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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2장12~25절
제목 : 성전 심판과 회복
지난주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 중에서
첫 번째 표적인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표적”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가나에 혼례 잔치에 초청을 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 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알리지만
아직 자기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에 그 모친은 하인들더러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고 이제는 떠서 연회자에게 갖다 주라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물이 변하여 맛이 좋은 포도주가 되어 연회장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적의 결과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냈고 제자들이 그를 믿었습니다.
결례의 항아리 물의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권능(權能)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죄인들이 변화되어 성도가 될 것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시키는 분이신 것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사망을 생명으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면 어떻게 달라집니까?
(1) 맛이 달라집니다.
물은 맛이 없으나 포도주는 달콤하게 맛을 내게 됩니다.
① 그 마음에, ② 그 말에, ③ 그 생활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납니다.
(2) 색깔이 달라집니다.
물은 아무런 색깔이 없으나 포도주는 불그스레한 색깔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하여 새사람이 되면 색깔이 달라집니다. ① 미움의 색깔이 사랑의 색깔로, ② 근심이 색깔이 희락의 색깔로, ③ 불평의 색깔이 화평의 색깔로, ④ 불량의 색깔이 양선의 색깔로. ⑤ 사나운 색깔이 온유의 색깔로 변합니다.
얼굴만 봐도 은혜가 됩니다. 음색이, 안색이 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색깔이 선량하게 보입니다.
(3) 용도가 달라집니다.
손을 씻는 물이 이제는 사람들이 마시는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면 용도가 달라집니다. 죄의 병기에서 의의 병기가 됩니다.
지금까지 세상과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던 자신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쓰게 됩니다.
(4) 위치가 달라집니다.
항아리의 물은 결례용으로 집 마당에 놓여 있었으나 포도주가 된 다음에는 신랑과 혼주와 하객들의 상 위에 놓였습니다.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 편으로, 세상 편에서 하나님 편으로 위치가 달라집니다.
지상에서 하늘나라로, 그리고 지옥 갈 사람이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5) 값이 달라집니다.
물은 값이 적지만(싸지만) 포도주는 물에 비해 값이 비쌉니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면 값이 달라집니다.
전에 죄 가운데 거할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던 사람인데 예수 안에서 변화를 받으면 값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은 변하여 새롭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이적을 행하신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갔지만 오래 계시지 않으시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님은 성전 안의 탐욕과 부패에 분노하시며 장사꾼과 환전상을 내쫓으셨습니다.
성전의 바깥뜰은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웠으며, 상인들이 장사하는 곳을 여기서 제사드릴 제물을 사기도 했고, 헌금으로 낼 돈도 바꾸었습니다.
또한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말씀을 통해 자신이 참 성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1.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13~17절).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13절).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이 귀절부터 22절까지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을 보여줍니다.
성전 청결 사건은 두 번 있었는데,
여기 그 첫 번 것이 기록되었고, 두 번째 것은 성역 말기에 된 일입니다.
유월절은 유대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신16:1~17절).
*3대 절기는 신16:16절 “[16]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때에는 반드시 이스라엘의 20세 이상 남자들은(출23:17) 예루살렘 중앙 성소에서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중심한 신본 주의적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 이였습니다(출23:14; 34:23).
유월절은 ‘넘어간다’는 의미입니다(출 12:27).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의 초태생은 모두 죽이셨으나,
문설주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죽음을 면하게 하신 것을
기억하며,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축제가 유월절입니다(출12:21~30).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한 규례였습니다(출12:12-20, 13:2, 12).
그런데, 이 명절은 아빕월(3,4월 사이에 있었음) 14일에 지키고,
거기 이어서,
개인은 1주간 누룩 없는 떡 먹는 절기를 지킨 것이었습니다(출12:15).
*출12:15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유대인들이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처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온 것입니다(신16:1-8).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셨습니다(14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성전이 어떤 곳입니까?
성전은 신성한 집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릴 목적으로 세운 건축물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했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세 차례 세워졌습니다.
첫 번째는 솔로몬의 성전(열왕기상6장 참고)이고,
두 번째는 스룹바벨 성전이고(에스라, 학개 참고),
세 번째는 이두매(에돔) 출신의 헤롯이 세운 성전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존재했던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여기서 성전은 성전 전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이방인들의 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써 누구든지 원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이방인들의 뜰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쪽문인 미문을 통과하면
‘여인의 뜰’이 있으며, 여인의 뜰에서 니카노르(Nicanore)문을 통과해야지만 ‘이스라엘의 뜰’을 밟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뜰 앞에 있는 경계선인 계단을 넘으면 비로소
‘제사장들의 뜰’이 있는데 여기에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단 앞에는 한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언급하셨을 때 그 성전은 누구든지 있을 수 있는
이방인들의 뜰이었습니다.
멀리 이방에서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오는 순례자(巡禮者)들에게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편리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편리를 위하여 고요히 예배드릴 장소에 혼잡을 가져오는 것은 도리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편리를 도모하는 것이 당연하나,
영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것을 취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돈을 바꾸는 것은, 이방에 살던 유대인들이 가지고 온 로마 돈을 성전에 바치기 위하여 유대의 세겔과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출30:13).
*출30:13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그들이 그 때에 성전에서 이런 매매 행동을 통하여 부당한 수입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잘못이었습니다(사56:7;렘 7:11).
*사56:7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렘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15절).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이 때에 예수님의 의분(義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분인 만큼, 질서 있게 움직였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셨을 뿐이고 그것을 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그 소유자들로 하여금 돈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심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 돈을 뿌리셨다면, 돈 임자가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4)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십니다(16절).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이 귀절에도 예수님의 의분이 질서(秩序)있게 나타난 것이 드러납니다.
(1) 비들기를 여기서 가져가라.
그는, 그저 말씀으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하셨을 뿐이고, 그것을 날려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남의 소유물을 이렇게 존중히 여기셨습니다.
(2)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것은 상업을 정죄하는 의미가 아니고, 성별된 기관을 세속(世俗)과 혼동시키지 않아야 할 것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공관 복음에서 취급된 둘째 번 성전 청결 기사(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에 있어서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정직하지 않은 것을 꾸짖은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에는 성전 안에서 그런 영업을 할 수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17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 말씀은 시 69:9의 인용한 것입니다.
*시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다윗이 그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핍박 받은 사실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날카로운 행사를 보고 그가 유대인들 앞에 핍박 받으시게 될 것을 예측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 죽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전은 신성한 집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목적으로 세운 건축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두실 장소’로서 특별한 곳을 선택하겠다고 약속하셨고(신12:11) 오직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신 12:13-14). 바로 그곳이 구약에서의 성전입니다.
2. 성전을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는 예수님(18~22절).
1) 유대인들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하는 물음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8,19절).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불신앙하는 태도로 이렇게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그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나타내신 권위를 알아볼 줄 모르고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기이한 일을 요구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요구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여기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예언을 주신 것 뿐입니다.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을 오해한 그들이 후일에 이 말씀을 책잡아 예수님을 송사한 일도 있습니다(마 26:61).
*마26: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그들은 여기서도 저의 무식을 폭로하였습니다(20절).
이런 수수께기 예언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깨닫는 때에 믿음이 굳세어지는 법입니다.
2)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키겠느뇨 물었습니다(20절).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셉프스사기(史記)에 의하면, 헤롯의 성전건축은 주전 20년에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말한 이때는 주후 27년경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예언(19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기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적(靈的)으로 어두운자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해석하다가 저렇게 오해합니다.
3)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21절).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그의 육체를 비유하신 이유는,
구약 성전이 신약 교회와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약에는 교회(敎會)가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되었습니다.
이 귀절의 뜻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다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말씀하신 것을 믿었습니다(22절)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여기 이른바 "성경"이란 말은, 구약에 있는 부활 예언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시16:10 과 같은 것입니다.
*시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음에 있어서 점진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많은 경험과 체험을 경유하기 전에는 깨닫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3. 사람의 속을 아시는 예수님(23~25절).
1)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습니다(23절).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표적(標的)은 구약에서는 겉으로 나타난 흔적을 말하는 뜻으로 주로 쓰였으며(출 12:13; 신 28:46),
*출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신28: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
신약에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쓰였습니다(막 16;20; 요 3:2; 20:30; 행 4:30).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요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표적(標的)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트’(’oth)는 표징(창 17:11; 출 10:1),
이적(출 4:9), 징조(창 1;14; 왕하 19:29), 기호(민 2:2; 신 6:8),
예표(사 20:3), 감계(겔 14:8)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적(異蹟)을 제일로 알고 믿는 믿음은 변동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보다 하나님 자신 때문에 생긴 믿음은 전진성(前進性)과 지속성(持續性)을 가집니다.
2)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24,25절).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물은 건너 가 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나 보아야 안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 혹은, "사람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도 다 모른다"(人死不知其心)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밝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지혜를 가지셨습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도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안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시험해 보아야 됩니다(요일 4:1).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만일 그들이 무엇을 알아 마친 다는 일에 조작스럽고 번잡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시고, 그것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심판자의 정당한 지식입니다.
그 이유는,"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렘 17:9).
*렘17:9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1]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4.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1) 사람들이 범죄 하는 곳에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13~22절).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마21:13).
솔로몬 성전을 건축할 때에는 돌도 미리 다른 곳에서 치석해다가 조용히 건축하였던 것입니다(왕상6:7).
*왕상6:7 “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요한 기도의 장소여야 할 성전을, 유대인들은 장사하는 집으로 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강도의 행동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였습니다(마21:13).
*마21: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 속되게 변함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백성의 편리를 보아준다는 명목 아래 장사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 것들 중에 어떤 것들에 대하여는,
죄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것들을 과도히 사용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신앙은 점점 생기를 잃어버립니다.
벌이 꽃을 찾아다니며 꿀을 조금씩 섭취하기를 싫어하여 벌통에 담긴 꿀 속으로 먹어 들어간다면, 그 온몸이 꿀에 젖어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속화주의는 거룩한 일에 방해가 됩니다.
그 뿐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실제적 무신론에 떨어집니다.
*딛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2) 그의 엄격한 숙청(肅淸)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는 찾아옵니다.
주님은 홀연히 성전에 임하셨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홀연히 나타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광의 주님은 죄악의 잠을 자는 자에게 도적 같이 임하십니다.
본문의 말씀은 말3:1말씀의 성취입니다.
*말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단5:3~5 “[3]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더라[4]그들이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5]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25]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교만한 죄를 채우는 벨사살왕에게 주님의 손가락이 홀련히 나타나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썼습니다.
‘메네’는, 왕의 세대를 세어서 끝냈다는 뜻이고,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을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파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달아 보시다가 회개치 아니하면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리울 줄 알아야 합니다.
각 사람의 중량은 숨길 수 없이 그대로 나타냅니다.
체중을 다는 저울에 올라 않아서 자기 체중을 더 무거워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든지 각 사람의 중량은 그대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2) 주님의 삼대 비범(三大非凡)(13~22절).
(1) 홀연히 임하십니다(13~16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시니, 거기 모였던 자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기도할 장소를 복잡한 시장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고요히 행해야 할 이유는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신자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죄 중에 있으면서도 죄인인 줄 모르고 도리어 자기를 변명합니다.
그것은 잠자는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잠자며 세월을 보냅니다.
죄악의 밤에 잠든 사람들에게는, 주께서 판단을 내리시기 위하여 오시는 시간이 반드시 한 번 있습니다.
*살전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계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미리부터 진리로 책망을 받아 깨어 있음이 귀합니다.
*엡5:13~14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2)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삼키우심(17절).
‘삼키웠다’함은 그 열심에 사로잡힌 듯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결을 변호하시기 위한 정의감에 불타심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성도는 이러한 열성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주님의 성결을 변호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는 무엇보다 성결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보다 성결을 사랑합니다.
*시119: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3)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깊은 사상과 말씀을 소유하셨음.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제자들도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특히 우리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미래에는 우리를 복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도 주님의 자녀니 만큼, 주님을 본받아 의미심장한 장래성을 가진 언행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도 그날그날 얕고 짧게 지내지 말고,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이 인정하는 신앙(23~25절)
(1) 예수님이 몸을 의탁하실 신앙(24절)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오셔서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면서도 지극히 낮은 사람의 심령 속에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사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여기 ‘통회’와 ‘겸손’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진정한 죄 감이 없이는 진정한 겸손은 이루어지지 않는 사실이 여기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자와 겸손한 자와 함께 일 하십니다.
아무리 놀라운 것으로도 우리에게 겸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통회를 통하여 겸손하여 집니다.
(2) 중심이 참된 신앙(25절).
시51: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외부보다 귀중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중심에 죄를 깨닫는 지혜를 주십니다.
사람들이 죄를 깨닫은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중심 깊이에 큰 죄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중심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주님과 나와의 참된 관계는 나의 중심 곧, 심장에서만 이루어 집니다.
렘2:32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은 이렇게 사랑의 바탕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4) 예수님은 성전을 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것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속되게 변화 되었을 때에 그것을 방임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슐라텔(Schlatter)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곧바로 그 시대의 제사장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전,
준비 단계에서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보자면 예배드리기 전 마음가짐입니다.
예배가 예배당에서만 드려진다고 생각하고 예배당 밖에서 온전치 못한 행위가 자행되고 소홀히 준비된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예배장소 이외에 친교의 장소, 주차장, 식당, 모임장소 외 어떤 곳에서도 예배의 연장선에서 바른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교회 건물 밖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단순한 의분의 표출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서 뜻을 알게 하시고 그들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내적 타라코스를 거쳐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성전의 이방인들의 뜰에서 제사드리기 위해 왔던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환전과 매매행위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드리기 위해서 환전하거나 매매하는 행위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배를 빙자하여 행해지는 많은 온전하지 않는 모습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먼 곳에서 예배당까지 오는 것 쉽지 않습니다.
주일 성수를 하기 위한 신앙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 준비과정이 전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먼 곳에서 예배당까지 와서 예배를 드리기 전까지의 준비하는 과정에서 식사를 하고, 옷을 입고, 차를 타고, 헌금을 준비하고, 봉사를 준비하는 등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은 없습니까?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주차입니다.
먼 곳에서 예배당까지 오기 위해서 차를 타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차를 하면서 이웃주민들의 불편함을 생각하지 않는다든지 주차봉사자의 안내를 따르지 않음으로 시비가 붙는다든지 한다면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예배 전 준비과정인 주차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리기 전 모든 준비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행위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먼저 예전에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가치 전도의 ‘내적 타라코스’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타라코스를 자초하는 도를 표출하신 곳은 이방인들의 뜰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뜰이 제사의 장소가 아닐지라도 그 곳 역시 성전입니다.
이는 예배드리는 공간만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전 영역이 예배의 장소가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예배가 생활이어야 하고 생활이 예배가 되어야함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온 사람들에게 일종의 편리함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편리함이 결국은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편리함이 때로는 믿음의 본질을 흐려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시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집(하나님 나라)은 결코 장사하는 곳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 가정이나 교회에 오셔서는 무엇을 청소하실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자신을 삼킬 정도로 충만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참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참 성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내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그 당시 성전은 유대인 생활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들은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