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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경주(慶州)는 통일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에 예속되면서 935년 처음 이름이 명명되기 시작했다. 신라 천년의 도읍지가 고려국의 지방도시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고려왕조는 500년 가까이 이어졌지만 경주에서 뚜렷하게 남은 고려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신라하대에 들어서면서 죽고 죽이는 왕위쟁탈전과 반란으로 혼란스런 정국이 전개되다 결국 55대 경애왕이 견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마지막 56대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고스란히 바치면서 천년 신라는 막을 내리고 경주의 고려시대가 막을 올렸다.
고려 왕건이 맏딸을 경순왕에게 시집보내면서 신라의 나라 깃발을 내리고 ‘경주’라는 도시명을 내렸다. 경순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고려의 수도권으로 대거 이주해 가면서 월성과 동궁 등의 신라왕경은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에 예술작품은 미술뿐 아니라 조각 등의 예술 전반적으로 통일신라보다 많이 퇴보한 것으로 분석된다. 심지어 부처님 얼굴 조각마저 신비롭지 못하게 못난 모습으로 남아있다.
신라가 고려에 복속되면서 신라의 천년도읍지 서라벌이 고려의 지방도시로 전락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고려시대 경주의 모습, 고려시대 이름 난 경주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 고려로 변화된 신라를 더듬어보는 역사기행을 이어간다.
◆신라의 멸망과 경주의 탄생
신라는 기원전 57년 국가의 형태로 처음 형성됐다. 935년 고려에 합병되면서 신라는 멸망했다. 정확하게 978년 존속했던 나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신라 36대 혜공왕 재임기에 혜성이 떨어지면서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등의 자연재해가 일어나 몰락의 징조가 보였다는 기록들이 전한다.
이때부터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왕위를 두고 벌어지는 혈전이 반복되었다. 정치적 혼란은 백성들의 굶주림으로 이어지고 국력이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적인 갈등에 후백제와 고려의 견제가 심각하게 진행됐다. 후백제와 고려의 침범으로 신라의 영토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결국 후백제 견훤이 신라 궁성까지 빼앗고 경애왕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견훤은 경애왕의 사촌동생 경순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신라를 다스리게 했다. 견훤의 군대는 재물을 약탈하고 왕비와 궁녀들을 겁탈했다. 견훤과 그의 군대는 포악했다.
고려 왕건은 조문사신을 보내 경애왕의 장례를 돕고, 다음해 직접 기병을 거느리고 경주로 입성했다. 경순왕은 관료들과 교외까지 나가 왕건을 맞이하고 임해전에서 극진하게 대접하며 연회를 열었다. 이때 이미 고려와 신라의 합병에 대한 여론이 무르익었다. 신라왕경의 백성들도 포악스런 견훤의 군대보다 왕건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935년 신라의 영토가 후백제와 고려의 땅으로 흡수되면서 신라 스스로 버틸 수 있는 힘을 상실했다. 경순왕과 신하들이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경순왕은 “나라의 힘이 약해져 전쟁을 하면 무고한 백성들만 참혹하게 죽게 될 것”이라며 항복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칼을 휘둘러보지도 않고 나라를 적국에 바칠 순 없다”며 통곡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버렸다. 경순왕의 막내아들도 화엄사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경순왕은 935년 12월 문무백관과 사족 서민들을 거느리고 고려 왕도로 항복의 길에 올랐다. 이때 따르는 수레가 30여리나 이어지는 장관을 연출해 구경하는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왕건은 뜰 아래에서 예를 올리는 경순왕을 맞이했다. 왕건이 맏딸을 경순왕에게 시집보내고 고려의 대신들도 신라 귀족의 자녀들과 혼사를 치렀다. 왕건은 경순왕이 머무는 곳을 ‘신란궁’이라 명명해 신라의 이미지를 연상케 했다. ‘신란’은 북위 황제가 고승 담란에게 예를 갖추어 부른 존칭이었다. 고려 태조가 신라 경순왕 김부에게 예를 갖추었다는 해석이다.
왕건은 신라의 천년수도 서라벌을 ‘경주’로 명명했다. 경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고려는 987년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동경으로 고쳐 불렀다. 이후 경주는 조선시대까지 동경과 경주 이름이 번갈아 되풀이되었다. 1308년 계림으로 불리다 1413년 다시 지명이 경주로 불리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경순왕 김부는 고려에 투항 이후 고려조정에서 왕건에 이어 서열 제2위의 대우를 받았다.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받아 고려 서울에 머물렀다.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개경에서 다스렸던 것이다. 경순왕은 고려 궁성으로 들어간 이후 고려의 서울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의 무덤도 고려왕경에 조성됐다. 죽어서도 신라의 서울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경순왕의 고려에 투항하는 과정을 두고 리더십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백성들을 위한 고뇌에 찬 희생적 결단이라는 설과 자신의 부귀영달을 위한 안일하고 소극적인 판단이라는 설이 대립한다. 마의태자의 결연한 의지에 후한 점수를 주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경주의 고려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전환점에 대한 사관이 또 하나의 역사기행 백미라 하겠다.
◆고려시대 경주의 불교문화
신라시대는 불교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궁궐에서부터 귀족, 일반 백성들의 생활 깊숙하게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웠다.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으로 설명되던 화려한 신라의 불교문화는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크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별처럼 늘어섰던 수많은 신라시대 경주의 사찰들은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신라의 멸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는 학자들의 설명이다. 신라 왕경에 있었던 사찰 중생사에 시주가 들어오지 않아 경남 김해까지 승려가 탁발을 나가야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해가 간다. 또 황룡사 구층목탑을 수리할 때 엄청난 목재가 필요했는데 신라왕성의 일부인 조유궁을 헐어서 사용했다. 나라의 중심 궁성이 황폐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게 한다. 창림사 일부 보물들이 개성으로 유출됐다는 기록도 전한다. 고선사와 창림사 삼층석탑은 고려정부에 의해 해체됐다. 석탑의 사리가 개경 만월대 내전으로 이안됐다. 경주 사찰의 승려들이 하나둘 경주를 떠나면서 폐사가 늘어났다.
그러나 소유주가 바뀌면서 중창하며 다시 일어서는 사찰도 있었다. 남산의 천룡사는 최제안이 크게 중수했다. 영묘사와 분황사, 백률사, 석장사, 용장사는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고려시대에도 명맥을 이은 것으로 전한다. 또 불국사와 무장사, 기림사, 감은사, 법광사도 법등을 이어갔던 것으로 나타난다. 김유신 장군의 사랑이야기로 유명한 천관사도 고려시대까지 존재했다. 분황사에서는 덕담을 나누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졌던 것으로 전한다. 원효대사의 화쟁국사비가 고려시대에 건립되기도 했다. 황룡사도 방문객들에게 차를 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기림사에 대한 기록도 눈에 띈다. 기림사는 신라시대 창건된 것으로 나타난다.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어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에 들른 내용이 삼국유사 등에 나온다. 고려시대 대선사 각유가 기림사 주지로 있었다. 각유는 선종의 고승으로 고종의 측근으로 왕을 보필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기림사의 비로자나불좌상에서 나온 유물 54종이 보물로 지정됐다. 54종의 서적 중 37종이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황룡사가 953년 벼락으로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석가탑과 불국사가 1036년 지진으로 무너져 재건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일반백성들이 사찰 재건사업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불교의 명맥은 고려시대에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산 삼릉계곡의 마애석불좌상은 입술이 두텁고 코가 뭉턱하다. 눈은 위로 찢어지게 그려져 전체적으로 예술성이 통일신라시대 작품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다. 고려시대 작품이라는 평가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미완성작으로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이라 주장한다.
경주의 고려시대 불교문화는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크게 쇠락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사찰의 황폐화에 이어 작품성이 뒤떨어지는 불상과 여러 불교문화재를 통해 본 학자들의 분석이다. 경주의 사원은 종교와 신앙의 도량이라는 고유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사람들이 모여 교류와 소통의 장소로 문화가 생성되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사찰이 그당시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회운영의 중요한 축으로 기능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시대 경주사람들
시대가 바뀌어 고려 땅이 되었지만 경주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유명한 인물들이 탄생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인물 김부식이 경주 출신의 문신이다. 송나라의 사신 서긍은 김부식을 보고 박학다식함을 ‘고려도경’을 통해 칭찬했다. 김부식은 영통사대각국사비문 등의 많은 글을 남겼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 김부식은 20세에 벼슬에 오르면서 생활기반을 완전히 개경으로 옮겼다.
정중부 무신정권의 무인인 경주출신 이의민은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경주에서 복위를 꿈꾸는 의종을 경주 곤원사 북쪽 못가에서 허리를 꺾어 무참하게 살해했다. 그는 소금을 파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바닥에서 시작해 무신정권의 최고 지위에 올랐다. 이의민은 신라 부흥의 뜻을 가지고 항거세력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난관에 부딪치기도 했다. 이의민의 집권세력 확장에 대해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고려 후기 국제적인 인물 이제현도 경주 사람이다. 그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건너가 만권당에서 조맹부 같은 당대 중국의 지성과 교류했다. 이제현은 글과 그림, 글씨 등의 다방면에서 걸출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제현은 경주에서 태어났지만 가족들이 개경으로 이주해 자리를 잡았다. 최치원은 신라시대 사람이었지만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며 많은 글을 남겼다.
최영과 정몽주와 같은 인물도 경주 출신은 아니지만 경주에 족적을 남겼다. 최승로의 손자인 최제안은 다시 고향 경주로 돌아와 많은 업적을 남겼다.
경주 황남동에 효자 손시양의 정려비가 있다. 고려 명종 1182년에 손시양의 효행을 기려 세웠다. 비석의 앞면에 ‘효자비’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고려시대 충성을 독려하는 중앙정부의 강력한 메시지라는 해석이다. 효행이 나라에 대한 충성과 직결된다는 뜻이다.
◆고려시대 전쟁의 흔적과 경주환경
신라의 대표적인 불교문화이자 상징이었던 황룡사가 구층목탑과 함께 1238년 몽골 침입에 불타 없어졌다. 흥륜사와 굴불사도 이때 소실됐다.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시대 경주의 주요 시설들이 크게 훼손됐다. 황룡사의 소실은 의미가 크다. 신라가 황룡사를 건축하고 구층목탑을 세웠던 것은 호국의 이념이 강했다. 고려시대 953년 벼락으로 무너졌을 때 60여년이 지난 1021년에 재건한 것은 9년의 공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라의 왕궁 조유궁을 헐어 보수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보수공사를 거듭했다. 모두 호국사찰의 이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상징성은 몽골에까지 알려져 결국 그들이 화력을 이용해 호국의지를 꺾으려 했던 것이다.
고려말 1379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중생사와 민장사 등이 소실되었다. 왜구들의 빈번한 침입으로 사찰과 민간의 세간들이 약탈됨으로써 신라왕경의 황폐화가 가속화 됐다.
고려시대 경주의 인구는 크게 줄어든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읍성으로 불리는 성이 축조됐다. 월성에서 북쪽으로 이동해 성이 축조된 것은 북천의 범람을 피해 안전한 곳을 선택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신라시대 천년의 문화적 중심지가 경주읍성으로 이동한 것이다. 경주읍성 터에서 신라시대 석조물이 대거 발견되고 있다. 읍성을 축조하면서 신라시대 월성의 석조물을 재활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경주읍성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보완 축조된 흔적이 있다.
신라가 멸망하면서 경주 도시의 기능도 크게 쇠락했다. 문화와 경제의 중심도 월성에서 읍성으로 옮겨지면서 변화해 왔다. 경주읍성에 중첩된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역사문화를 살펴보는 기행의 맛은 생각을 깊게 한다. 경주 땅에 천년 신라의 역사가 마무리되고 또 다시 천년의 시간이 덧칠되면서 새로운 역사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2016.10.24
첫댓글 신라를 합병한 고려 왕건은 신라를 죽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운영했다.
신라왕궁 월성은 완전해 폐쇄됐다.
경주읍성을 쌓아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다
지도자들 대부분은 고려의 수도로 이사를 해야했다.
경주라는 이름도 그때 생겼다.
무엇이 가장 옳은 일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판단기준은 모호하다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나라를 고려에 넘긴 경순왕
성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