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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여 년 전의 원고를 다시 꺼냈다. 글쓰기의 마무리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묵은 원고를 들추는 과정에서 이 여행기를 찾았다.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가진 한국수필가협회의 <제9회 해외심포지엄> 후 2003년 10월 16일부터 24일까지 파리의 주변과 이탈리아를 돌아본 이야기다. 내가 생전에 가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던 곳들이다. 상상하던 유럽의 도시들을 직접 본, 우물 안의 개구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난 여행이라서 좁은 시선이라는 게 아쉽다. 세월의 간격이 크지만, 오래된 수필을 대하는 감성으로 읽어주었으면 감사하겠다. 책으로 엮어내지 못하는 대신 한국수필작가회 카페에 올린다.
유럽여행기 17
류인혜
* 폼페이 유적지
버스를 타고 오는 도중에 가이드는 계속 나폴리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폼페이에 도착했는데도 그곳이 나폴리의 변두리인 줄 착각했다. 또 나폴리를 보고 난 후 카프리섬의 옵션에 대한 말을 많이도 해서 우리의 목적은 카프리로 변한 느낌이 들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소설을 본 것은 초등학교 때다. 계몽사에서 나온 빨간 표지의 명작 50선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 속에서 폼페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 왔다. 눈물로 이별했던 친구를 만나러 온 기분이다. 그 친구가 살았던 자취를 보고 그를 추억하는 감격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2000년이나 세월이 흘러 버린 후에 멀리 동양에서 찾아올 키 작은 여자를 상상이나 했을까!
가이드의 폼페이 이야기는 이렇다. 폼페이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는 그곳 살던 사람이 친구 ‘타키투스’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편지로 써 보냈기 때문에 그것을 기초로 연대기를 작성할 수 있었다. 프랑스 ‘부드몽’가에서 바닷가 별장을 찾다가 유적지를 발견했다. 그 당시 유럽의 식자들에게 폼페이에 관한 이야기는 흥밋거리가 되었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된 후 고고학자 ‘쥬세피’에 의해 체계적으로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또 다른 설명은 고고학자 ‘미이우리’가 누체리이 문 근처에서 가족화석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드디어 폼페이 유적지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많은 관광객이 모여 있었다. 우리의 현지 가이드는 할아버지다. 그분이 입장권을 사 올 때까지 담 너머 저쪽의 폐허 아닌 폐허를 바라보았다. 이런 묘한 기분으로 사진을 찍는 것은 허무다. 세월의 무상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사진 속으로 들어온다. 사람의 일과 자연현상의 변화 등 모든 것을 뒤범벅되어서 역사는 이루어지고 다시 흐른다. 폐허처럼 늙은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수십 년 동안 가이드 역할을 해왔다. 우산을 하나 들고 힘겹게 따라 다닌다. 그래도 잔잔한 미소가 편안하다.
옛날에는 도시 곁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출입구가 높이 있다. 일곱 개의 문이 있었다. 지붕이 없이 벽들만 있는 집터를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이곳을 보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많다. 서둘러 들어가느라고 안내서를 챙기지 못했다.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감에 아무 죄 없는 사진기만 시달린다.
가장 먼저 만난 포럼 지역은 생각보다 넓다. 주변의 신전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겉으로만 보아서 유감이었다. 중앙의 주피터 신전, 왼편의 아폴로 신전은 입구의 기둥이 크게 남아있다. 네 개의 원 주위에 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또 네 개의 원주가 세워져 있다. 바실리카(법정) 앞에도 같은 모양의 원주 있는데 기둥 하나가 세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다. 왼쪽에만 중간에 받침대가 그대로 있는 네 개의 기둥이 있고, 그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나머지 기둥들은 윗부분이 깨어지거나 네모난 받침이 남아있거나 사이에 바위 같은 조각들을 두고 있다. 넓은 공터를 지나 안쪽에 계단을 올라 법정 같아 보이는 건물의 원주가 보인다.
건너편의 민회, 에우마키아 기념 건물,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라레스 신전이 있었다는 자리에는 큰 특징이 없는 벽과 입구가 벽돌로 지어져 있다. 지붕이 없다. 주피터 신전 오른편에는 시장이 있던 자리이고 왼편에는 단위표준이 전시되어 있다는데 가보지 않았다.
둥그런 돌을 박아놓은 도로를 따라 걷는다. 돌 사이에 대리석 조각을 박아놓아서 밤에 다니기 쉽게 했다. 도로와 도로 사이에 징검다리가 놓였다. 마차가 다니는 길은 사이가 뚫어져 바퀴가 통과하기 쉽게 되어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칸이 지어진 건물들에는 요즘의 셔터 기능을 가진 문의 자취가 바닥에 남아있다. 돌 사이가 갈라져서 무엇이 들어가 꽂히게 되어있다.
일행은 줄을 지어 걷는다. 어느 집 앞을 지나다가 막아놓은 철창 사이로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을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중요한 유적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적한 골목길 풍경이 참 아름답다. 양편으로 부자나 귀족들의 집이 있었던 자취인가 싶게 담의 경계가 넓고 길다.
가게들을 지나고 부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입구에 개인 게시판이 설치되었다. 유리로 막아놓은 곳에 그 옛날 사람이 그렸다는 낙서가 보인다. 사람의 얼굴인데 코를 둥그렇고 크게 그려놓았다. 입구는 비스듬히 올라가서 내부에 비를 받아놓는 곳이 준비되어 있다. 천정이 네모로 뚫어져 있다. 부엌에는 물을 아끼기 위해서 간단한 용변을 볼 수 있도록 하수도가 설치되었다.
벽에는 동물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에 직접 물감을 넣은 방법(프레스코)이다. 이렇게 일반인의 주택에서도 벽화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당시 이 도시 문화의 수준은 높았나 보다. 사람이 살기 편하고 아름답게 지낼 수 있도록 주거환경에 관심을 가져 치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납으로 만든 수도관이 아직도 남아있다.
방앗간에는 여러 개의 맷돌과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화덕의 시설이 그대로 남았다. 그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사철나무와 비슷한 나무가 무너진 돌담 사이에 무성하다. 작은 수술 같은 흰색의 꽃이 피어 벌이 많이 날아다닌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도 식물은 무성하게 번식한다.
나무 이름을 묻는 사람이 있자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우리 가이드가 웃으며 대답했다. 가이드들은 솔직히 나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단다. 그래서 어떤 가이드가 무슨 나무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탈리아 말로 '나무'라고 대답을 했다. 또 다른 나무를 가리키며 무슨 나무냐고 해서 ‘다른 나무’라 대답했단다.
대중목욕탕은 시설이 훌륭했다. 노예에서 귀족까지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냉탕과 열탕이 구별되어 있고, 온돌과 대기실, 도서관, 헬스장 등 다른 시설도 갖추고 있어 그 당시 종합 레저도시의 역할을 했다. ‘심포지엄’ 어원이다. 중앙에 있는 운동장 왼편에 수영장도 있다.
대기실 로비에 유리관에 들어있는 사람의 화석이 있다. 실제의 화석의 속이 빈 것에 석회를 부어 본을 떠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샌들을 신은 발 등의 줄 모양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목욕탕을 나오니 건너편 벽에는 마을 사람들을 위한 게시판이 서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광고판을 내걸었다니 합리적인 방법이다.
도시의 변두리쯤에 있는 극장은 아래로 깊이 내려간 곳이다. 의자를 걸치는 쇠로 된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무대 밑에는 스태프들이 사용하는 공간이 있다고 한다. 넓은 곳이라서 전체를 다 구경하지 못했다. 허 선생은 이전에 올 때보다 관광객들도 많고 더 정돈되었으며, 우리가 본 것은 너무 범위가 좁다고 한다. 하기는 경기장도 못 보고, 그 옆의 광장과 유명한 줄리아가 어떤 사람인지, 그 여인의 집에도 가지 못했다.
점심은 단체 손님을 많이 받도록 준비해둔 큰 방에서 먹었다. 많은 테이블과 간이 의자를 놓은 곳에서 대머리 남자가 산타루치아를 부른다. 정말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민족인가 보다. 높은 목청으로 힘차고, 씩씩하게 부르고 있다. 동네 아저씨처럼 옷차림이 지나치게 간단해서 노래에는 관심이 가지 않고 웃음이 나온다. 바로 앞에서 중국인 관광객이 식사하고 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빵과 스파게티를 먼저 내주고 튀김과 채소가 연달아 나온다. 여기에서도 후식으로 작은 사과를 껍질 채 주었다.
식당 로비에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는데 붉은색의 여러 줄로 된 산호 목걸이는 미국에 비하면 아주 싸다면서 김 선생이 산다. 터키석도 색깔이 너무 예쁘다. 메달의 무늬가 환상적인데 햇볕에 비춰보니 반짝거린다. 사고 싶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었다며 침을 삼키다가 참았다. 폼페이 방문의 기념품이 있어야 하기에 허 선생과 함께 값을 흥정해서 문양이 독특한 작은 물병을 하나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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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에서 보내는 편지-지붕이 없는 도시
폼페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이곳에 왔습니다. 묻혔다가 나타난 집들에 지붕이 없어진 도시를 구경하러 폼페이에 드디어 왔습니다. 이 여행기에서는 ‘드디어’라는 말이 자주 쓰이게 됩니다. 그 말에 담긴 의미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한 사건만 연달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생활해 오면서 모르고 있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게 지냈는데 어째서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는 모든 상황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이곳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게 증명이 되겠고, 그만큼 기대한 것과 생각에 담긴 것이 많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이상하게 그 모든 기억이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옴지락거립니다. 오래전에 숨어 있던 것이 이제 일제히 가슴을 비집고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곳에 관한 책, 『폼페이 최후의 날』을 읽었을 때, 주체할 수 없는 충격으로 언젠가는 가서 볼 것이다. 직접 현장을 확인할 것이다. 다짐해 왔던 모양입니다. 발걸음을 내디디며 비장함마저 생깁니다.
땅속에 감추어진 이 도시가 심한 손상 없이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베수비오 화산의 재로 인함이라고 어디에서 읽었습니다. 뜨거운 용암이 흘러내려서 덮을 때, 모든 것들이 다행히 무너지지 않고 고스란히 용암의 재 속에 숨어버렸나 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 들어와 쌓인 것이 사라지지 않고 생생히 되살아나듯 도시는 그렇게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도시 입구에 포럼이 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신전과 법정이 있던 자리, 민회 그리고 사람들이 모였기에 시장도 형성되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북적이던 넓은 광장에 바람만 지나다닙니다.
둥근 돌들이 깔린 길을 걸어 도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000년 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보면서 전율이 일어납니다. 그 먼 세월 저쪽에 살던 사람들도 하루 일이 끝나면 주점에 모여서 술을 마셨으며, 빵집의 화덕은 지금도 갓 구운 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남아있습니다. 납으로 관을 이어서 수돗물을 사용했던 흔적도 있고, 물이 귀하기에 집 입구의 천장을 뚫어 놓아 빗물이 흘러 고이도록 만들어 두었더군요.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길로 쉽게 다니기 위해 바닥에 반짝이는 대리석 조각을 깔아놓았습니다. 한밤중에 대리석 조각을 따라서 이 길을 걸어 보고 싶었습니다. 도로에는 마차가 다녔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길이 넓은 곳에는 징검다리를 만들어 건너가기 쉽도록 배려해 두었습니다. 부자는 집안을 치장하려고 프레스코화를 벽에 그려 넣었습니다.
폼페이가 로마의 속국이었을 때, 로마 부자들의 별장이 많았다니 심심한 귀족들에게는 인간의 본능을 해결하는 일도 중요한 관심거리였지요. 여인을 찾아가는 길을 부호로 표시해두었다는 것은 점잖은 체면에 누구를 앞세울 수도 없이 혼자 슬그머니 찾아가기 위함이라고 짐작을 해봅니다. 그 집 내부의 벽에 그려진 만화 같은 그림들을 보면서 그저 웃음이 나왔습니다.
가이드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폼페이는 아주 문란한 도시였다고,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도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시대에는 그보다 더 복잡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덕이 무너지고, 양심이 없어졌으며, 개인만 위하는 극도의 이기심으로 모여서 무엇을 이룰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종합위락단지의 목적을 가졌던 대중탕의 자취도 엄청난 감동을 줍니다. 그만큼의 다양한 설비를 갖출 수 있었던 문화가 부러워졌습니다. 영화에서 보았던 광경을 품은 시설들을 대하며, 많은 것을 누렸던 먼 시대의 사람들이 그리워집니다. 우리가 가고 난 후 2000년 후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요.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극장을 오래 더듬어 보았습니다. 보석으로 치장하고 긴 옷자락을 끌며 이곳에 와서 앉았을 폼페이의 여인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욕망이 사라지던 마지막 날에는 무엇을 간절히 원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