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의 온기
류인혜
청량리는 고향의 입구이다. 고향으로 가는 중앙선 기차는 청량리역에서 출발한다. 처음 상경할 때에는 서울역까지 기차가 들어왔지만 어느 땐가부터 청량리역이 시발점이 되고 종점이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 강산이 몇 번 바뀔 동안 그곳에는 내용이 다르고 색깔이 다른 고향 이야기가 즐번하게 널리게 되었다. 이 흘러간 이야기 속의 청량리에는 아직도 못다 이룬 초록빛 꿈이 선명하다.
그때, 청량리역 부근에 작은댁이 있었다. 숙부는 할아버지께서 살림을 내어준 가게를 정리하고 난후 차마 돌아갈 얼굴이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천만번이나 가고 싶었던 그리운 집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고향으로 가는 기차가 떠나는 역 부근, 청량리에 자리를 잡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로 유학 온 후 가족들이 보고 싶으면 책가방을 들고 그 납작 엎드린 집으로 찾아갔다. 끼니때가 되어도 밥을 지어주지 못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작은어머니 대신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사장어른은 팔다 남은 왕사탕을 하나 주셨다. 얼굴이 복스럽게 동그란 어르신은 먹을 것이 부족해도 차마 고명딸 곁을 떠나지 못해 좁은 방에서 몸을 꾸부려 잠을 청하고 있었다.
실패를 했더라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용기를 내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승리자다. 더 이상 버틸 길이 없어지자 작은댁은 서울생활을 접었다.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가 집으로 찾아들 듯 희망의 기차를 타고 내려간 후 가족들이 손을 내밀어 잡아준 덕에 차츰 허리를 펴게 되었다.
청량리역에서 밤차를 타면 새벽녘에 고향에 도착했다. 할머니께서는 객지로 나간 막내아들 네의 소식이 궁금해서 밤마다 잠을 설쳤을 것이다. 또 먹고 살기나 하는 것인지, 매끼마다 밥숟가락 들기가 바위보다 무거웠을 게 아닌가.
나도 방학이 되면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어두운 길을 달려 대문에 들어서면 방마다 불이 커지고 식구들이 눈을 부비며 두런두런 말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달려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집안에 온기가 펴졌다. 먼 곳에 있던 가족이 집으로 오면 그렇게 먼저 부엌이 따스해졌다.
만나야 되는 피붙이가 간절히 그리워도 얼굴을 대할 면목이 없어서, 또는 기차 삯이 없어서,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가족의 생사가 서로 잊혀지고,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은 부엌의 온기도 잊는다.
하늘을 지붕 삼아 거리에서 떠돌고 있는 그들을 위해서 청량리역전에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부엌이 생겼다. 먹을 밥이 없던 사람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기 시작했던 청량리 밥퍼, 다일공동체이다. ‘밥퍼 최일도 목사님’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다.
내 먹을 것을 챙기기에 바빠서 다른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그분의 사역을 경이롭게 보며 마음으로 존경한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일과, 아픈 자의 병을 고쳐주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 당연한 일을 쉽게 하지 못한다.
다일공동체가 시작된 80년대 말에는 섬기고 있는 교회가 한창 부흥할 때다. 다른 일에는 눈을 돌릴 사이도 없어 나도 어느 땐가는 ‘밥퍼’에 가서 내 전공인 밥푸는 일을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회 식당에서 주걱을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세월이 너무 지나가버려 주걱들 힘이 없어졌다.
감사하게도 밥퍼를 바라보던 작은아이가 이제 본격적인 밥퍼의 일원이 되었다. 서울다일교회에서 사역을 하며, 하루에 700명 이상의 노숙자와 독거노인들에게 점심 한 끼를 먹이는 일이 본업처럼 되었다. 매일 수백 명의 심신이 허기진 이들을 먹이는 일에는 다일공동체의 직원 외에 하루 35명 이상의 자원봉사가가 동원된다. 감사하게도 자원봉사자들의 신청이 꾸준해서 단체로 봉사를 원하는 기업이나 공공기관, 학생들, 교회의 봉사자들과 정기적으로 돕는 개인들이 그 일을 분담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는 여러 형편으로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다. 혼자 생활하는 어르신들과 지붕이 없어 노숙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밥 먹을 곳을 찾고 있다. 그들을 먹이는 일에 여러 형태로 돕는 후원자들이 있다. 이름 없이 묵묵히 봉사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하다.
사회적인 약자, 소외된 이웃을 돕는 운동이 점점 확산되어 정부의 단체에서도 소매를 걷고, 많은 기업이 앞장서고 직원들은 월급의 일부분을 떼어 돕는다. 연예인들의 선행도 꾸준히 이어진다. 그들의 봉사에 힘입어 다일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홍보 되고 있다.
좁은 길로 가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목자의 사역이 귀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지만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은 복잡하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거친 이들을 매일 대하는 마음에 평화와 따뜻함이 넘치기를 소원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온기를 나누며 보듬어 주는 현장에는 날마다 ‘밥 먹이는’ 일이 기적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쌀이 떨어지려는데 마침 쌀 지원이 들어왔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저절로 함빡 웃음이 나온다. 아들은 가끔 그날의 식단도 이야기 한다. “오늘은 우거지갈비국에 생선조림이었어요.”하면 “나보다 잘 먹이네.” 마음이 흡족하다.
나눔의 마음과 봉사의 열기가 삶에 실패하여 지치고 나이 들어 외로운 이들을 위로해 줄 것이다. 따뜻한 한 그릇의 밥이 그들에게는 가족의 사랑이며, 힘이고 마음의 보약이다. 그런데 청량리 밥퍼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은 100원의 밥값을 치른다. 그 돈이 의미하는 상징성은 희망의 메시지처럼 당당하다.
기차에서 내려 새벽바람을 가르며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도 우리 집 주방에는 새벽부터 불이 켜진다. 밥 먹이려가는 일꾼에게 힘을 내라며 먼저 집 밥을 먹인다.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전해오는 부엌의 온기가 청량리 밥퍼로 간다.
《에세이문학》 2014년 5․6월호
류인혜(柳仁惠) innhea@hanmail.net
《한국수필》 1984년 봄호 수필 <우물>로 추천완료
《현대시조》 1985년 여름호 시조 <낮도깨비>로 추천완료
한국수필작가회 제9대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이사 역임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서로다독독서포럼 회원
수필선집 《마당을 기억하며》, 테마수필집 《나무에게 묻는 말》, 시집 《은총》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PEN문학상, 제11회 한국문협작가상
첫댓글 제 고향의 입구는 서울역입니다. 호남선 열차를 타야 하니까요. 비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랫말 처럼
호남선 열차는 그렇게 눈물에 젖어 떠나는가 봅니다. 고향을 그리는 눈물 그리고 인생을 느끼는 눈물
차창에 빗물이 흐르면 비내리는 호남선은 더욱 더 실감이 납니다. 2001년 안양교도소에서 목포교도소로
발령이 나서 그때 호남선 열차를 타고 눈물에 젖어 달리던 생각이 납니다. 새월이 많이도 흘러갑니다.
감사합니다. 류인혜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