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보은 동학도 진압하려고 청나라 군대 요청 시도
양어도어사로 어윤중을 파견한 고종은 3월 25일 대신들을 모아 보은 동학도의 실력행사에 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동학도 진압을 위한 방안으로 청나라 군대를 동원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자고 제안한 인물은 고종이었다. 고종은 보은의 동학도들이 대거 서울로 밀고 올라오면 왕실이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우리 군대의 병력으로 동학군을 막기가 힘드니 청나라 군대를 동원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고종은 중국군도 태평천국(太平天國) 운동 때 영국군의 도움을 청했다는 예를 들어 청군 요청을 강력히 주장했다. 고종의 청나라 군대 요청에 대해 영의정 심순택(沈舜澤)과 좌의정 조병세(趙秉世), 우의정 정범조(鄭範朝) 등 3정승을 비롯한 대신들은 청군이 국내로 들어오면 들어갈 비용 등의 문제를 들어 반대하자 고종은 한발 물러났다.
청나라 군대 요청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려는 고종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고종은 동학도들의 시위가 장기화되자 호조참판 박제순(朴齊純)을 불러 청나라의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차병(借兵)을 협의하라고 밀명을 내렸다. 이에 대해 위안스카이는 ‘경군과 강화병 1천 명을 충청도에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 차병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위안스카이는 보은 교조신원운동을 계기로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북양해군제독 정여창에게 명령해 ‘내원(來遠)’과 ‘정원(靖遠)’ 등 두 척의 함선을 인천으로 보냈다.
왕실을 지키기 위해 자국민을 외국군에 탄압해 달라고 하는 자가 다름 아닌 조선의 국왕이었다는 점에서 고종의 백성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고종의 외국군 의존은 결국 이듬해 동학혁명에서 실제 이루어졌다.
동학 지도부의 고민
해월의 명령으로 동학교도들이 보은에 모이기 시작한 날은 통유문을 발송한 다음날인 3월 11일부터였다. 13일에 보은 장내리에 모인 동학도들은 1만 명을 넘어섰고, 21일에는 2만 명을 돌파했다. 이렇게 대규모 인원이 모이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우선 대규모 인원이 먹을 식량이 부족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독실한 교도들은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 보은으로 모였지만 2만 명이 넘는 인원의 식량을 해결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동학 지도부는 보은 인근의 토호와 부민(富民)들에게도 통문을 보내 군량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보은의 김용목(金容穆)은 3월 22일 밤 동학교도들로부터 백미 30석을 3일내로 보내지 않으면 행패를 당할 것이라는 전갈을 받았다고 한다. 부민과 토호들에 대한 강압적인 식량 요청은 동학도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들어서 동학 지도부도 곤란을 겪었다.
다음으로는 시기적으로 보은 취회의 시기가 점차 농사철로 접어 들어갔다. 음력 3월 20일은 양력으로 5월 5일이었다. 이 시기에는 본격적인 모내기철로 접어들어 농촌에서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농민이 대다수인 동학도들이 농사일을 제쳐 놓고 언제까지 보은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또 보은 장내리도 봄 농사에 들어가야 할 시점이어서 오랜 기간 머물러 있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대규모 인원의 공동생활의 불편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신앙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고 해도 20일 가까운 불편한 생활에 대한 불만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 지도부는 어윤중과의 담판에서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해월, 4월 2일 해산 명령
4월 1일 어윤중은 고종의 두 번째 효유문을 들고 다시 장내리로 찾아왔다. 이 효유문에는 이전에 없던 “너희들의 충정을 잘 알고 있다”와 “지방수령과 관속들의 침탈을 지적한 점, 해산하면 빼앗겼던 토지와 재산을 돌려줄 것이니 겁먹지 말고 해산하라.”는 내용이 첨부되었다. 어윤중은 효유문을 들고 “조정에서도 교도들이 적자임을 인정하였다”라며 동학도의 요구조건을 조정이 일부 받아들였으니 즉각 해산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강압했다. 고종의 비답(批答)이 많이 부족했지만 동학 지도부는 해산의 명분으로 척왜양, 탐관오리 축출, 충청감사 등 비리 관리 처벌을 요구하고 5일 후에 해산하겠다고 답했다. 어윤중은 척왜양과 보국안민을 주장하는 2만 명 이상의 동학도에게 무력을 행사할 수는 없어 동학 지도부와 타협에 들어갔고 동학 지도부에서는 3일 내에 해산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동학 지도부는 어윤중에게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아무런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회(民會)’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을 조정에서 인정해달라고 했다.
이 집회에서는 촌척(寸尺)의 병기도 휴대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곧 민회(民會)이다. 듣기에 각국에도 역시 민회가 있어서 조정의 정령(政令) 가운데 민국(民國)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회의하여 강정(講定)한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일인데 어찌하여 비류라고 지목하는가?
동학지도부는 민회의 근거로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동학의 지도부는 국제 정세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윤중도 보은의 동학도의 집회를 ‘민당(民黨)’이라고 하여 무기를 들고 거사한 비도(匪徒)나 역도(逆徒) 등과는 다르다고 2차 장계에서 조정에 보고했다. 어윤중은 동학도들을 ‘이미 번성하여 주도자와 추종자를 철저히 가려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세력이 커진 ‘민당’이라고 보고했다. 동학도의 보은 집회는 우리 역사에서 정부가 처음으로 인정한 민회라고 할 수 있다.
해월은 4월 2일 아침에 동학도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해산 명령을 받은 동학도들은 4월 2일부터 보은을 빠져나갔다. 보은의 출입구 다섯 곳에서 동학도의 동정을 파악한 관의 기록에 따르면 4월 2일에 1만1159명의 동학도가 보은을 빠져나간 것으로 적고 있다. 관리가 배치되지 않은 샛길이나 한밤중에 빠져나간 인원까지 합치면 이날 대부분의 동학도들이 일시에 보은을 빠져나갔다. 해월은 동학도들의 해산을 확인한 후 이날 밤에 보은 장내리를 빠져나갔다.
4월 3일에 동학도의 해산을 확인한 어윤중은 두 번째 장계를 올렸고 청주병영의 군대도 철수시켰다. 원평에 모인 1만여 명의 동학도들도 보은의 해산 소식을 듣고 4월 3일부터 해산했다. 원평에서 해산해 보은의 대도소로 가던 일부 동학도들은 4월 5일 진산(珍山)에서 어윤중과 조우하기도 했다. 어윤중은 보은의 동학도를 해산시킨 후 전라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보은에서 동학교도와 정부측은 무력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다.
보은 교조신원운동의 성과
보은 교조신원운동의 성과로는 우선 조정과 동학교단의 공식적인 첫 접촉을 들 수 있다. 이전의 광화문복합상소에서도 조정에서는 동학도를 이단이라고 하면서 대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은 장내리에서 2만 명 이상이 실력행사에 돌입하자 조정에서는 양호선무사 어윤중을 파견해 동학지도부와 만났다. 이 만남은 조정에서 동학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어윤중은 동학도가 질서가 정연하고 규율이 잘 잡힌 조직이며 사족들도 가담해 만만히 볼 조직이 아니라고 보았다.
둘째, 동학도는 어윤중으로부터 ‘민당’이라고 불렸다. 동학도들이 무기를 들지 않아 나약하게 비치었지만 도리어 이러한 점에서 어윤중으로부터 비도나 역도가 아닌 민당이라고 인정받았다. 그리고 동학도들도 스스로 보은의 취회를 민회라고 성격 지었다. 보은의 동학도들은 척왜양과 수령들의 탐학 등 민의를 대변하는 조직임을 자처했다.
셋째, 동학교단은 전국적이고 대규모 조직을 내세워 정부를 압박했다. 동학 지도부는 어윤중과의 담판에서 동학도의 인원을 80만 명이라고 했다. 동학교단에서 교도의 수치를 처음으로 드러냈다. 당시 동학도는 40개 이상의 포조직을 갖춘 대조직이었다. 실제 보은에 모인 동학도들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등 전국에서 집결했다. 동학도들은 80만 명의 인원을 갖춘 거대 조직임을 강조하며 함부로 탄압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음을 밝혔다.
넷째, 사회적 문제에 적극 대응했다. 동학 교단은 보은에서 교조신원보다 척왜양창의와 탐관오리의 처단 등 사회 문제를 적극 내세웠다. 동학 지도부는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동학의 확산은 종교적인 측면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이슈를 제기해 백성들을 대변하는 것이 교단 확산과 신원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해월 경상도 지역 교세 확장에 나서
해월은 4월 2일 밤 보은 장내리를 빠져나와 경상북도 상주 공성면 효곡리 왕실마을의 집으로 돌아왔다. 10여일을 머문 후 4월 15일 아들 덕기와 김연국을 대동하고 낙동강을 건너 인동(仁同, 현 구미시 인동동)의 배성범(裵聖範)의 집으로 가서 이 지역의 도인들을 수습했다. 5월 들어 해월은 다시 칠곡군 율림리(현 왜관읍 금남리) 곽우원(郭祐源)의 집으로 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곽우원의 집에서 해월은 3개월간 머무르며 경상도 지역의 교세 확장에 나섰다. 이때 해월은 금산, 성주, 칠곡, 의성, 군위 등의 도인들과 만나 도담을 나누며 조직을 다졌다. 이 지역 동학도들은 이듬해 동학혁명에 적극 가담했다.
7월 중순경 인동의 배성범의 집으로 돌아오자 손병희와 손천민이 찾아왔다. 이 시기에 해월의 아들 덕기가 발병해 금산 어모면 다남리 참낭골 편사언의 집으로 치료차 보냈으나 차도가 없었다. 편사언의 집에 있을 때 서병학 등이 찾아와 교조신원운동을 재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해월은 더 이상의 교조신원운동은 실익이 없다고 반대했다. 이후에도 전라도 지역에서는 지속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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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