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세에 가정이 살아 남으려면 / 시 54:1-7, 벧전 4:7-11
하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경고하셨다. 놀랍게도 이 경고는 지난 1900년 동안 한번도 중단됨이 없이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이 경고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에 비해서 오늘날은 말세 중의 말세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 기록된 ‘만물의 마지막’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는 말은 정말 의미하는 바가 크지 않나?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가정생활 역시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부부가 서로 마주보면서 ‘여보’라고 불러볼 날도 얼마남지 않았다는 말은 쉽게 실감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 종말에 대한 성서의 예언은 바로 우리 가정에 대한 경고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본문 7절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준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뛰어넘어 8절 앞에 나오는 ‘무엇보다도’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려고 한다. ‘무엇보다도’는 ‘가장 먼저’ 또는 ‘다른 것은 다 밀쳐두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세에는 서로 사랑하기를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힘써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세에 대하여 경고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교훈이다. 마 24:12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말세는 사랑의 냉각기라고 주님이 경고하고 있다. 정말 무서운 예언의 말씀이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운 때일수록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랑이 우리를 비참한 지경에 몰아넣지 않도록 우리는 열심으로 사랑하는 일에 최우선을 두어야 할 것이다. 사랑이 식어가는 교회를 상상해 본 적이 있나? 사랑이 식어가는 가정을 한번 생각해 보았나? 사랑을 잃고 점점 매말라가는 사회를 한번 상상해 보았나? 얼마나 살벌하고 무서울까?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 식어가는 말세현상을 사회전반에서 뚜렷이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진정환 사랑이 어디에 있나? ‘정말 순수한 사랑이 있을까?’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로 황무지와 같은 시대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가끔 ‘사랑’이라는 황홀한 단어를 사람에게 붙이기도 하고, 때로는 시나 노래의 가사 등에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나 좀 세월이 흐른 뒤에 생각해 보면 진정한 사랑이 퇴색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해요’라는 속삭임 속에 숨어있는 싸구려 낭만과 얄팍한 이기주의를 우리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 정말 통탄스럽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말세에 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말세가 되어서 사랑이 식어지는 현상이 일어날 때 가장 먼저 피해를 당하는 곳이 어디일까? 사랑에 대하여 가장 에민한 반응을 보이는 장소, 그곳은 가정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가정은 사랑이라는 토양에다가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가정은 가족들의 사랑으로 구성된 유기체이다. 고리타분한 표현같지만 가정은 사랑의 샘이 솟는 우물이요, 그 사랑을 마시며 해갈할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오아시스이다. 따라서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가 되면 가정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부부 사이는 물론이고 부모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가정의 붕괴라는 문제를 들 수 있다. 가족관계가 변질되는 사회현상을 앞에 두고 우리가 어떤 낙관적인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정은 이 사회에서 사랑의 수준을 측정해 볼 수 있는 온도계와 같다. 온도계는 기온에 매우 민감하고 가정은 사랑에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사랑이 어느 정도로 식어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일반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차례로 짚어보면 그 해답이 나오게 된다. 오늘날 세계적인 현상으로서 부부간의 별거, 이혼, 계약결혼, 동성애, 성문란, 외톨이 자녀들의 방황, 사생아의 증가, 노인학대 등 끔찍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은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말세가 되면 우리의 가정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이 얼마나 변질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저는 미국 사회의 예를 가지고 말씀드리려고 한다. 제가 미국의 경우를 인용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구조가 좋든 나쁘든 간에 시간이 흐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난 80년대 초에 미국 사회를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연구 분석한 책이 있다. ‘마음의 습성’이라는 이 책은 인기가 있었던 책이다. 미국인들의 의식구조를 잘 나타낸 책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결혼을 의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경향이 많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결혼을 의무로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어니면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에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이것은 우리 스스로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슨 문제이다. 결혼을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보는 사람은 결혼이라는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려고 한다. 결혼이나 이혼을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왜 이와 같은 사고가 미국인들 사이에 퍼져 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철저하게 개인주의, 이기주의, 실리주의 또는 공리주의에 근거하여 결혼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자기 중심적, 자기 보호적인 입장에서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사랑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요시 하는 이런 결혼에는 결코 희생이 따르지 않는다. 상대방을 위해 흐생한다는 것 자체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어떤 미국인 주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가정생활을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 ‘나는 남편을 위해서 희생하지 못해요. 내가 만약 그를 위해 희생한다면 아마 나는 전부를 잃게 될 거예요.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바보처럼 살면 남편은 나를 매력없는 여자, 주견도 없는 여자로 볼지도 몰라요.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나는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가 그 이가 나를 싫어하면 헤어지면 되니까요.’ 이 이야기는 개인주의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변질된 현대인의 사랑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성서가 교훈하는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잇어서 사랑은 자기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렇게 변질된 사랑의 굴레에 매여 있는 남녀는 그 마음에 만족이 없다. 늘 불평과 불만에 휩싸이기 쉬운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욕망을 완전하게 채워주는 결혼생황이 어디 있나? 없다. 따라서 많은 부부들이 자기들의 결혼생활을 평생 해로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할 명분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서 수천명을 대상으로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설문조사를 했던 자료가 있다. 그중에 ‘당신은 지금의이 결혼생활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다. 그런데 응답자의 6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아니요’라고 응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헤어지겠다는 전제를 가지고 살고 있는 부부가 놀랄만큼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80년대 초반의 이야기이다. 그러면 지금은 얼마나 더 심해졌겠는가를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보고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가정생활에서 불만을 가진 사람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가정생활에서 문제점이 남자보다 여자에게 있다는 말이다.
제가 미국의 이야기를 해서 별로 실감이 나지 않나? 그러나 이것은 미국만의 결혼관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한번 둘러보라. 사랑이 식어가는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섭게 변하고 잇는가를 살펴 보라. 굳이 먼 곳을 볼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을 한번 돌아보기 바란다. 아무도 자기가 이기주의자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현대는 여권이 급속도로 신장되는 추세에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자들의 위상에 따라 가정의 양상도 많이 바뀌어 질 것이다. 아내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욕구대로 가정을 이끌어 가려는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이혼하는 부부, 별거하는 부부, 자식을 내버리는 부부, 가출하는 부부 등 변질된 결혼관이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다. 말세의 사랑은 이기주의적인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사회에서 가정을 붕괴시키는 주범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는 분문을 읽으면서 말세, 사랑, 기도 이 세 단어를 주목해서 보았다. 이 단어들은 사서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말세에 사랑이 변질되면 가정이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와 같은 비극에 빠지면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본다. 곧 기도가 막히게 된다. 기도를 하지 못한다. 한번 생각해 보라. 이기적으로 자기 만족이나 채우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른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나?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시는 분인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그분 앞에 드리느 기도가 이기주의로 얼룩져 있다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실까?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을 주고 받지 못하는 부부의 기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7절하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가 있다. ‘너희는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깨끗한 마음을 가져라.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절제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서 마음이 더러워지거나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면 기도가 쉽게 막힌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다는 말은 깨끗한 마음을 가진다는 의미로 볼 때, 이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 관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언제 사람의 마음이 더러워지는지 아는가? 그것은 이기주의자가 될 때이다. 자기만 알고 자기 욕심만 차리는 사람을 보라.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더러운 마음인가? 이것은 결국 자기만을 아는 이기주의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불평불만이 가득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물으나마나 한 이야기이다.
또 ‘근신하라’는 말은 자기 통제, 또는 자기 절제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본래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술에 취하면 자신을 바로 다스릴 수가 없다. 그러다가 술이 깨면 취했을 때 혹시나 무슨 실수를 하지 않았나 하고 전전긍긍한다. 이처럼 개인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자기 통제의 힘을 잃게 된다. 불만이 가득찬 사람은 그 감정을 억제하기가 어려워 결국 말이나 행동으로 그 감정을 폭발시켜 버린다. 성서에 욕심이 지나치면 죄를 낳는다는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사랑을 빙자한 이기심을 자제하지 못하면 결국 죄를 범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만다. 결과적으로 가정이 파괴되어 부부가 나뉘어지고 자녀가 삶의 의욕을 잃게 되는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려는 사람은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기주의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이 침침하고 더러워져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있겠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자기 통제가 곤란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나? 여러분은 혹시 기도가 막히는 사람이 아닌가? 여러분의 사랑이 자신의 가정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나? 가정을 떠받치고 있는 가족간의 사랑이 혹시나 힘을 잃고 쓰러져 있지나 않은지 여러분의 가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바란다.
그러면 변질된 사랑이 넘치는 오늘날 에수믿는 우리들이 꼭 실천해야 할 사랑은어떤 사랑일까? 8절을 보면 그것은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오늘날 이 무서운 세대에서 우리가 가정의 행복을 지키고 가족간의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이 절실히 필요하다. 허다한 죄가 가리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부사이로 말하면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방에게 범하는 어떤 실수, 또는 고치지 못하는 약점, 아니면 치명적인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죄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상대방에게 입히는 각종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피해를 가리켜 허다한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모든 허물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 덮어준다는 말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용서한다는 뜻이요, 다른 하나는 피해를 감수한다는 뜻이다. 어떤 면에서 이 둘은 하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용서하는 자는 바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배방의 어떤 약점, 실수, 치명적인 범죄 등 이 모든 허물을 전부 용서하고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부부사이란 가장 사랑할 수 없는 관계가 될른지도 모른다. 역설처럼 들리는 이 말은 현대인의 이기적인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부는 상대방의 약점이 가장 쉽게, 가장 자주 노출되는 관계이다. 자기보호를 하지 못하고 완전히 개방되어 있는 사이가 바로 남편과 아내 사이이다. 그런즉 가장 사랑해야 할 사이이면서도 가장 사랑하기가 어려운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조금만 잘못해도 원망하거나 미워하기가 쉬운 것이 부부사이 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찾으라고 할 때 흔히 부부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만족하고 사는 부부가 있을까? 결혼생활을 오래한 부부들 중에는 상대방의 약점을 용서하지 못해서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못마땅해 하는 것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작은 돌맹이 하나만 떨어져도 그 마음이 구정물처럼 더러워지는 사람이 있다. 때로는 은근히 멸시하고 때로는 무관심하게 대하는 부부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사실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항상 깨가 쏟아지지만은 않는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다. 서로에게 홀딱 반해서 결혼한 부부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어느 작가가 결혼생활에 대해서 이렇게 표혀한 적이 있다. ‘신혼 때에는 집안에서 음식을 끓이느라 지글지글하는 소리가 나고, 일년쯤 지나면 아기 오줌 누이느라 쉬하는 소리가 나고, 한 십년쯤 지나면 한숨짓는 휴하는 소리가 난다.’ 또 어떤 사람은 결혼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신혼 때에는 부부가 밤참으로 만두나 피자를 먹으며 즐기지만, 일년쯤 지나면 냉장고에서 아무 것이나 꺼내서 먹고, 십년쯤 지나면 부부싸움 하느라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한다.’ 그런대로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닌가? 이것이 결혼생활이다. 이왕 내친 김에 하나 더 소개하겠다. ‘부부란 10대에는 서로가 꿈속에 그리며 살고(내 님은 누구일까 어디에 있을까), 20대에는 서로가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가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서로가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가 가엾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되니까 살고, 70대에는 서로가 고마워서 산다.’ 여러분은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나? 희생적인 사랑이 없이는 가정의 행복을 유지할 수 없다. 이 무서운 사랑의 냉각기에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기주의 적인 사랑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성서에는 우리에게 사랑의 표본을 보여준 남편의 이름이 나온다. 그의 부인 고멜을 위하여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호세아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을 때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던 사람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와 갖가지 더러운 죄악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서 불멸의 사랑을 외치게 했다. ‘너희가 범죄하여 나를 떠났으나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나에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부부생활을 통하여 가르친 선지자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였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그는 과거가 좋지 못한 고멜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다행히 부부가 살다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라 결혼 초에는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다. 슬하에 아들 ‘이스르엘’이 태어났다. 그런데 고멜에게 이상이 생긴 것은 첫아들을 낳은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호세아는 말씀을 전하느라고 분주하게 나다녔다. 고멜은 들에서 일을 하거나 집안에서 아이를 키우느라 씨름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고멜은 자신이 마치 세상에 갇혀사는 것과 같은 따분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점점 집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무엇인가 세상을 통해서 자기의 권태를 풀어보려는 유혹을 받게 되었다. 부부가 함께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관심사가 없어지고, 제각기 행동하게 되면 대화가 빈곤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호세아와 고멜이 바로 이같은 위기를 만났다. 그러나 두사람은 서로의 심적 갈등과 고민을 감춘채 겉으로는 아무일 없는듯이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얼마 후 고멜이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그러나 호세아는 자기의 아이가 아니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나자 하나님은 ‘불상히 여김을 얻지 못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로루하마’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호세아의 의심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그는 가정을 위해서 참았다. 이윽고 고멜이 세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그때도 호세아는 자기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셋째 아이가 태어나자 하나님은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가진 ‘로암미’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는 분명히 자기의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도 호세아는 가정을 파괴하지 않으려고 아내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었다. 그러나 애쓴 보람도 없이 얼마 후 아내는 남편과 세 아이를 버려둔 채 정부와 함께 도망치고 말았다. 성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지만 호세아의 말씀을 살펴보면 그가 가출한 아내를 위하여 고통 속에서 기도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고멜이 정부에게 버림을 당하고 노예시장에 팔려나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호세아는 사랑을 외치는 선지자였다. 그의 심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노예시장에 가서 고멜의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집안에 데려오기를 명령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기꺼이 노예시장에 가서 쇠사슬에 매여있는 아내를 막대한 값을 지불하고 데리고 왔다. 그는 하나님께서 간음한 여인같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탕녀인 아내를 받아들임으로써 실천하였던 것이다.
호세아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요,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한 사랑이었다. 또한 아내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불평없이 지불한 불멸의 사랑이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이 무엇인지 아나? 사랑의 냉각기인 오늘날, 우리가 열심히 실천해야 할 사랑이 어떤 것이지 아나?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다. 바로 호세아가 보여준 그 사랑이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가르쳐주신 사랑이다. 우리의 죄를 끝없이 용서하시기 위해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허물을 덮어주는 이 사랑만이 우리의 가정을 아름답게 지킬 수 있다. 점점 무서운 말세가 다가오고 있다. 부부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모 자식간에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더러운 물결이 집안으로 밀려 들어오지 않도록 튼튼한 사랑의 담을 쌓을 수 있을까? 대답은 하나이다.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 사랑을 하되 열심히 힘을 다해 실천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가정이 사는 길이요, 행복을 잃지 않는 길이다.
이 시간에 스스로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나는 남편을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아내를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가족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 이 문제를 가지고 양심껏 대답해 보기 바란다. 여러분은 허물을 덮는 사랑을 하고 있나? 아니면 자기중심적인 사랑에 빠져 있나? 조그만 잘못이라도 하나님께 다 고백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 바란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세에 이기는 참 사랑의 능력을 주시기를 바란다.
(1997-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