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실패와 근원적인 고독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들 중 가장 좋은 것이 사랑의 관계일 것이다. 부자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우정, 동료 간의 동료애 나아가 이웃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을 중심으로 타인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 삶의 맛을 느끼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소통의 만족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구조 자체가 이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비록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사랑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속되는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소통의 실패, 즉 소통의 부재를 체감하면서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씁쓸함과 고독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같은 소통의 실패를 야기하는 것일까? 현대 프랑스 철학의 한 줄기인 『인격주의(personnalisme)』에서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 것을 그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1° 타인의 삶과 실존의 어떤 부분은 항상 우리의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벗어난다. 가장 친밀한 벗과의 대화에서도 완전한 일치는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오해도 섞이지 않는 순수하고 완전한 이해나 소통의 경우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보다 큰 순수성과 사랑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 같은 분리는 더 크게 느낀다. 이러한 것이 사랑의 깊은 고독이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사랑은 없기 때문에, 보다 완전한 사람일수록 보다 더 인간관계에서 고독을 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2°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언가가 우리들의 상호적인 소통의 노력에 근본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일종의 근원적인 악의, 즉 인간조건으로서의 이기주의 일 것이다. 이 같은 저항이 때로 서로가 서로를 속이게 되는 것이다. 이 거짓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진실 혹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거짓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3° 인간실존 그 자체가 결코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일종의 ‘불투명함’을 가지고 있고, 이 때문에 내적인 상호개방이나 상호증여를 끊임없이 방해하는 일종의 ‘경솔함’ ‘가벼움’을 전재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사람들이 가족이나 정당 혹은 종교단체 등의 호혜성의 단체를 결성하게 되면, 심지어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거나 옛 친구를 만나 대화를 하게 되면, 곧이어 새로운 자기중심주의(égocentrisme)가 나타나게 되고,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장막을 드리우게 한다.
물론 위의 네 가지 외에 다른 많은 원인을 분석해 낼 수도 있을 것이며, 이를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같이 느끼는 것, 그래서 마치 인간조건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 타인과의 단절, 고독함, 외로움 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순수한 혹은 이상적인 친교는 참으로 드물다. 그래서 “친교(communion)는 행복보다 드물고, 아름다움보다 더 연약하다”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 이 때문에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세계를 “깨어진 세계”라고 하였고,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곧 타자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사회적 구조 때문일까? 철학자들의 잘못된 사상 때문일까? 물질만능주의에서 파생한 개인주의 때문일까? 인간본성이나 인간의 존재 자체가 병든 때문일까? 아마도 무수한 원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원인들 역시 또 다른 원인의 결과이지는 않을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나아가야할 길, 그 삶의 목적지를 잃어버린 결과는 아닐까? 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떤 언어로 어떤 이름으로 말해지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세계 안에서 인간의 탄생은 분명 우연이 아니며, 어떤 궁극적인 목적이 있으며, 모든 인간이 지향해야할 ‘인류적인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예외 없이 모두의 문제이기에 또한 인류적인 것이다. 이것은 증명해야할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 철학적 신앙의 문제이다. 이 목적지를 망각할 때, 인류는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방황은 두려움과 조급함을 낳고, 두려움과 조급함은 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낳게 된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철학적으로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사랑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부재할 때, 온갖 부정적인 것이 자신의 삶을 채우게 된다. 거짓, 위선, 허상, 과장, 오류, 오만, 자기기만 나아가 폭력 등 온갖 것들이 사랑의 부재하는 곳에 우리들의 내면을 채우게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은 - 최소한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에서의 삶은 - 나 자신 혹은 우리자신이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떤 종교적 언어를 빌리자면 ‘영적인 미숙함’ 때문일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가야할 그 길을 내가 가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고독하게 하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고독하게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