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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 욘 2:1-10, 막 16:1-8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에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들을 기록하면서 전체 분량의 약 1/3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할애하고 있다. 그 정도로 기됵교 신앙에 있어서 죽음과 부활은 핵심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배신한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새로운 제자 한 사람을 뽑을 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 중에서 뽑도록 하였다. 그래서 뽑힌 사람이 맛디아였다. 이처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말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부활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정도로 부활의 신앙은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요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물론이지만 오늘날 동방 정교회 계통에서는 성탄절보다도 부활절을 더 성대하게 지킨다. 그런데 비해서 서방교회나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부활절을 성탄절보다 소홀히 여기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오히려 부활주일을 준비하는 기간이 더 길고 더 엄숙하고 더 성대하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신 날은 금요일이다. 그날 해질 무렵 예수님의 시신은 십자가에서 내려져서 아리마대 요셉의 돌무덤에 장사되었다. 돌무덤은 육중한 돌문으로 막혀 있었고, 거기에 총독의 봉인이 찍혀 있었고, 로마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누구도 돌문을 감히 열어서 시신을 꺼내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묻힌 뒤 사흘째 되는 새벽에, 바로 주일 새벽이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며 헌신해 왔던 세 여인이 향료를 준비해서 무덤을 찾아갔다. 그러면서 걱정을 한다. ‘누가 이 돌문을 열어 주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에 놀랄 일이 생겼다. 돌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속을 들여다 보니까 무덤에 아무도 없었다. 빈무덤이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에 무덤 가운데에 한 청년의 모습을 한 천사가 나타나서 세 여인을 위로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한두마디의 말씀으로서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니라’ 하는 말씀이었다. 또 하나는 7절중에 있는 말씀으로서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는 말씀이었다. 천사들이 세 여인에게 알려주엇던 이 두마디의 말씀을 우리도 귀담아 들으면서 부활의 의미와 부활의 역사를 다시 한번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두마디 말씀을 다시 한번 자세히 새겨보도록 하자.
먼저 6절에 있는 첫 번째 말씀이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하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부활이 학실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있었던 사실이다. 부활주일 아침에 무덤을 찾아왔던 세 여인들만 부활의 사실을 목격한 것이 아니다.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였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무려 14번에 걸쳐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때로는 한두 사람에게 나타나기도 했지만, 때로는 수백명의 군중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기도 했다.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부화하셨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확실히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교회가 시작되었고 세계 선교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이 사실 자체가 바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 부활 신앙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가?
1. 예수님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해 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아무리 힘센 장사라도 권력가라도 돈많은 사람일지라도 지위높은 사람일지라도 죽음의 한계는 벗어나지 못한다. 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누가 죽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나?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겠나?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만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고, 영원히 사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사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입증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 속에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길이요 진리요 셍명이신 예수님이 비참하게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셨다고 해보라.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하겠나? 그야말로 죄악과 저주와 거짓과 절망으로 가득한 허무한 세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진리가 거짓에 대해 승리할 수 있고, 사랑이 미움에 대해 승리할 수 있고, 평화가 다툼에 대해 승리할 수가 있고, 정의가 불의에 대해 승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들에게 확실히 가르쳐 준다. 기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진리를 외치고 정의를 실현하고 사랑을 살천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 온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부화하셨다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 부할하셨다는 사실만 알고 있거나 예수님이 부할하신 것을 믿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 자신의 삶 속에서도 부활의 승리를 매일매일 드러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부할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찬양을 드리고 기쁨을 올리고 영광을 올리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부활하신 그 주님을 우리가 모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불의에 대해 정의로 승리하신 것처럼, 거짓에 대해 진리로 승리하신 것처럼, 미움에 대해 사랑으로 승리하신 것처럼 이런 승리를 드러내면서 사는 성도들이 될 수 있을 때 부활의 주님이 내 속에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확실히 입증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의 삶을 주장하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곧 마귀의 세력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이야말로 과연 인류의 구세주이시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입증시켜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영접해야 되겠나? 부활하신 주님은 어떤 사람을 먼저 만나서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겠나? 천사가 말한 두 번째 말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7절의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라고 한 이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가지실 때 제자들에게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다. 이때 ‘부활한 다음에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거기서 만나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막 14:28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한다. 갈릴리가 어떤 곳인가? 예루살렘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권력과 부와 지도층들이 있는 곳이다. 온갖 불의와 모함과 죄악이 뒤엉켜 있는 곳이다. 그러나 갈릴리는 순박한 땅이다. 고기잡는 어부들이 있고, 농사짓는 농부들이 있고,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를 부르셨다. 제자들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자기 죄를 회개하면서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던 곳이다. 어부에서 제자로 거듭났던 자리이다. 새로운 삶을 출발시켰던 자리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새로운 사람으로 출발했던, 거듭났던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부활절은 새롭게 거듭나는 절기이다. 부활절은 새롭게 출발하는 절기이다. 성서에 나오는 사람들,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 거듭나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불안에 떨던 제자들은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 사명감에 불타는 사도들이 되었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인생의 길을 바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예수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예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도가 되었다. 그토록 방탕하던 어거스틴은 33살 부활절 아침에 주님을 만나고 거듭나서 성자가 되었다. 110여년전 언더우드 목사는 부활절 아침에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어둠에 잠겨있던 한민족의 가슴 속에 복음의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처럼 부활절은 새로운 출발이요, 거듭남이요,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 부활주일 아침에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 앞에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새 생명이 새롭게 부활되어 나왔듯이 내 삶이 새롭게 부활될 수 있어야 된다. 새로운 거듭남이 있어야 된다. 새출발이 있어야 된다. 예수님께서 부화하셨다는 믿음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을 구체적으로 내 안에 모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사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살면서 부활의 승리를 드러내고 사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그러했지 않은가?
여러분, 예배를 마치고 혼자 나가지 말기 바란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교회 밖으로 나가서 가정으로 가고 사회로도 가고 일터로도 가고, 모든 가야할 곳으로 가서 부활의 승리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부할하신 다음 갈릴리로 찾아가셔서 제자들을 만났듯이, 부활의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의 만남을 가지시기를 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1827년의 일이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목회하던 헨리 프란시스 목사라는 분이 있었다. 50년 동안 한 교회를 목회해 오던 성실한 목회자이다. 어느덧 팔순이 되었다. 부활주일 아침 아무 기척이 없었다. 가족들은 궁금해서 그 목사님 방을 가보니 밤늦도록 서재에 앉아서 글을 쓰시다가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지막 그가 쓴 글은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게 하옵소서’라는 시였다.
날은 빨리 저물고 어둠이 짙어가는데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을 때
오직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작은 인생은 썰물처럼 멀어가고
땅의 기쁨과 영광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부활의 축복이 내 곁에 있으면
병도 힘을 못쓰며 눈물의 쓰라림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죽음도 무덤도 승리의 개가가 되리이다.
내눈을 감기 전에 십자가를 보게 하소서.
하늘의 새벽이 밝아올 때 허망한 땅의 그늘은 사라질 것이오니
사나 죽으나 부활의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이 글을 쓰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부활하신 주님은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부활의 승리를 드러내놓고 살기 바란다. 이렇게 살아갈 때 부활의 능력과 은총이 여러분의 삶 속에 더 충만하게 이루어질 줄을 믿는다. (1998-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