 아버지는 장남이 초등학생이 되기 전에 증발, 어머니는 백화점에서 일하며 몇 몇 남성을 알게 되어 임신과 자택 출산을 반복했다. 아이는 장남, 장녀, 차남, 차녀, 삼녀로 다섯 명이었는데 차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중 아무도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학교에 간 적도 없다. 장남이 열네 살 될 때 어머니는 애인과 살기 위해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가 가끔 생활비를 보내었다. 두 살이던 삼녀가 장남의 친구들에게 폭행을 당해 죽가 장남은 유체를 잡목림에 묻었다. 집주인이 아이들끼리만 산다고 경찰에 통보하여 사건이 드러났다. 비판은 아이를 방치한 어머니에게 집중되었지만 어째서 소년은 동생을 버리고 집을 나가지 않았을까? 아동삼담센터에서 보호 중이던 여동생이 “오빠는 다정했어요.” 하는 신문 기사 제목에서 어머니가 그저 신경질적으로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면 장남도 동생을 똑같이 대했을 것이지만 그들 모자 사이에 보도에서는 엿볼 수 없는 풍성한 관계가 구축되었던 시기도 짧지만 있었을 것이라고 , 그들 나름의 성장과 희망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불량식품 가게는 초등학생의 집합소로 삼녀를 죽게 만든 친구를 만난 곳이다. 그 가게는 특이해서 과자를 사러 온 아이들에게 도화지와 크레용을 주며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림 몇 장이 걸려 있었는데 장남의 거짓말 그림일기로 진행되는 형태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현실은 혹독하지만 그림에는 “가족과 함께 00에 갔다.”며 즐거운 일만 쓴 그림, 마지막 여동생을 매장한 날 그날 “매우 멋진 일요일이었다”는 소년의 내레이션이 겹치며 끝나는 구성이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싶었던 건 아이를 방치하고 도망간 엄마가 옳지 않다거나 아이를 이렇게 대해야 한다거나 아이를 둘러싼 법률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는 등의 비판이나 교훈이아 제언이 아니다. 정말로 거기서 사는 듯이 아이들의 일상을 그리는 것, 그 풍경을 그들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를 통해 그들의 말을 독백이 아닌 대화로 만드는 것, 그들 눈에 우리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는 것이 내가 원했던 거였다. 칸 영화제에서 수상하자 기자가 말했다 “당신은 영화 등장인물에게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아이를 버린 어머니조차 단죄하지 않지요.”라는 지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는 사람을 판가름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감독은 신도 재판관도 아니다. 악인을 등장시키면 이야기 세계는 알기 쉬워질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관객은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 일상으로까지 끌어들여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일상으로 돌아가 그 일상을 보는 방식이 변하거나 일상을 비평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 <아무도 모른다> 작품의 네 주인공을 찾기 위해 헤매다 한 소속사가 갓 들어와 아직 오디션도 본 적 없는 아이라는 아이를 만난 순간 ‘이 아이다’는 생각이 들어 연기 테스트도 하지 않고 주인공으로 정했다. 남매 넷이서 다 함께 축제에 가거나 고기를 구워 먹는 등 아이들이 서로 친해지는 시간을 만들었다. 네 명 각자에게 용돈을 줬는데 차남은 벌써 다 써버려 나중에 먹고 싶은 음식을 봐도 돈이 없어 못 싸먹었다. 그런 모습을 관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촬영에서 쓸 옷도 함께 마트에서 샀다.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들어 아이들 취향을 점점 알게 되었다. 평소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식으로 밥을 먹는지, 그런 요소를 각본에 반영하였다. (우리가 대학원선생님들과 밥을 먹는 이유이기도) <아무도 모른다>는 하드보일드(냉정한 사실적 표현-대표: 헤밍웨이) 연기적 기술을 발휘하기보다 고개를 조금 숙인 표정으로 보는 사람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편이 좋다. 남동생과 누나가 싸우는 장면을 설정해서 남동생이 무선 조종기를 가지고 놀 때 누나가 화를 내며 걷어차도록 부탁해놓고 남동생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동생은 진심으로 울컥해서 ”물건에 화풀이하는 거 아냐.“하며 평소 어머니에게 듣는 말 그대로 누나에게 호통쳤다. 일부러 누나에게 그렇게 시켰다고 해도 둘은 차를 타고 갈 때도 반대쪽으로 보고 앉아 한나절 말을 하지 않자. 큰언니역 아이가 ”둘 다 바보 아냐? 연기란 말이야, 연기!“라고 말했다. 이런 속임수에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캔 로치 감독에게 배웠는데 캔 감독의 영화 <캐스>에서 동생을 시샘해서 동생이 기르던 매를 죽여 쓰레기통에 버리는 형을 설정, 소년은 집에 와 매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찾아다니다 마지막에 쓰레기통 속에서 죽은 매를 발견하는데 그때 표정은 도무지 연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매가 없어지면 찾아다오.“라고 미리 소년에게 말한 뒤 실제로 찾게 했다. 진짜 소중히 여기던 매는 죽이지 않았고, 그와 닮은 매의 시체를 쓰레기통에 넣어 둔 뒤 소년이 그것을 발견하고 끌어안는 장면을 찍었다. 소년은 죽은 매를 껴안은 뒤 볼에 비비거나 날개에 눈물을 흘리자 않고 시체를 형에게 가져가 내민다. 형은 질색하지만 소년은 그런 형에게 매를 들이민다. 그 장면이 참으로 리얼했다. 감성적으로 흐르지 않게 한 켄 로치 감독의 연출이 돋보였다. 감독과 어린소년 배우 사이의 신뢰도 회복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즉흥적으로 나오는 표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조명을 쓰지 않고 되도록 자연광을 살려서 슈퍼 16밀리 카메라로 촬영했다.
·<걸어도 걸어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걸렸는데 죽음을 향해가는 인간이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치는 일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웃을 수 있는 영화로 만들려고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입원 중에도 아들의 이 걱정을 했다. “이 제대로 닦고 있어? 아~해 봐!”
·영화에서 먹는 장면은 밤의 장아 요리로 한정하고 나머지는 대체로 요리를 하거나 치우는 장면으로 만들었다. 식사 장면에서 먹는 것보다 준비와 정리가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들이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넌 이마가 예쁘니까 좀 더 내놓으렴” 이 대사는 분장실에서 두 사람이 했던 대화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소리에도 세심한 주의를 했다. 가족 모두가 거실에 있을 대 정원에서 료타의 매형과 조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오는 장면, 일반적으로 세트에서 취약한 부분이 소리의 퍼짐새와 반항이다. 천장에 울려서 실내라는 느낌이 난다. 그래서 놀다 돌아오는 아이들 목소리를 도호 스튜디오 주차장에서 후시 녹음하여 그 소리를 장면에 입혔다. 그랬더니 단지 그것만으로도 ‘바깥’ 장면으로 보였다. 그야말로 소리의 마법이다. 소리의 크고 작음이 아닌 멀고 가까움에 주의를 기울여 소리의 거리감과 확산의 차이를 더함으로 세트와 현지 촬영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 리얼한 세계를 묘사할 수 있다. 내 영화가 일반적으로 상실을 그린다고 하는데 <아무도 모른다> 인터뷰 때 러시아 기자가 “당신은 종종 죽음과 기억의 작가라고 불리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은 나중에 남겨진 사람, 즉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나 자살한 남편의 아내, 개해자 유족 등 누군가가 없어진 뒤에 남겨진 사람을 그린다.”고 했다. 서양인에게는 삶이 끝난 다음에 죽음이 시작된다. 삶과 죽음은 대립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신의 대리인이 동양에서는 죽은 자가다. 죽은 사람은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화를 바깥에서 비평하며 윤리 규범이 되는 역할을 맡고 우리를 비평하는 것이 죽은 자이고 이야기 안에서 우리를 비평한 것이다. 죽은 자는 신의 대리인인 셈이다. 가족이니까 들키기 싫다거나 가족이니까 모른다 같은 경주가 실제 생활에서 압도적으로 많다. 남자의 안식처는 전적으로 집 밖에 있다.
· “아직 푸른 하늘, 이제 괜찮아” 노래 소절이 감동이다. ‘아직’과 ‘이제’를 쓴 방식이 감동적이다. ‘아직’은 언젠가 잃어버릴 미래를 향한 단어이고 ‘이제’는 짊어져 온 과거에 대한 단어, 그 두 가지에 기대어 ‘지금’이라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노래를 들은 순간 느꼈다.
·“길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을 때 전부 줍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하지만 쓰레기는 계속 떨어져 있으니 영원히 다 주울 수 없다.”는 식의 치열하게 사는 느낌 표현
<걸어도 걸어도>에서 찍는 것 전부를 존경하며 찍고 싶었다. 책상 위 백일홍도 일상의 사소한 일도 전부 존경하고 사랑하며 찍고 싶었다. 단순히 예쁘게 찍으려는 게 아니라 ‘근사해, 좋아’라고 생각하며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한 명 더 그곳에 있는 듯 여겨지게 만들었다.
·<공기 인형>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모티브로 했다.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을 사랑해서 자기도 인간이 되지만 마지막에는 물거품으로 사라진다. 또 참고한 것은 판타지 영화 <오즈의 마법사> 소녀 도로시와 뇌가 없는 허수아비,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등 다들 무언가 각자 결여된 존재들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채우려고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영상 세계처럼 데포르메(자연의 대상을 예술적으로 변형하는 것)을 하자고 행각했다. 또 시 <생명은>에서 생명은 그 안에 결여를 품고 그것을 타자로부터 채운다.>라는 부분이 그야말로 공기인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를 그대로 썼다. 그녀가 느낀 충만함, 자신의 몸 안에서 좋아하는 남자의 숨을 느끼고, 공기 펌프를 버린 뒤 쪼그라드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나이듦과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여도 좋았을지 모른다. 인간과 인형 사이의 디스커뮤니케이션은 결여를 채워 주는 충족감과는 별개로 존재할 것이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인형이기에 타자와의 불완전한 소통 문제를 제대로 묘사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청년의 존재를 원작보다 부풀렸다. 타자의 숨이 자기 몸속에 들어와 채워진다.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 풍부한 가능성을 느꼈다. 공허는 타자와 만나는 장소에 펼쳐져 있다. 공허는 가능성이라는 하나의 모티브를 따라 여러 에피소드가 다충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사고의 과정이 몇 층이나 있어 그 점이 강하게 전해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다. 조금 후한 자기평가이다. 자신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곧 타자와 연결될 가능성이다. 주연인 공기인형 역 배두나씨는 메이크업을 하면서 대본을 읽고 울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걱정했더니 메이크업 담당자가 “촬영 중에는 인형 역이라서 못 우니까 지금 울어서 감정을 만들어 둔데요.”했다. 매일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NG 딱 두 번 낸 것도 대사를 틀린 게 아니라 감정을 참지 못해 울었을 뿐이다. 다카하시 마시아 씨가 연기하는 전 시인의 집을 찾아가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 뒤 고개를 숙였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넘쳐흐른 것이었다. “내가 움직일 테니 카메라는 자유롭게 움직여 주세요.”하며 프레임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았고 일류 선수가 시합 중 자기 말고 나머지 열 명의 포지션과 움직임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파악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사다리에 공기인형 배두나 배우가 올라가면 남성들이 그녀 양쪽 겨드랑이를 떠받치고 몸을 굽혔다 폈다 하며 손으로 들어 올린다. 카메라는 베두나의 발 언저리만 찍는다. 화면 위로 발이 사라졌다 다시 들어오고, 또 사라졌다 들어오는 것을 좋은 그림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 촬영이 끝난 뒤 “ 저 배우 굉장하네요.” 했다. “우리도 몇 번이나 들어 올리다 보면 지쳐서 조금씩 못 들어 올리게 돼요. 그때 그녀는 스스로 조금씩 다리를 구부렸어요. 화면에서 자기 발을 없애려고요. 그건 자신이 떠받들려 있으면서도 카메라 프레임이 완전히 보인다는 증거이다. 정상급 신체감각 아니면 못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베두나에게 물었더니 “벽을 보고 있었어요.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시선의 높이가 어디인지 확인한 뒤, 좀 내려갔다 싶으면 그만큼 발을 들어 올렸지요.” 했다. 그런 빼어난 능력의 소유자는 어지간해서는 만날 수 없다. 카메라는 대상을 바라보기 위한 도구이면서 대상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이기도 해서 흔들리는 이유가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에 있는지로 상당히 달라진다.
·벌집의 정령이 동네 영화관에서 상영되어 보러 갔다. 어린 아이로 나왔던 주연 아나 토렌터를 영화에서 만나 기뻤다. 어릴 때 아역으로 만났던 배우가 29살이었을 때 “지금 당신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욌어요.”했다.
· 개인을 강하게 만드는 것과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풍성한 삶을 제시하는 것, 그런 생각의 이모저모가 <고잉 마이 홈>이다. 복선은 한 편 안에서 거둬들여야 한다. 다음 편에서 복선을 거둬들이려 해 봤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선로를 걷는 건 어렵지만 이렇게 보이는 장소를 찾으며 걷는 것 자체는 매우 재미있다는 점을 깨닫고 줄거리를 규슈 신칸센 철로가 서로 엇갈리는 순간 그 자리에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믿고 여행을 떠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바꾸었다. 그러나 기적이 이루어지기를 빌러 가서 빌지 않고 돌아오는 이야기로 만들어 그냥 돌아오지만 성장하는 아이들 이야기로 만들려 했다. 줄거리를 본 관계자가 “부모가 각자 아이들이 없어진 것을 알고 쫓아가서 가족 넷이서 다시 잘해 보자며 얼싸안고 끝나면 감동적이지 않을까했지만 정반대의 세계를 그리고 싶어서 오디션을 볼 때 아이들에게 ”아이 넷이서 부모에게는 비밀로 하고 신칸센을 보러 가고 싶어 했어, “4천엔이 들거든, 어떻게 하면 돈을 모을 수 있을지 서로 의논해 보렴“ 상황 설명 후 이야기하게 했다. 연기력 확인 뿐 아니라 각본 리서치의 의미도 담겨 있다. ”아빠가 울트라맨 인형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팔면 돼.“도 오디션에서 들은 아이의 아이디어이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면 좋을까? 했을 때 ”유토리- 과도한 주입식 교육 말고 자율 존중 교육이 다시 부활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내가 생각 못한 거고, 죽은 애완견이 되살아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이루고 싶은 기적을 물었을 때 그렇게 죽은 존재가 되살아난다고 믿을 수 있는 건 초등 4학년 정도가 마지막이겠구나 싶어 캐스팅했다. 어째서 기적을 빌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와 연결되는 세계도 장남이 떨어져 살고 있는 아버지와 통화하다가 아버지에게 듣는 말이다. 장남은 그때는 뜻을 몰랐지만 그 말이 마음속에서 켜져서 신칸센이 엇갈리며 지나가는 순간 ‘우리 부모님은 이제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고 세계는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돌아온다. 그리고 그 말은 남동생에게 이어져 남동생이 아버지에게 되돌려준다는 일련의 흐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장남이 살 집을 찾아서 베란다에 세웠을 때 할아버지 흉내를 내며 손가락을 핥아 풍향을 확인하며 “오늘은 재가 안 쌓이겠어.”라는 대사를 쓸 수 있었다. 이 대사가 살아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장남의 성장이며 미래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나는 주제를 찍기 전에 아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자잘한 디테일을 채워 나가는 중에 생기는 경향이 강하디. 빈 화면에 아이들 목소리만 들리는데 그 장면에서만 시간이 아이들 곁에 있지 않고 다른 쪽에 있다. 그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 그 순간 코스모스를 두고 사라진 사람이라는 과거와 그곳에서 아이들이 모은 코스모스 씨앗을 뿌리라는 미래로 시간을 앞뒤로 살짝 넓혔다. 주인공이 이미 사라져 버린 것과 앞으로 이어질 미래로 의식을 펼쳐 나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그 부분만 시간을 동시에 진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노림수라고는 해도 카메라의 위치를 살짝 바꾸었을 뿐이어서 그 점을 읽어 내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촬영할 때 신경 쓰는 점은 어른 이상으로 존경하며 찍으려고 의식한다. 그래도 몇 장면은 대사 없이 그들이 품고 있는 어떤 날것의 감정을 관객이 의식하도록 찍어야 한다. 창가에 앉아 있는 장면은 바람이 불어 젖은 앞머리가 바람에 날려 기분 좋다는 걸 느끼렴하고 거울 보는 여자 아이에게는“이 장면에서 뭘 생각하고 있나요?” 하기에 “이 어머니는 소중한 딸과 떨어져 사는 거야.” 라며 자기 미래와 겹쳐 보도록 했다. 단 감정은 설명하지 않았다. 무언가 가만히 바라보는 표정을 바라보는 곳을 비추지 않고 찍으면, 관객은 배우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포함하여 프레임 바깥쪽을 상상하며 그 인물의 내면으로 문득 다가간다. 그래서 아이를 찍을 때 가장 중요한 연출은 아이를 어디에 둘지 정하는 것이다. 고키는 말할 때보다 잠자코 있을 때 표정이 매력적이라서 재잘거리는 건 남동생에게 맡기고 바라보거나 생각하는 등 침묵을 담당하게 했다. “어째서 죽은 자를 계속 찍는가?”물으면 죽은 자는 확고한 존재이며 죽은 자의 눈을 통해 지금의 어른을 객관적으로 비평할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세로축에 놓으면 죽은 자는 세로축에 존재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를 비평하는 존재, 아이는 같은 시간축에 있지만 수평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비평하는 존재라는 느낌이다. 내 영화에 죽은 자와 아이가 중요한 모티브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두 존재로부터 사회를 바깥에서 비평하는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진 재해 때 우선 가서 보고 그 땅에 서서 냄새를 맡아보고 돌아왔다. 지진 재해에 대한 내 행동의 첫걸음이었다. 생생한 기억으로 몸에 남아 있다. 가령 도서관이 뗘내려가서 책을 보낸다면 밝은 책만 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라면 밝은 작품을 바란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1965년 무렵 아이가 병원에서 뒤바뀐 사건이 많이 일어났고 피를 선택하여 서로의 아이를 교환했다. <뒤틀린 인연>에 오키나와의 두 가족은 서로 아이를 바꾸지 않았다. 현재가 설정인 이 영화에서 피로 결론 짓지 않은 착지점을 제지할 수 있다면 지금 그들의 모습을 그리는 의미가 있다.
한 집안은 일류대학 나온 뒤 도시의 대형 건설회사에서 건축가로 일하는 아버지 로카는 엘리트 특유의 오만함이 역겨운 인물로 설정. 아들과 잘 놀아줄 시간이 없어 주로 엄마가 아들을 유치원에 데리고 다니는 집안이다. 한편, 한 집안은 지방에서 전자상회를 하는 아버지 유다이와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내와 여섯살짜리 맏이를 비롯한 세 아이와 함께 북적거리며 지내는 집안이다. 평화로운 두 집안에 어느 날 6년 전 아이를 낳은 병원에서 두 집 아이가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법정에서 그 당시 간호사가 나와 증언하기를 로카씨가 특실에 입원해서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너무 잘 살고 있어 그 당시 재혼해서 힘들었던 간호사 처지에 화풀이로 두 집의 아이를 바꾸어놓았다는 말을 듣는다. 여기서 감독은 피와 시간에 결정적 대사를 주었다. 오만한 엘리트 로카(아버지역)가 자기 아들이 피아노도 잘 못 치고 좀 처지는 것에 평소 속상해하던 터라 “역시 그랬던 거군.”하는 말을 하게 되는데 이 말이 아내에겐 평생 지을 수 없는 못으로 남는다. 전자상 아버지는 “시간이죠......애들한텐 시간이에요.”한다. 로카 아버지 의 후처로 돌아온 로카의 계모는 “부부도 같이 살다보면 닮아 가거든.” 하는 말로 은근히 시간편을 들어주는 대사를 한다. 로카를 이중성이 있는 입체 인물로 묘사하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을 기억을 더듬어 파내며, 부자가정의 거만한 아버지라면 어떻게 말할까를 생각해 입체화했다. 작품 만들기는 기억과 관찰과 상상력 세 가지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영화는 특히 관찰에 비중이 컸다. 가출한 아들을 데리러 온 로카에게 전자상 아빠 유다이는 “육아는 공을 던지는 게 아니라 받는 거야.”라고 말한다. 실제 로카역 배우 후쿠야마는 소통능력이 뛰어나고 상대 연기를 정확하게 받아 연기하는 사람이고 음악을 한 사람이라 귀가 좋아 아들의 수험장에 따라가는 장면에서 “이 학교는 돈 많이 벌었나 봐.” 했고 바뀐 아들을 일주일씩 바꿔 키워보자며 자기 아들을 데리고 전자상 집을 처음 찾아가면서 낡은 가게 외관을 보고 “이런 이런” 하는 대사로 얄미운 엘리트 느낌을 잘 표현했다. 로카 건축가아버지는 아버지가 던지고 싶은 공을 던지는 투수형이고 전자상 아빠는 아이가 어떤 공을 던져도 받아 내는 포수형인데 전자상 아빠가 너무 멋져 보여 잘라 냈다.
쇼핑몰에서 건축가 료타가 “아들을 둘 다 저희한테 주시면 안 돼요?” 하자 전자상 아빠가 “자네, 돈으로 애를 사는 거야?”하고 귀사대기를 갈기는 장면이 있는데, 감독은 강한 비난을 기대했는데 전자상역 유다이씨가 귀사대기를 슬쩍 갈기는 듯, 약하고 힘없는 느낌으로 비난하는 것을 보고 그가 그때까지 가난하게 살아온 인생이 보였다.
두 집에서 아들을 서로 바꾸어 사는 동안 로타집에 와 있는 아이는 심심하고 이제부터 우리를 엄마, 아빠라고 불러라고 하자 왜라고 집요하게 묻는다. 젓가락질이 서툴다고 료타가 가르쳐주고 텐트를 사와 텐트치는 놀이를 해주며 아빠 역을 하려는 료타에게 전자상 아들은 별자리를 보며 별동별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는 질문에 “엄마, 아빠 집에 가고 싶다고 빌었어. 미안해요!” 하며 눈을 가린다. 고장난 장난감을 버리고 엄마에게 새로 사달라고 하라해도 뒀다가 집에 가져가 아빠한테 고쳐달라고 할 거라는 말에 로타는 전자상 아빠보다 못한 자신을 반성하고 가져와보라며 고쳐본다. 한 편 전자상으로 간 로탸의 아들은 두 동생을 잘 돌보며 외로워할 때마다 전자상 엄마가 고장난 로봇인가하며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로봇 고치듯 안아주며 차차 정이 들어간다. 전자상집 아들은 연날리기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역에 숨어 있다가 어른이 개찰구에 들어가는 뒤에 따라 들어가 집으로 도망간다. 이렇게 가출한 아들을 료타가 데리러 갔을 때 전자상집 엄마가 “우리는 둘다 맡아도 상관없어요.” 하는 말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꼴 좋다.’라고 하는 것처럼. 로타가 “둘 다 주세요.” 했던 불손한 대사를 관객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각본은 주이공의 경력, 고급 맨션, 고급 자동차, 미인 아내와 외동아들 등 모든 것을 가진 그에게서 하나씩 빼앗아 나가는 과정을 각본으로 만들었다. 잘 나가는 남자에 대한 저주처럼. 로타는 텐트 치기 한 다음 날 아침에, 전자상집에 사는 것이 미션이라며 보낸 아들이 자기 카메라로 아빠를 많이 찍고 아빠 발바닥까지 찍은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보낸 아들을 그리워하며 찾으러 간다. 하지만 료타의 아들은 아지를 거부하며 달아난다. 아버지가 꽃 만들어준 것 잏ㄹ어버려 미안하고 미션은 끝났다며 사과하며 따라가자 아이가 마음을 연다. 피가 아닌 함께 한 시간이 승리하는 이야기였다. 처음 각본에는 전자상 부부가 비루하고 지성적이지 못한 걸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뽑힌 배우의 캐릭터를 살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작품을 더 자연스럽게 깊이있게 살려냈다. 작가는 작품만 쓰지만 각본을 가지고 영화 만드는 감독은 이렇게 배우의 캐릭터를 보며 두 집 배우들을 처음 만났을 때도 다른 곳에 몰아넣어두고 그들이 어떻게 도시락을 먹으며 어떤 습관이 있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파악하여 각본을 배우와 주제에 맞춰 고쳐나가는 방식이 유리한 듯 하다.
· 영화는 만화와 달라서 두 시간 만에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매체에다. 두 시간 동안 장례식이 세 번 나오면 죽음에 거세게 끌리게 된다. 그래서 처녀에게는 에로스를 담당하게 육체를 찍고, 삼녀에게는 먹는 것을 담당하여 먹음직스럽게 밥 먹는 장면을 중시하며 찍었다. 네 자매의 생명력을 제각각 빈틈없이 묘사함으로써 세 번의 장례식과 논리적 구조가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한 셈이다. 5월 국제영화제에서 10분 넘게 기립 박수를 받으며 거대한 강의 흐름 가운데 한 방울이 되어 무언가 커다란 것에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장소였다.
·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작은 아씨들>을 역이용했다. 아버지가 애인과 도망가고 어머니까지 없어지자 부모의 빈자리를 세 자매가 채우며 겨우 안정적으로 생활하던 때 아버지 부음이 날아와 소란이 일고, 어머니가 장례식 때문에 돌아와 다시 시끄럽다. 아주 현대적이다. 내가 참고한 것은 작은 아씨들 속 네 자매의 구도였다. 네 명이 나란히 무언가를 바라보는 형태가 매우 의식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겨울 창가에서 넷이서 매화나무를 바라보는 장면을 넣었다. 아버지는 죽었지만 아버지 피를 받은 스즈가 있다. 어머니는 없지만 어머니와 동갑인 매화나무와 함께 남겨진 집이 있다. 바다고양이 식당 주인은 죽었지만 전갱이튀김의 맞은 마을에 남는다. 그리하여 사라졌지만 이어지는 것이 장례식을 통해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