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무아를 말하려면 힌두교의 아트만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서는 석가세존께서는 왜 무아를 가르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석가모니 수행자는 왜 6년 고행을 하게 되었을까?
일체 괴로움을 멸하겠다고 가출하여.. 먼저
정신을 닦는 수행인 명상을 배워 최고 선정에 이르렀는데.. 선정에 머물고 있는 동안은 일체 괴로움이 사라졌지만 선정에서 깨어나면 다시 괴로움이 스며드는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해서 정신 수행을 버리고 육체 수행을 하게 되니 그것이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인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고행이 6년을 하게 된 이유는 정신 수행과 마찬가지로 고행을 하는 동안은 괴로움이 사라졌지만 고행을 멈추면 다시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보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물[5온]인데.. 정신과 몸 수행을 해 보았지만 괴로움을 멸하지 못했다면 어떤 수행이 될 수 있을까..
없다.
석가 수행자도 고행에서 답을 구할 수 없다면 더 이상 길이 없다고 보았기에.. 1년도 아닌 6년씩이나 고행한 게 아닐까..
기회는 문득에서 온다.
고행숲이 있는 근처 강에서 몸에 물을 적시며 청정한 몸으로 깨우며..
나는 명상을 통해 일체 괴로움을 멸하려 했는데 그것이 불가능임을 보아.. 나는 새로 육체 수행을 통해 멸하려 했는데 그것 역시 실패했다.
내가 있는 한 괴로움을 멸할 수 없는 것 같다. 고로 내가 사라지면 괴로움은 완전히 멸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정리되는 순간..
문득..
괴로움을 완전히 멸하려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에
전혀 새로운 길이 보였다. 곧
'내'가 감촉하고, '내'가 인식하는 게 아니라..
김촉하고, 인식하는 자를 '나'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러니까 '내가 경험하는 게 아니라.. 경험하는 자를 나라고 한다'는 이제껏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이게 무언가?
목욕재계하다가 그대로 멈추어 있는 석가 수행자를 본 수자타라는 처녀가 고행자가 영양실조에 걸려 저런 줄 알고 갖고 있던 우유죽을 공양했는데.. 그 장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수자타의 유미죽(乳米粥)..
6년간의 혹독한 고행 끝에 쇠약해진 싯다르타 태자(부처님)에게 수자타라는 마을 처녀가 공양한 우유죽입니다.
이는 부처님이 극단적 고행을 멈추고 영양을 회복하여 중도(中道)의 깨달음을 얻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된 음식입니다 / Ai
그 우유죽을 얻어 마시고 그동안 수행하던 고행림이 아닌 곳으로 떠나니 그곳이 부처를 이룬 보리수가 있는 붓다가야다.
그런데 에이아이는 밀하길 보리수 아래에서 중도를 깨쳤다고 하는데.. 같은 의미지만 그보다는
6근6경이 심연생[12처]에서 생긴 것임을 깨달았다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한다.
힌두교뿐 아니라 자이나교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트만, 지나, 영혼은 모두 6근의 주인인 '나'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 '나'는 석가 수행자가 명상과 고행을 통해 멸하려고 하던 '나'와 같다.
석가모니가 가르치는 무아는 아트만이나 지나나 영혼 같은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안아트만인 무아는 힌두교의 아트만만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 몸과 마음의 주인인 자, 경험을 앞서 존재하는 '나'는 없다는 것이다.
경험을 앞서 존재하는 나가 없다면..
그런 나를 멸할 수 있을까?. 본래 존재하지 않는 자인데..
세상에 존재하는 수행은 한결같이 내가 어떤 목적을 이루려 닦는다.. 그러나
근본불교 수행은 그런 나가 없음을 깨치려 닦는다.
그런데 시간 속에 불교 수행 역시 내가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수행이 되었다.
그것을 '말세 불교 수행'이라 하는 것이다.().
[주석]
1. 세존께서 무아를 가르친다 하여.. 세존의 모습에서 무아를 깨치기 전과 다른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닌 것으로 보기에..
그 말은 지금 여기서 누군가가 무아를 깨쳤다면 그의 모습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것이니.. 외부에서 보면 무아를 깨쳤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2. 불교의 무아설의 핵심은 주어인 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공부를 한다'가 아니라 '공부하고 있는 자를 나라고 한다.' 라고 깨달아야 한다.
3. 안아트만이란..
내가 범아일여가 되는 게 아니라.. 나는 선험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범아일여가 되는 자를 '나'라고 한다.
내가 지나가 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게 아니라 지나만 남아 있는 자를 '나'라고 한다.
나의 몸과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나는 선험적 존재가 아니기에.. 천국에 간 몸과 영혼을 '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