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의 구약성경>
요한 세바스챤 바흐 무반주 첼로모음곡 작품.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만남 속에서 사건이 생기며, 만남 속에서 운명의 전환점이 일어난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행복이냐 불행이냐가 나뉘어지기도 한다. 이십 세기가 배출한 수많은 명연주자들 가운데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를 잊을 수 없다. 그가 첼로의 마에스트로가 되어 세계적 명사의 대열에 오르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인생사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의 낭만적 에피소드는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십삼 세가 되던1889년 어느 날 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허름한 헌책방에 들렀다가 먼지 속에 켜켜이 쌓인 두툼한 종이 한 뭉치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 세바스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Violoncello solo' 전곡악보였다. 이를 손에 넣은 소년 카잘스는 무엇인가 거대한 힘에 감전되는 느낌을 받았고 경외감과 기쁨으로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위대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이후 카잘스는 바흐의 원전 악보를 마치 성경을 읽듯 경건한 마음으로 수십 년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정진해 나가다가 드디어 이십 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무대에서 첫 연주를 감행했다 이로써 암흑 속에 갇혀 있던 ’첼로의 구약성경‘이라 일컫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발하는 위대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바흐의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첼로라는 악기 하나가 빚어내는 오묘하고도 심오한 우주적 세계를 보여주는 걸작으로서 크게 여섯 개의 조곡(Suite)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흐는 하나의 조곡 안에다가 프렐류드 알라망드 쿠랑드 사라방드 미뉴엣부레 지그라고 불리는 여섯 개의 각기 다른 음악형식을 적용하여 매우 치밀하면서도 정교한 예술작품을 건설하였다. 연주자는 다른 어떤 악기의 도움도 필요없이 오직 첼로라는 도구 하나로 복잡하고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악보 속의 미로를 따라 바흐가 지정해 놓은 엄격한 규칙을 통과 하면서 자신만의 장기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바흐는 지상의 첼로 연주자들에게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과제를 던져 주고 간 셈이다. 어떻게 연주하고 해석할 것인가? 이것은 각자의 몫이다. 우리 또한 성경을 악보 삼아 인생을 해석하고 연주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스코어(악보)는 동일한데 연주자들의 음색은 전혀 다르다. 이는 한 연주자의 음악 속에 그의 인격, 성품, 경험, 내면세계, 나아가 인생관 전체가 녹아들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감동의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수십 년 전 필자는 카잘스가 연주한 바흐의 첼로 모음곡 LP 디스크 세 장 짜리를 사들고 턴테이블에 올려놓아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의 감동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날 따뜻함이 모두에게 필요한 이 시대에, 첼로의 저 최저음에서 끌어올리는 무한대의 그 소리는 마치 영혼의 가장 밑바닥에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출렁이는 내면의 무질서를 평정시켜 주는 천사의 위로제라 생각해 본다 카잘스 이후 첼로의 에베레스트산과 같은 바흐의 이 곡을 정복하기 위해 수많은 연주자들
이 앞다퉈 정상정복의 대열에 참여했다. 그 가운데 이십 세기 중반 너머 활약한 러시아 출신의 첼리스트 다니엘 샤프란이 있다. 소련의 공산주의 시절 철의 장막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어느날 서방세계의 한 무대에 홀연히 나타나 바흐의 곡을 연주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연주에 전율했다 우아하고 감성적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둔중한 악기를 거칠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웃는 듯 우는 듯.고뇌하는 듯 감격하는 듯. 인생의 희로애락의 다양한 감정들을 선율마다 깊게 불어넣고 있다. 마치 어떤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고 고고하게 버티고 서 있는 수백 년 된 소나무 한 그루와 같다고 할까? 샤프란이 해석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면서 인생을 더 아름답고 거룩하게 연주해 보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