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의 자리바꿈 / 박미숙
추석 연휴라 딸들이 집에 왔다. “이번 주 글쓰기 주제가 ‘향기’인데, 뭐 생각나는 일 없냐?”라고 물었더니 작은딸이 금목서꽃 이야기를 해준다. 맞다, 그 일이 있었지. 내가 근무하던 초등학교에 애들과 함께 다닐 때였다. 화단에 큰 금목서 나무가 있었는데 향기가 너무 좋았다. 겨울에 막 들어설 무렵, 금목서꽃 향이 느껴지면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나무 아래 서 있곤 했다. 차디찬 공기와 달콤한 꽃 향은 참 잘 어울렸다. 금목서는 향기가 만 리까지 간다고 하여 만리향이라고도 부르며, 그 유명한 샤넬(Channel) NO. 5 향수의 원료로도 쓰인다고 한다. 하루는 두 딸이 땅에 떨어진 꽃잎을 하나하나 주워 천으로 된 주머니에 가득 담아 내게 주었다. 냄새가 얼마나 좋던지, 금목서꽃 향기만 나면 그때 일을 떠올리곤 한다. 손톱보다 작은 꽃잎을 주머니 가득 채우기 위해, 손이 시린 것도 모르고 몇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 꽃을 주었을 예쁜 마음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아있다.
딸들은 기발한 생각으로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하는 일이 많았다. 유치원생인 어린아이들이 결혼기념일 공연을 3부까지 하는가 하면, 초등학생 고사리손으로 새벽에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달걀 프라이를 해서 생일상도 차렸다. 결혼 20주년 때, 우리 부부 몰래 친정 가족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해서 연극도 하고 사진과 음악을 넣어 만든 영상 편지 낭독도 했다. 코로나19로 모이지 못하자, 줌(Zoom)으로 생일잔치를 해서 경기도, 부산, 광양의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었다.
언제까지나 보살펴야만 할 것 같던 딸들이 어느새 다 커서 요즘은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 같다. 아니, 번번이 내가 그들에게 의지하거나 배운다.
글쓰기 주제를 들은 큰딸은 ‘엄마의 향기’로 글을 쓰라고 했다. 다음날, 차 안에서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나는 글쓰기가 자신을 정확하게 알기 위한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글을 쓰다 보면 결국은 다 나한테로 귀결되지.” “내가 생각하기엔 엄마의 향기가 아주 많아서 그것으로 글을 쓰라고 했는데요.” “내가 무슨 향기가 있노? 음, 조금은 있지.”라고 어제 했던 말을 다시 들려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루 지나고 나니 또, ‘내가 무슨 향기가 있노, 그렇게 쓰면 자화자찬인 것 같다’라고 하시네요. 향기가 사전에서는 좋은 냄새라고 되어 있지만, 자기를 사랑하고 수용하고 허용한다는 게 꼭 좋은 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자신의 모든 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부족한 점은 고쳐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나에게 이런 면이 있구나, 이런 때엔 이렇게 반응하네. 난 이런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한 말이 연결은 잘 안되지만, 엄마의 향기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고 ‘아, 나에겐 이런 향기가 있지’라고 딱 떠올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글 써보라고 한 거예요. 꽃 냄새를 맡을 때도 ‘이 꽃은 저런 향이 나네, 나한테는 이런 향기가 나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아름답지 않아요?” “좀 억지스러운 것 같은데? 남을 그렇게 하는 글은 쓸 수 있는데, 내가 나를 그렇게 하는 것은 어색해.” “자기를 그렇게 써야지요. 남보다도 자신을 더 먼저 인정해야지요. 나를 알아야 사람이 넓어진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있는 그대로보다 좋은 점만 나 자신으로 인정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를 먼저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단단한 자아를 만들어 가고 있는 큰딸에게 또 가르침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큰딸처럼 나의 모든 점을 다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웬만큼 힘든 일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생각하며 잘 버텨내는 나에겐 희미한 들꽃 향기가 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보는 밤이다.
첫댓글 선생님 글을 보면 잔잔한 들꽃 향이 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답니다.
아, 고맙습니다. 선생님!
따님과 친구처럼 좋은 사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아름다운 모녀셔요.
네, 딸과 완전 친구네요. 직업까지 같다 보니 더더욱.
엄마와 딸은 나이 들어갈수록 친구가 되어간다는 말에 공감하게 하는 글입니다.
서울에 있는 딸 만나서 연극 보러가는 선생님도 그러하실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여전히 소녀같은 미소를 지니고 있는 데 다 이유가 있었네요. 들꽃 같으세요. 아마 향도 그렇겠죠? 하하.
고맙습니다. 전 선생님의 맑은 미소가 앳된 여고생 같다고 늘 생각하는데...
가족이 남다르게 화목하시네요. 결혼 기념일을 그렇게 화려(?)하게 챙기는 것도 그렇고
따님들과의 대화도 그렇고.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손자들 알뜰히 챙기시고 사모님 손에 달걀 쥐어주시는 것만 할까요?
어머나, 어쩜 그리 딸부자 자랑을 우아하게 하시는지요. 아들만 둘인 사람은 어떡하라고요. 차 안이 토론장이 되는군요. 부러워요.
잘 키운 따님들 기특하고요. 하하
에고, 든든한 아드님이 둘이나 있으니 부럽습니다. 다들 이렇게 지내실텐데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글감으로 글쓸 게 없어 포기할까 하다 겨우겨우 쓴 글이랍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다정한 친구처럼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녀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조만간 한 번 봬요. 하하
네, 선생님. 글쓰기 모임에서도 뵐 수 있으니 좋네요.
멋지네요. 역시 선생님이라 애들 잘 키우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