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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정용국 (시인)
빈들의 왕따나무가 되어 “욕망을 들키지 못해 비굴해진 시를 쓴다”고 스스로를 나무라던 시인은 “나, 지울 수 있을까 두려움 없이 순교하듯”을 꿈꾼다. 그래서 사회 구석구석을 날렵한 눈썰미로 보듬고 아파한다. 그렇게 온 마음으로 15년 시조를 써온 김영주의 왕따나무는 이제 튼실한 기둥과 쓸 만한 그늘을 만들었다.
그의 세 번째 시집 『다정한 무관심』은 김영주의 시조를 바라보는 나의 믿음에 올곧고 힘차게 응답하고 있다. 세월에 순응하며 가족에 대한 사랑을 지순하게 풀어내어 독자들의 눈물샘을 두드렸다. 삶이 곧 눈물이고 두려워도 성실하게 짊어지고 가야할 인간의 역정임을 구구절절 쏟아놓고 있다.
사회가 아무리 험악해져도 “물이 물을 끌고” “길이 길을 일러주고” “내민 손 받아주고” 견뎌내는 공동체임을 에둘러 말한다. “온기를 말아먹는 비정한 비읍받침” 「넵!」에서는 우리 사회의 냉정한 세태를 유니크하게, 「법」, 「유리」 등의 작품에서는 부끄러운 선진 대한민국의 민낯을 여실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순을 훌쩍 넘긴 그도 세월을 “내리고 가라앉”(「앙금」)혔을 생각에 가슴이 짠하다. 그것이 다 왕따나무의 길을 가는 시인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책 속으로
시집 속의 詩
앙금
들끓던 아우성도 이명만 남습니다
피 흘린 시간들도 꾸들꾸들 눅었구요
내리고 가라앉히니
고요합니다
편안합니다
낙화
나, 지울 수 있을까 두려움 없이 순교하듯
단칼에
그렇게 툭!
목 떨굴 수 있을까
살아선 꽃 아니었다
죽어서야 꽃이 됐다
꿈
거스러미 꺼칠한 어머니 손톱 위에
분홍색 매니큐어를 곱게 발라 드리네
손끝에 뭔 호사냐며 수줍게 웃으시네
꿈속의 내 어머니 갓 시집온 새댁이네
내 머리는 하얀데
엄마 머린 까맣네
고와라 손톱에 앉은 열아홉 살 분홍물
발
발바닥 만져보면 걸어온 길 다 보인다
맹목의 짐승처럼 불평등 노예처럼
비무장 맨바닥으로 버텨온 삶의 무게
먼 길을 돌고 돌아 방황하는 것도 발이고
그 먼 길 다시 돌아 흐느끼는 것도 발이고
생각이 저지른 매듭 푸는 것도 발이다
표정 없는 발바닥은 얼굴보다 거룩하다
디딜 데 못 디딜 데 질러갈 데 돌아설 데
가자면 가자는 대로
서자면 서자는 대로
괄호 속의 존재감
있어도 그만 아닌
없어도 그만 아닌
두근두근 심장 속에 옹이처럼 박힌 말
웅크려 껍데기 쓰고 하소하듯 숨은 말
간곡히 하고픈 말 시침 떼고 들어앉아
그 정체 모호해도 물어보긴 또 애매한
허투루 뺄 수도 없는 은근슬쩍 심각한 말
비밀인 듯 비밀 아닌 베일 속의 속삭임
정녕코 두려운 건 스스로 두른 울타리
가끔은 들켜도 좋겠다
허울 벗은 민낯을
해설
한恨을 솔직담백하게 녹여내는 해학의 현대성 | 이경철(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김영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다정한 무관심』에 실린 시편들은 참 솔직하다. 일상의 체험에서 시가 진솔하게 우러나와 어려울 것 없이 우리 몸과 마음에 척척 달라붙는다.
지금 여기 우리네 모든 일상이 다 시적 소재가 되어 매우 현대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민족 정통 정형시인 시조의 정형과 미학을 준수하고 있어 민족의 정한情恨과 해학이 시에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시조의 정형을 중시하듯 인생, 삶의 정형도 중시하고 있다. 사람과 자연과 어울려 살다 보면 묻어나올 수밖에 없는 생의 기쁨과 슬픔 등을 시 속에 잘 단속하고 있다. 시인 자신과 타인, 그리고 우주 만물을 향한 정, 사랑을 체험에 녹여 다정하게 전하고 있는 시집이다.
김영주 시인의 시는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펄펄 살아있는 삶의 체험에서 진솔하게 우러나는 구체라는 것을 이번 시집을 통해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 이경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