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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신춘문예 시, 시조,동시 당선작 모음 (tistory.com)
[2016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수 / 김재필
하염없이 눈물 쏟는 애인을
또 하염없는 입맞춤으로 달래본 사람이 알 것이다
같은 이에게 다른 피가 돌 때가 있단 사실을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
너도 이제 그만 목소리를 내보려 한다
그러나 침묵하고 싶지 않을 때에야 침묵다운 무거움이 온다는 걸
우린 이제 알고 있다
네 혀에 도달할 문장을 기다린다
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늘어지는 고드름처럼
오랠수록 흉기가 되는
조금씩 심장 가까이
이 겨울 속으로 완전히 입수하기 전에
심사평 / 최근 응모작 추상·관념의 유희 과해 … ‘입수’ 소통의 모호성 벗어나
최근 신춘문예 응모 시는 갈수록 모호성이 두드러지는 부정적 특성을 지닌다. 구체에서 일탈된 추상과 관념의 언어 유희가 지나쳐 소통의 길이 꽉 막혀 있다. 언어와 언어의 시적 관계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 도대체 무엇을 왜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배배 꼬인 언어의 꽈배기를 맛도 보지 못하고 마냥 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도 인간을 위해 쓰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인간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갈수록 그 소통의 길이 막혀있다. 이제는 시의 불통마저도 유행인가. 불통으로 훈련된 투고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분별없는 불통의 세계에서 분별 있는 소통의 세계로의 전환이 시급한 시점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4편이었다. ‘패러글라이딩 하는 새’(김영미)는 소통이 가능하다는 장점보다 “날개를 펼칠 때보다 접을 때가/ 더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을” 등의 통속적 단점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강물학교’(진창윤)는 강물을 찾아오는 겨울 철새들에 대한 진술적 묘사가 진부하고 지루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먼저 탈락하였다. ‘평행한 세계’(강은재) 또한 꿈속과 꿈 밖의 경계를 넘나드는 만남의 세계가 펼쳐져 있으나 결국 “멀리 있어도 우리는 하나인 것 같다” “나도 내가 좋아질 때가 있다 이런 것은 혼자만 아는 비밀이다” 등의 통속적 산문성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당선작 ‘입수(入水)’(김재필)는 비교적 소통의 모호성에서 벗어난 시다. 내가 너(애인)의 사랑의 강물 속으로 입수하는 과정의 순간을 짧으나마 극명하게 그렸다.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라는 표현은 이 시의 백미다. 지뢰를 밟았을 때 발을 떼면 생명을 잃게 되므로 발을 떼지 않고 있는 상태, 그 절체절명한 상태에서의 기다림과 그리움이 이 시의 전체적 정조를 이룬다.
다른 시에 비해 작품성이 높다는 장점도 있지만 소통이 가능한 시라는 장점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시를 쓰는 일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이므로 당선자는 남다른 노력을 통해 한국시단을 풍요롭게 꽃피워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201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족 / 정신희
공손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규칙적으로 다가갔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길들이 뒤섞이더니
우리 사이는 점점 간격이 사라졌다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다는 것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입 안에선 쉬지 않고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위험했다
돌을 던지고
끝까지 서로를 모른 체하고 싶었다
길이 팽창하고
수거함엔 깨어진 얼굴이 가득하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한번 시작한 길은 멈출 줄 몰랐다
[심사평]
깔끔한 표현으로 서정적 구체성·투명성 살려
이번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많은 분이 응모해주셨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시간을 축적한 결과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의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은 사례도 많았음을 깊이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함께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다. 이혜리, 최혜성, 정신희씨가 그분들인데, 오랜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정신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혜리씨의 작품들은 감각적 장면들을 상상적으로 모자이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충격과 반응으로 연쇄해 가는 감각 운동이 진정성과 독자성과 연관성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최혜성씨의 시편은 특별히 ‘미동’이 끝까지 경합하였는데, 매우 밀도 높은 관찰과 표현이 특장으로 거론되었다.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소묘의 집중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결국 정신희씨의 ‘가족’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전언의 구체성과 깔끔한 표현, 그리고 착상과 비유의 과정이 안정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 시편은 규칙적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맹목과 위험을 동시에 지닌 관계로 ‘가족’을 파악한다. 물론 이러한 파악이 정신희씨만의 개성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당선작은 그러한 파악을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보이는 긴장과 예각적 균열을 통해 보여주고, 나아가 ‘길’의 뒤섞임, 팽창, 멈출 줄 모르는 질주의 형상과 그것을 어울리게 하면서 서정적 구체성과 투명성을 동시에 살려주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점 여러모로 신뢰를 주기에 족했다.
정호승(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201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일 축하해/ 안지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시 부문 심사평] 정호승 시인· 문정희 시인 / 소통의 詩… 삶· 죽음에 대한 역설적 인식 돋보여
최종심까지 올라온 16명의 시 50여 편을 읽고 느낀 공통점은 '소통로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두루뭉수리여서 쓴 사람 혼자만 읽고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시를 읽게 되는 고통은 무척 컸다.
"이전의 이후의 반물질과/ 무기체의 감각/ 물렁뼈에 속하는 밤/ 귀, 귀(鬼), 현실/ 가느다랗게 흐트러져가는 형상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대단한가."(이현정 '벽에 걸어놓은 외투는 살아 있다' 부분)
한 예에 불과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시는 대부분 시 스스로 독자의 이해를 거부한다. 현란한 기교가 난무하고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산문성이 두드러진다. 시의 심장이 은유라면 그 은유의 심장이 피를 흘리다 멈춘 듯하다. 다양성이 미덕인 시대에 그 다양성을 긍정한다 해도 지나칠 정도로 관념적이다. 마치 관념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는 서정과 구체에 뿌리를 내린 비관념적 소통의 시는 이미 낡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는 낡았든 새롭든 소통의 통로를 통해 써야 한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흐르지 않는 꽉 막힌 수도관을 통해서는 물 단 한 잔도 받아 마실 수 없다. 그동안 한국 시단은 뒤틀린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구축된 불통의 시를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방치해왔다. 행과 연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필연성이 결여된 산문 형태의 시와 관념적 불통의 시가 한국 현대시의 미래라고 여기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오늘의 현상은 한국 현대시가 어떤 한계에 다다른 부정적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구어체로 이루어진 당선작 안지은의 〈생일 축하해〉는 당선작이 될 만큼 작품으로서 우수성이 탁월했다기보다는 소통 가능한 시가 그래도 이 시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일 축하해〉는 삶과 죽음을 동질 관계로 인식한 바탕에서 쓴 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일상의 순간에 만나 깊은 애증의 대화를 나눈다. 죽음이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이라는, 기일이 생일이고 생일이 바로 기일이라는 이 역설적 인식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종심에서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박은지의 〈공유지〉, 박진경의 〈다이빙〉, 이종호의 〈작은 방〉, 이현정의 〈북극점 한 바퀴〉 등이다. 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시는 언어로 이루어지며 그 언어가 지닌 구체의 본질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2016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 조상호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
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흐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가문비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
움푹 파인 자국발자국들 혀 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심사평>
▼빠른 질주-멈춤의 리듬감… 언어적 상상력이 돋보여▼
본심에서 6명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펜트하우스’ 외 4편의 시는 비유를 적절히 운용해서 한 편의 시를 끌고 간다. ‘엄마가 방안에 앉아 재봉틀로 짝퉁 루이비통에 유성들을 박아넣는 경험’에서 시가 발아한다. 그 자리에서 재봉틀은 유성이 되고, 방은 펜트하우스가 되고, 인공위성을 미행하며, 재봉틀의 잔소리가 음속을 돌파한다. 비유된 세계와 실제 세계가 일대일로 대응하고 있다. 다른 시에서도 자신의 입으로 불어야만 하는 ‘진술’ 행위와 유리알 전구 만들기 같은 두 가지 행위가 ‘불다’라는 동사의 주어로서 같은 의미를 내포해 배열되고 있다. 그러나 시 한 편에 다 포함될 수 없는 문장들이 돌출하고, 비유에 치중하느라 현실감을 놓쳐 버리는 부분이 지적됐다.
‘훈풍’ 외 4편의 시는 시편마다에 들어 있는 간곡한 말, 경험을 고백할 때 언뜻 보이는 아픈 정경들의 표현이 좋았다. 자신의 기억을 말에 걸칠 때 그 말의 결을 스스로 발명해 내는 것이 시의 새로움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문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특한 손놀림’, ‘팔딱이는 주먹 심장’처럼 두 개의 단어나 세 개의 단어로 경험을 응축해 버린 어구가 많고, 이 부분들이 오히려 시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외 4편은 상상력으로 시를 끌고 간다. 은유된 언어의 머뭇거림과 확장, 빠른 질주와 멈춤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시는 마치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처럼’ 언어로 만든 점과 선, 리듬으로 시에 여러 개의 경계를 설정한다. 동시에 언어적 상상으로 세상을 더듬어 나가고, 더불어 떠나고, 정신의 세계를 어루만진다.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음운과 음운들이 서로 조응하면서 달려간다. 시의 ‘입술을 달싹’여 저 ‘마젤란 펭귄’이 사는 곳까지 뿌리를 내리며 가는 것이 아마도 이 시인의 ‘식물학’이리라. 논의 끝에 응모작 5편 모두 고른 시적 개성과 성취를 가진 점을 높이 사서 ‘입과 뿌리에 대한 식물학’을 당선작으로 선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2016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 李箱에게/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심사평] 기존 틀 차용했지만 사유를 끌고가는 의식 우뚝
14건의 응모작이 예심에서 올라왔다. 그중 우선 고른 작품이 ‘의자가 있는 골목’ ‘벽과 대화하는 법’ ‘투명한 발목’이었다. 이 과정이 수월했다는 건 좀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종의 시를 포획하기를 기대하며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심사자들의 눈에서 그토록 쉽사리 빠져나가는 시들이라니. 재량껏 성심을 다한 시들을 보내주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아, 하지만 왜 그리 겉도는 거지? 붕붕 떠 있지? 한 걸음 더 성심을 담으시라. 진정을 담으시라. 하긴 열네 분의 시가 근사하면 얼마나 머리가 터졌을까. 고마운 일이다만.
‘벽과 대화하는 법’은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이이가 갖춘 표현력에 세상-사물을 읽는 힘, 인식의 힘이 더해지기를 바라며, ‘투명한 발목’과 ‘의자가 있는 골목’을 최종심으로 놓았다. ‘투명한 발목’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차분한 묘사와 어조로 독자를 시의 정황 속으로 천천히, 깊게 이끄는 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시에도, 흠을 잡자고 눈에 불을 켜니, 성근 부분이 있어 아쉽다. ‘의자가 있는 골목’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거울’의 말투를 베껴서 쓴, 즉 이상 풍으로 쓴 시다. 새로운 시인을 가려 뽑는 자리에 기존 시인이나 시를 패러디함으로써 오마주를 보이는 시를 뽑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틀 속에 자기 생각, 자기만의 세계가 담겨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사유를 길게 끌고 나가는 힘 있는 진술 속에 시인 의식이 우뚝하다.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어서 믿음이 간다. 건필을 빌며 축하드린다!
[2016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타크나 흰 구름 / 이윤정
타크나 흰 구름에는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배웅이 있고 마중이 있고
웅크린 사람과 가방 든 남자의 기차역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엔 출발보다 도착이, 받침 빠진 말이
받침 없는 말에는 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있다가 사라진다
흰 구름에는 뿌리 내리지 못한 것들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자정을 향해 흩어지는 구두들
구두를 따라가는 눈 속에는 방이 드러나고
방에는 따뜻한 아랫목, 아랫목에는 아이들 웃음소리
몰래 흘리는 눈물과 뜨거운 맹세가 흐른다
지금 바라보는 저 타크나 흰 구름은 출구와 입구가 함께 있다
모자 쓴 노인과 의자를 잠재우는 형광등 불빛
그 아래 휴지통에 날짜 지난 기차표가 버려져 있다
내일로 가는 우리들 그리움도 잠 못 들어
나무와 새소리, 새벽의 눈부신 햇살이 반짝이고
어제의 너와 내일의 내가 손을 잡고 있다
새로운 출발이 나의 타크나에서 돌아오고 있다
우린 흘러간 다음에 서로 흔적을 지워주는 사이라서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얼굴로
지워져도 서로 알아보는 눈으로
뭉치고 흩어지고 떠돌다 그렇게 너의 일기에서 다시 만나리
<심사평>
[2016 신춘문예] 심사평 / 오랜 시적 연마 느껴지고 서정적 언어 돋보여
1200여명의 응모자들 가운데 예선을 거쳐 넘어 온 30여분의 작품을 꼼꼼히 읽었다.
많은 응모작 때문인지 응모자들의 수준은 향상되어 있었으며 어느 작품을 선정해야 할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일반적인 신춘문예의 수준을 넘어서는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 솔직한 소감이다.
그럼에도 심사를 위해 다음 네 분의 작품으로 좁혀서 논의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은지의 ‘구름의 공회전’외 3편, 이규정의 ‘오르막에 매달린 호박’ 외 4편, 노운미의 ‘일요일의 연대기’ 외 3편 그리고 이윤정의 ‘모자는 우산을 써 본적이 없다’ 외 4편 등이었다.
이 네 분의 작품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하나를 우선적으로 선정하기가 어려웠다.
각각의 장단점을 다시 살펴보고 심도 있게 검토한 결과 김은지와 이윤정의 작품이 최종 심사 대상이 되었다.
김은지의 작품은 시행을 밀어나가는 힘이나 사물을 관찰하는 시선이 세밀하고 좋았지만 전반적으로 시행의 압축보다는 다변의 서술에 의존하고 있어서 시적 언어의 절제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아쉬웠다.
이윤정의 작품은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면서 적절한 균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일차적 장점이었다. 우리 시단에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새로운 시인으로서의 자격도 갖추고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면 이규정의 ‘오르막에 매달린 호박’과 같은 작품은 시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어 주저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윤정의 작품을 놓고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느냐를 정하기 위해 좀 더 논의했다.
‘모자는 우산을 써 본적이 없다’의 경우는 새롭기는 하지만 접속어가 많아 시행의 흐름이 일부 어색했고, ‘흔적의 이해’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조금 관념적이어서 구체성이 약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타크나 흰 구름’이 당선작으로 적정하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다. 오랜 시적 연마가 느껴지는 다른 시편들의 안정감도 이런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쉽게 탈락한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 최동호·이시영
[2016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위험 수목 / 노국희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에 앉아있어
긴 오후가 지나가도록
지금 나뭇잎 한 장이 세상의 전부인
왕개미 옆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헤프게 구걸도 해보았다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
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
알록달록 실패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들고
저기서 당신이 걸어온다
마른 생선 하나를 내어주고는
가던 길을 간다
비릿한 기억이 손 안에서 파닥거린다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말들이 마른 비늘로
바스러진다
낡은 허물 위로 매미소리가 내려온다
울어본 기억만 있고
소리를 잃은 말들이
그림자 속에서 가지를 뻗는다
<심사평>
[신춘문예 시 심사평] 과감한 언어의 도전
1차 심사를 거치고 난 뒤 심사위원들의 손에 들려 있던 작품은 세 편이었다. 김수화씨의 ‘아버지가 족문을 옮기는 방식’, 이언주씨의 ‘만두를 빚다’, 노국희씨의 ‘위험 수목’이 최종적으로 거론됐다.
세 편의 작품 모두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김수화씨의 작품은 삶의 경험을 지나친 감정적 과장 없이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기량을 보여줬다. 이언주씨의 작품 역시 일상적 소재에서 삶의 실감을 잘 구현해내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김수화씨의 경우 군더더기 없이 경험을 풀어내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발화법이 지나치게 안정적이어서 신인의 패기에 값하는 도전의식이 아쉬웠다. 이언주씨의 경우에도 단정한 사색이 장점이 되지만 동시에 언어의 입체적 개진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심사위원들은 이와 같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노국희씨의 ‘위험 수목’을 당선작으로 선보이는 데 합의했다. 과장이나 엄살이 없이 기억과 상처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구도에 있어서는 안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과감한 언어 운용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 “울어본 기억만 있고/소리를 잃은 말들”과 같은 긴장감 있는 상상력이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와 같은 도전적인 문장에 실려 전개되고 있다. 취의와 언어 운용 능력에서 안정감과 패기가 함께 드러나고 있어 짧지 않았을 시 쓰기의 이력에 신뢰감을 갖게 한다. 좋은 신인을 시단에 소개하는 즐거움이 적지 않다. 앞으로의 도정에 문운이 함께 하길 기대한다.
김소연(시인) 조강석(문학평론가) 황인숙(시인) 심사위원
[2016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봄 / 한상록
보십시오. 내게 빈 하늘을 열어
가벼운 마음 옷차림으로 흙을 밟게 하십시오
어디선가 두엄 지피는 향내 그윽하고
새살 돋는 들풀의 움직임 간지럽지 않습니까
돌아오지 않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꿀벌의 잉잉거림 속에 묻어오고
겨우내 강을 건너지 못했던 나무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지랑이 실핏줄로 살아나지 않습니까
잃은 것이 있다면 내 뜰로 와서 찾으시지요
이제 내 뜨락에 샘을 내므로
흩어진 목숨붙이들 찾아 모으려 합니다
바람만 드나들던 수족관을 가셔내고 맑은 수면에다
튀어오르는 날빛 지느러미를 풀어놓으면
찰랑거리는 햇빛을 입고 내 생의 물보라 아름다울 겁니다
옥상에 내어걸린 빨래 나날이 눈부시어가고
누군가가 돋움발로 벗어붙힌 몸을 넘겨다 보면
산록의 묵은잠을 흔들어 놓을
아스라한 진달래향 더욱 곱지 않겠습니까
저 만치 다가오는 나무들의 길이 보이고
새순같은 배꼽을 드러낸 개구쟁이 아들놈
동화 속의 악당을 찾아 타앙 탕 말을 달리면
그 길목을 따라 몇굽이의 강이 흘러서
우리의 얼어붙은 꿈도 촉촉이 적셔지지 않겠습니까
시 심사평 / 재주 부리지 않고 평상심 거스르지 않았다
뽑는 자는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을 바라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작품이 “여기 나 있소” 하고 나타나는 일은 쉬운 노릇이 아니다. 이번의 응모작 가운데서 나에게 뽑혀온 작품들을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다시 골랐다. 네 번씩이나 읽은 나머지였다. 그것이 ‘검’, ‘나무의 모든 냄새들에 대하여’, ‘돌고래 정착기’, ‘물 위에 지은 집’, ‘단풍’, ‘남술이’, ‘연보라 제비꽃’, ‘귀공’, ‘느그는 좋겠다’, ‘봄’, ‘풍경’, ‘산사에 눈이 내리면’, ‘서울 아리랑’이었다. 이 가운데서 ‘봄’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봄’의 인상은 첫째 안정감이다. 들쭉날쭉하지 않다. 재주 부리지도 않는다. 언어에 무리가 생기는 일이 드물었다. 진부한 표현이 한 두군데서 걸렸으나 작품 전체의 평상심을 그다지 거스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러나 이 작품 바로 다음에 ‘검’, ‘나무의 모든 냄새들에 대하여’가 아쉽게 뽑히지 못한 사실에 빚지고 있다.(고은)
[2016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큐브 / 강기화
면을 돌린다
네 개의 뿔을 가진 성난 눈초리
다가갈 수 없는 모서리
익숙하지 않은 경계
면을 돌린다
반듯하게 줄을 긋는
곧은 대답
전설처럼 등지고 있는 벽
위로받을 수 없는
네모의 의혹은 커지고
수상한 귀퉁이의 각은 증명한다
면을 돌린다
중앙을 공격한다
눈을 뜬다
놀이가 된 도형
일정한 방향으로
서로 맞춘다
다시 면을 돌린다
갇혔다가 풀려나는
매혹을 느끼며
활기차게 뛰어든다
비즈니스센터의
저녁 창문은
퍼즐의 공식
밀폐된 면과 면이
독기를 띠며
부활한다
[2016 신춘문예-시·시조 심사평] '큐브'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 참신한 표현 돋보여 '봄눈' 가락의 묘미, 회화성,연가류의 애틋함 조화
올해 접수된 시작품은 2천 편에 가까웠다. 지난해보다 배 가까이 많게 투고됐다. 시의 저변 확대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이긴 하나 다르게 보면 올 한 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로 표현하고 싶으리만큼 힘들고 스산한 삶을 살았구나 하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상당수의 시가 생활고에 젖은 내용이거나, 늙음과 관련된 쓸쓸한 감정을 많이 배출하고 있어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어두운 시대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음을 밝힌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주름의 집', '움파', '물의 건축설계도', '자연사박물관', '큐브' 등이다. 먼저 '주름의 집'은 삶의 쓸쓸함을 거미의 집에 빗대어 탁월하게 형상화한 점은 돋보였으나 삶의 문제를 너무 탐미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한계로 제기되었다. '움파'는 파의 움이 싹트는 자연적 현상의 의미를 잘 살려내었으나 표현의 신기성에 머물고 만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물의 건축설계도'는 삶의 외로움을 풍부한 감성과 사물의 참신한 형상으로 표현해내는 점이 눈길을 끌었으나 시대적 문제의식이 빈약하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자연사박물관'은 뼈 이미지의 특성을 통해 삶의 쓸쓸한 이면을 독창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점이 계속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붙잡았으나 너무 미학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점이 신춘작품으로 뽑기에 주저케 하였다.
이에 비해 '큐브'는 작품 전체가 우리시대의 문제의식을 참신한 발상과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고, 무엇보다 투고된 다른 작품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으로서 가져야 할 전망에 대한 가능성이 풍부하다는 점이 장점으로 제기되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큐브'를 당선작으로 정하였다. 당선자의 등단을 축하하며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한국시단의 빛나는 별이 되기를 바란다.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듯 한 편 한 편 작품을 읽어나갔다. 소재가 새로워졌다는 점, 형식을 모르는 응모자가 거의 없다는 점, 제목이 구어체로 달려 있어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 우리 생활과 가까운 노래라서 시조의 현실의식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는 점 등이 선자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특별한 개성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서정시로서 시조를 읽는 재미를 선사해주는 '벌초' '어머니의 틀니' '푸성귀 음표 피어나다' '가을 한토막' 등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당선작으로 밀기엔 조금씩 약점이 있었다. 지나치게 예스럽다거나 참신성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상이 너무 평이하고 제목과 내용이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있었다.
당선작으로 정한 '봄눈'은 달랐다. 응모한 4편이 두루 고를 뿐 아니라 넘치는 가락의 묘미와 회화성 그리고 연가류의 애틋함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시인의 안목과 능력은 우리 시조시단의 한 이채가 되리라 확신하며 대성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오정환·이우걸·김경복
[2016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티커/이명우
대문에 붙어있던 스티커를 뜯다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붙는 스티커를 뜯다가
스티커 뜯기를 멈추고 산동네를 떠났다
멈추고 떠날 때는 다 지운 것이어서
지운 것은 없는 것이어서
없는 여기 산동네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 몰랐다
대문을 겹겹이 도배한 스티커 화려하기조차 했다
긁히고 찢긴 조금도 아물지 않는 가업
허파와 심장과 위장이 모두 철대문에 붙어
겨울 냉기를 고스란히 빨고 팽팽해졌다
추락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력서를 쓰고 찢고 쓰고 찢었던 것
부도난 회사의 대표였던 이력은
지급기일을 넘긴 어음처럼 휴지였던 것
부도를 막기 위해 오래전에 빌린 사채가 펄럭이며 휴지를
산동네 꼭대기까지 얼마나 난타해댔던가
골목을 돌며 전봇대 기둥과 자주 부딪친다
골목에는 늘 똑같은 소리로 이자가 와 달라붙는다
눈치 없는 거미줄에 발걸음에 와 걸린다
발이라도 와 걸어주는 이것이 거미줄의 눈치
잠만자는직장여성환영 오십세이상알바모집 선원大모집
배달부즉시출근가능 일수당일대출 신용불량자도대출可
얼어붙은 전봇대를 덮이는 환영, 가능, 대박,
대문에 붙어서 스티커를 뜯어내고 있는 아들이 보인다
컴퓨터 게임 대신 싫증 모르는 스티커 뜯기 놀이
경첩이 떨어지려는 대문을 어서 받쳐보려는데
어제까지 떼어낸 적색 신불자대환영 스티커가
어린 아들의 등에 세습처럼 붙어 있다
[2016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삶 현실감 있게 보여준 공감 능력 높이 평가
한국 문단의 새 별이 되기 위해 시 부문에 응모한 이들의 연령층은 20대에서 60대에 걸쳐 있었고, 지역은 전국적이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참으로 많았다.
332명 응모자의 숫자만큼 작품의 우열도 편차가 컸다. 시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작품에서부터, 기성의 시를 초극해보고자 하는 의욕에 넘친 개성적이고 실험적인 시편까지 다양했다. 이들을 두고 시의 응축적인 구성력, 개성적인 상상력, 이미지화의 능력, 그리고 리듬 의식이 잘 융합된 빛나는 별이 될 작품을 골라내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1, 2차의 거름을 통해 남겨진 작품들은 수준작이 많아 심사자들의 고민을 더욱 깊게 했다.
본격적인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황미현의 '다랑어 도마氏', 이은주의 '개인별 오아시스', 종이정의 '묵화', 이윤하의 '4분 3박자로 반달이 지나간다', 이명우의 '스티커' 등이었다. 이들은 앞으로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황미현 이은주 종이정 3명은 투고된 다른 작품들이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과 같은 높이의 수준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윤하의 '4분 3박자로 반달이 지나간다'와 이명우의 '스티커'가 최종 논의 대상이 되었다.
전자는 개성적인 상상력이 장점으로, 후자는 삶의 진정성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공감력이 높이 평가되었다.
오랜 고민 끝에 고단한 오늘의 삶을 무리 없이 이미지화한 후자에 심사위원 모두가 더 공감하여, 이를 당선작으로 밀었다. 새로운 별이 된 것을 축하하며, 큰 별로 성장해 나가길 빈다.
심사위원 남송우 문학평론가, 박남준 안상학 시인
[2016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페가를 어루만지다 / 양진영
허물어지는 것은 새것을 위한 눈부신 산화
나는 철거될 농가의 마룻바닥에 가만 귀 기울인다
그들이 나눈 말이 옹이구멍에서 바스락대고
안 보았어도 떠오르는 정경이 살포시 열린다
문풍지에 꽃핀 청태靑苔는 그들의 회한 혹은 눈물의 자국
뒤틀린 문틀만큼 가족이 부서지는 아픔도 맛보았으리라
거북 등처럼 갈라진 목재에 왜,
산골에서 밭을 일구고 사는 노모의 손등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인연의 무결이 배어 있을까
헐리는 것은 거룩하다 그것은 촛농과 마찬가지
스스로를 태워 주위를 밝히고 남은 잔해이므로
뜨락에 소나무는 송홧가루를 날려 금빛 보료를
까는데
새집을 짓는다는 설렘은 어디 가고 나는
누가 잠든 것 같아서
누가 숨어서 부르는 것 같아서 자꾸만
방바닥을 어루만진다
평생 주인을 덥히며 보낸 폐가의 일생은
불이었다
나는 안방에 누워 그들의 온기를 느낀다
코끝을 간질이는, 낯익은 엄마 냄새
햇볕을 모아 따스함을 지피는 구들장
그 열기로 앞뜰에 꽃이 피고 있다
[심사평-강은교]능숙이 흠일 정도로 시적 구조가 탄탄한 작품
예심을 거쳐 심사자에게 우편으로 배달된 시들은 26편이었다. 시적 수준이 모두 만만치 않았다. 다 무엇인가가 있었으나 또 무엇인가, 한 가지 부족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너무 많이 말하고 있다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말하지 않아 필연성이 결핍된 작위적인 시를 보여주고 있다거나, 그럼으로써 진정성과 절규성이 결여되었다거나 했다.
몇 차례의 독해를 거쳐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다음 네 편이었다. ‘빙폭 외’ ‘물레돌리는 부추밭 외’ ‘낙서를 찾아가는 시간 외’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
마지막으로 남은 시는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였다. 이 시는 너무 능숙한 것이 흠일 정도로 시적 구조가 탄탄하게 직조돼 있을 뿐 아니라 그 표현의 능숙함, 그에 더불어 진정성도 느껴지게 하며 그 절규도 강하게 전해왔다. 함께 응모한 시들의 수준도 고르다고 생각됐다. 따라서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를 당선작으로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인에게 걱정되는 것은 앞에 언급한 시적 재능들 때문에 너무 이른 정형화에 이르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시의 정형화란 상투화이며, 화석화이다. 그점을 염두에 두면서 계속 정진한다면 뛰어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한국 현대시의 별이 되기를….(강은교)
[2016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앵두나무 상영관 / 진혜진
신호등은 봄을 켠다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그루
이도시에 앵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길목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
우듬지에 앵두가 켜지는 순간, 몇 갈래의 속도가 생긴다
몇 분 간격으로 익어 터지는 앵두
비와 졸음 사이에 짓무른 앵두
붉은 앵두는 금지된 몸에서만 터져 나온다
한 쪽 눈을 질끈 감는 사이
길바닥에 누운 흰 사다리를 오른다
아이가 손을 들고 소나기 그친 사이를 뛰어간다
할머니는 한 칸 한 칸 신호음 사이를 건너고 있다
사람들이 마중과 배웅으로
사다리를 건너면 앵두의 색깔이 바뀐다
빨강을 물고 순식간에 달려가는 계절이 다른 계절의 입술에 물리듯
앵두나무 뿌리는 발설되지 않은 소문까지 뻗어있다
앵두가 지고나면 초록 이파리
여름 정원에 비비새 울음으로 남아
그 울음 끝으로 떨어질 이파리로 남아
세를 불리는 앵두나무
공중으로 발을 들어 올린다
언제라도 짧은 치마를 입듯 가벼운 신호음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처음 같은 얼굴로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
[2016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활물의 비유 개성있게 선보여
우리 선자들에게 넘어온 시는 총 786편이었다. 올해는 태작들도 많았던 반면 일정한 수준으로 고른 기량을 가진 분들도 골고루 응모해 와 문학의 위기와 위축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문학에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응모작들의 주된 주조는 경기부진과 어려운 세태, 사회 혼란 탓인지, 거시세계보다는 미시세계에 가까웠다. 자영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시편들도 여럿 있었고, 일상의 소품들과 거리 풍경, 자연, 가족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들이 많았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에 남겨진 작품들은 열 분이다. 열 분의 작품들 중 우리 선자들의 의견이 쉽게 일치한 시 당선작은 진혜진의 ‘앵두나무 상영관’이었다. 진혜진은 당선작 외에 함께 투고한 시편들에서도 당선작에 버금가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미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시집 한 권 정도 분량의 작품을 가졌음직한 자유로움과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이 당선 후 일 년 만에 대부분 사라지는 상황에서 시를 오래 쓸 것만 같은 신인을 만나 기뻤다. ‘앵두나무 상영관’은 앵두를 거리의 빛에 대비해 사람의 내면과 일치시키는 활물의 비유를 개성있게 선보인 작품이다. 앞으로 쓰는 자로서의 강건한 정신의 높이를 획득해가는 큰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당선작은 되지 못했지만, ‘버클’의 이희라, ‘삼각김밥’의 장시은, ‘온순한 짐승을 따라가다’의 이규정, ‘현호색 풀밭’의 김신유 등이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시적 세계를 선보였으나, 편차를 보여 끝까지 선자들을 아쉽게 했으며, ‘악성바이러스 치료하기’의 김혜강, ‘사막의 저녁’의 이선유, ‘이대 팔’의 정연희, ‘잡초의 발견’의 최수안, ‘합석’의 채선정 등도 풍부한 시적 기량을 갖추고 있으나, 뒷심이 부족해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분들도 꾸준히 정진하면, 머지않아 지면에 등장해 좋은 시인으로서의 기량을 충분히 선보일 자질을 갖추고 있으므로 다음을 기약한다.
(심사위원 김언희·성윤석)
[2016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작]
가로수 마네킹 / 강서연
란제리도 망사스타킹도 액세서리도
색 바랜 바바리코트도 한데 뒤엉켜있던 가판대
가을 정기세일을 마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마네킹들이 서 있다
가로등 불빛이 훤하게 조명을 비추는 쇼윈도
은행나무의 옹이가 생식기처럼 열려 있다
저 깊은 생산의 늪에 슬그머니 발을 넣어보는 저녁
어둠이 황급히 제 몸을 재단해 커튼을 친다
첫눈이 내린다
칼바람을 따라가며 천을 박는 발자국들
재봉틀 소리에 맞춰 나무의 몸속에서도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길도 불빛도 사람들도
왕십리 돼지껍데기집 화덕 위에 불판으로 모여든다
올해의 유행은 몸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 패션
마지막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운 새들은 어디까지 갔을까
오래 서 있어서 아픈 플라타너스 무릎에
가만히 손을 얹는 홑겹의 흰 눈발
[2016 영남일보 문학상 시 심사평] 시인의 따뜻한 시각에서 詩 정신의 향기 느껴져
좋은 시란 어떤 시인가. 난해한 화두에 부딪힐 때마다 지나간 1980년대를 떠올린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그 시절은 시에 있어서만은 풍요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절이었다. 교사도 목수도 수녀도 철근공도 의사도 버스안내양도 자신의 목소리로 시를 썼고 시집을 펴냈다.
사람들은 시를 통해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의 곤궁함을 지워내고자 했고 수십만 부 이상 팔려나가는 시집들이 이어졌다. 세계 문예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현상을 언론은 ‘시의 시대’라 지칭했다.
무엇이 그 시절의 사람들을 시 속으로 불러들였을까. 시정신이 지닌 향기가 그 답이라 할 것이다. 시는 결핍 많고 외로운 세계의 심장에 켠 따뜻한 등불 같은 존재이다. 가난하지만 결코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고 외롭지만 결코 외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궁핍한 생명들을 껴안고 따뜻한 지상의 꿈 쪽으로 걸어가게 한다. 익숙함과 타성에 젖은 시간들을 거부하고 평범 속으로 젖어드는 개인의 삶이 지닌 치욕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시 속에서 사람들은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았고 영혼의 정화가 뒤따랐다.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지성과 일치된 감정 속에서 자아와 세계를 온전히 느끼는 법을 찾은 것이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에서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우리들의 언어 치료시간’ ‘이층의 꽃집’ ‘가로수 마네킹’이었다.
‘우리들의 언어 치료시간’은 언술의 명료함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으나 이를 진술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 흠이었다. 모두 알 수 있는 진술은 시의 긴장을 해치게 된다. 재해석된 평범한 풍경들이 갖는 생명력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층의 꽃집’과 함께 응모한 시편들이 지닌 사유의 깊이는 소중한 것이다. 이층의 꽃집에 있는 화분 하나가 꽃을 피우는 동안 펼쳐지는 이미지의 파편들은 자유연상의 즐거움과 세계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모된 시편들 속에 편향된 이국취향의 목소리는 이 응모자가 밟고 있는 땅이 어디인가 하는 의문을 지니게 했다. 이국정서 속에 자신의 고유한 삶의 정서를 새길 수 있다면 평가는 바뀔 것이다 .
‘가로수 마네킹’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선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헐벗은 겨울 가로수들을 따뜻이 응시하고 생명력을 부여하는 모습 속에 시 정신의 향기가 느껴졌다. 첫눈을 맞으며 왕십리 돼지껍데기 집 화덕으로 모여드는 사람들과 오래 서 있어서 아픈 플라타너스의 무릎에 손을 얹는 눈발의 모습은 이 응모자가 지닌 감정의 질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과 세계의 결핍을 예리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응시한 작품들, 심장의 쿨럭임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시편들로 독자의 마음을 훔치는 시인이 되길 바란다.
곽재구 시인 이하석 시인
2016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대봉 / 김이솝
파르티잔들이
노모의 흐린 눈에 가을을 찔러 넣는다.
턱밑에 은빛 강물을 가두고 은어 떼를 몰고 간다.
쿵! 폭발하는 나무들.
온통 달거리 중인 대봉 밭에
감잎 진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우는 섬진강변.
귀를 묻고 돌아오는 저녁.
[2016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최동호·이승하 시인
역사의 질곡이 준 상처를 보듬기 위하여
예상을 넘어서는 좋은 수준의 작품이, 그것도 예년보다 훨씬 많이 답지한 것은, 중앙과 지방의 간격이 그만큼 좁혀졌다는 뜻일 터이다. 수원과 인천은 물론 서울에서도 많은 예비시인들의 작품이 날아와 쌓였다.
당선작은 신춘문예 역사상 유례가 없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다 죽어간 두 파르티잔(빨치산)과 죽음을 지켜본 어떤 여성의 생을 다룬 시다. 현대사와 가족사와 개인사가 중첩되어 있는데 시는 짧다. 한국전쟁 전에, 전쟁 과정에, 그리고 휴전 후에 몇 명이 지리산 일대에서 죽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울던, 고인의 어머니와 아내는 이제 연로해 몸도 마음도 성치 못하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의 그 생혈은 눈물일까 홍시일까. 눈도 귀도 어두운 노파는 눈이 잘 안보이는 이유가, 귀가 잘 안 들리는 이유가 노환에만 있지 않다. 그 시절에 젊은 아낙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60년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임을 알고 있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두 심사위원은 높이 사기로 했다. 생략과 비약이 좀 심한 것이 약점이지만 독특한 은유법과 의미심장한 상징화는 칭찬해줄 만한 장점이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소 발굽에서 꽃피고(박윤우)’가 단연 높았다. 문제는 이 작품을 받쳐주는 작품이 없다는 것이었다. 시 한 편만 놓고 본다면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도 화제가 될 시인데 아쉽고 안타깝다.
‘도배사(홍정선)’의 튼튼한 주제의식, ‘늦은 마트(권수옥)’의 따뜻한 시선, ‘절름발이(이경동)’의 세심한 관찰력, ‘스타킹페티시(이인영)’의 신세대적 감각도 놓치기 아까웠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더욱 열심히 습작하기 바란다. 한두 해 늦게 등단해서라도 오래오래 시를 쓰는 것이 중요한 일이므로.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낙선자들에게는 격려의 악수를 청한다.
■심사위원 / 최동호(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2016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농림6호 / 김우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갔다. 바람 한 잎과 구름을 벗겨낸 햇살도 꺾어 넣었다. 봄 논의 개구리 울음도 잡아다 넣었더니 비로소 항아리가 꽉 찼다.
나흘 밤의 고요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항아리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저 경건한 나흘, 지나가는 빗소리도 발끝을 세우고 갔으며 파란색 바람이 일렁이다 갔으며 또한 파란 별들이 농부의 발목 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갔다.
항아리 속에서 적막의 힘이 차오른다. 씨앗들이 뿜어내는 발아의 열, 항아리가 드디어 익어가기 시작한다.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도란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씨나락경전을 듣는다.
적막은 발아의 요람
작은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우주가 발아하고 있다.
●‘농림6호’는 1960~1970년대 재배된 볍씨 품종.
신춘문예-시 심사평 /“위축되고 시들어가는 현실속 희망의 응원가”
본심에 오른 20명의 작품 100여편을 읽었다. 연륜이 감지되는 일정한 수준작은 많았으나 태양과 달처럼 우뚝하거나 바늘 끝처럼 외로운 수작이 없어 선자의 마음이 마냥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씀바귀’ ‘나비들이 출몰하는 숲’ ‘이동 만물상’ ‘깻단은 기억해야 할 이름처럼 묵직했다’ ‘농림6호’를 놓고 선자들은 의견을 좁혀갔다.
‘씀바귀’는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한 사물을 통해 우리 삶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였으나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에 “낡은 일상을 토악질해 쓸려나간다”와 같은 상투적인 시구들이 눈에 거슬렸다. ‘나비들이 출몰하는 숲’은 “사각의 창틀엔 읽기도 전에 몇 장씩 겹쳐 넘겨지는/성경책의 얄팍한 책장 같은 햇살”을 비롯해 빼어난 이미지들이 도처에서 빛난다. 또한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공력을 쏟는가를 작품마다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상 전개 방식에 일정한 틀이 있어(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응모작 4편의 시 결구가 ‘있다’로 끝난다) 신춘문예를 의식한 작품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이동 만물상’은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언어로 농촌마을의 현실을 잘 그려낸, 당선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탄탄한 작품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깻단은 기억해야 할 이름처럼 묵직했다’와 ‘농림6호’는 시를 위한 시가 아니고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상이 발현된 시라 체득한 비유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높이 보았다.
제목이 당돌한 ‘농림6호’는 생명의 움틈을 세밀하고 애정에 찬 눈으로 바라다보며 자연의 신성을 발견해내는 시안이 깊어 좋았다. ‘농림6호’를 당선작으로 결정한 이유 중에는 위축되고 찌들고 시들어가는 시대의 현실에 희망의 응원가를 들려주고 싶은 선자들의 마음도 작용했음을 밝혀 둔다.
축하한다. 아울러 모든 응모자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씨앗이 내년에는 축하의 꽃으로 피어나길 바란다.
황인숙시인 함민복시인
[2016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두더지 반지하 신혼방 / 김상현
가을 산길 위에서 느닷없이 냄새가 혀를 밀어 넣었다
하얀 앞발톱의, 엎어져 있는 두더지 주검
두더지는 반지하 방이 되고 있었다
잘 닦은 화이바 같은, 검은 갑옷의 벌레가
시체에 세 들어 늦깎이 신혼방을 만들고 있었다
주검이 있을 때, 짝을 맺는다는 송장벌레
저 더듬이 끝이 뭉툭한 것은
그 교감도 한때는 부딪혀 옹이 박힌 것
구린 터 속에서도 더듬거리며 전등을 갈겠지
저 등판의 빛은 그들 눈에 모닥불이 타오르는 증거다
자글자글 끓는 된장찌개 투가리, 그런 뜨거움 올린
양은밥상을 들고 거뜬히 문지방 넘는 삶
둘은 두더지를 땅에 묻을 때까지
쉬지 않고 흙을 파내려갈 테지
흙으로, 나무뿌리를 갉았을 몸을 닫고 쓰러진 밑바닥 위에
꽃 장판을 깐 다음
반지하가 지하가 된 방 안에서 서로를 쓰다듬겠지
때로는 이웃 풍뎅이 애벌레와 다툴 일도 있겠지만
샛별 같은 알을 낳고 그 아이들은
가까스로 냄새를 막은 몸의, 한 터럭까지 다 뜯어먹고서야
벽 틈새에 손톱 밀어넣는 것이 햇살이었음을 알겠지
목숨이 윤이 나는 저 까만 옷의 청소부 부부
오늘 같은 초야(初夜)면,
숲 속은 달이 익어 참 부끄럽겠다
[2016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삶에서 희망 발견하는 시각 뛰어나"
신춘문예라는 제도는 한 편의 작품을 뽑는 일이지만 한 사람의 시인을 문단으로 불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한 작품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응모자가 습작에 쏟아 부은 훈련의 흔적까지 읽으려고 한다. 시와 그 시를 쓴 사람을 같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작품을 판별할 때, 구태의연한 서정시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시를 꿈꾸고 있는지, 시에 끌어들인 특수한 성격의 언어들이 이 세계의 보편적이고 균형적인 감각을 확보하고 있는지, 그리고 발설하고 싶은 개인의 일과 발언해야 하는 집단의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과정을 거쳤는지 등을 살펴보게 된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것은 모두 9명의 작품이다. 말을 다루는 솜씨들이 뛰어나 다들 오랜 습작을 거쳤으리라 짐작되는 작품들이었다. 그렇지만 내면의 울림이 느껴지는 중량감은 대체로 부족해 보였다.
우리는 그 중 5명의 작품에 주목하였다. 정재돈의 <산낙지>, 이시윤의 <4분의 3박자로 반달이 지나간다>는 낯선 이미지를 충돌시켜 새로움을 구하고자 하는 작품들이지만 아직은 덜 익어 어색한 느낌이 강했다. 서귀옥의 <망중한>은 안정된 호흡으로 주제를 의도대로 차분하게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의식의 찌’ ‘생의 잔해들’과 같은 낡은 표현을 하루바삐 걷어낼 줄 알아야 새로운 시의 나라에 당도하리라 생각한다.
이동한의 <사과>는 깜찍하고 활달한 상상력, 군더더기 없는 언어 운용 기법이 매혹적이어서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어깨를 겨루었다. 그런데 시의 뒷부분이 공허한 말장난으로 마무리되는 점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당선작은 김상현의 <두더지 반지하 신혼방>으로 결정되었다. 죽은 두더지의몸에 깃들어 사는 벌레를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의 따뜻함을 길어 올리는 시인의 시각은 예사롭지 않다. 오밀조밀한 감각의 배치도 뛰어났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에서도 우리는 만만찮은 필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죽음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하는 당선작의 온기가 이 냉랭하고 삭막한 세계의 불꽃이 되기를 빈다.
문효치시인 안도현시인
[2016 전북도민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해花蟹 / 하송
냄비뚜껑을 열자 꽃처럼 붉은 꽃게가
철갑을 하고 있다
건들기만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듯
엄지발을 치켜든다
뭉툭한 가위로 발을 절단하자
소리를 지르는 것은 꽃게가 아니라
가위였다
골수가 울컥 쏟아지자
바다는 잠잠했다
사는 일은 파도가 잠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갯벌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것
꽃게, 파도가 거칠수록
두 눈 똑바로 뜨고 등딱지에 힘을 준다
한 평생 꽃처럼 배를 보이지 않는 것이 꽃게다
섬 하나가 안테나를 세우고
육지로 나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바닷바람에 허리가 꼿꼿하다
바다를 버린 꽃게, 절대 바다를 돌아보지 않는다
·화해花蟹 : 꽃게
◆ [심사평]
금년에 600여 편의 운문이 응모하였다. 시조와 동시, 한시 등, 그 종류와 형태도 다양하였다. 이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민옥순의 <헛발을 딛다>와 조양비의 <낯선 폭설>, 황병욱의 <포도밭 사막> 그리고 지연의 <다르미타>와 하송의 <화해>였다.
민옥순의 <헛발을 딛다>는 조각이 난 접시의 형상을 치밀한 묘사와 아름다운 표현으로 시선을 끌었고, 조양비의 <낯선 폭설> 또한 다소 보헤미안적 풍경을 능란하게 묘사하였다. 두 작품 모두 언어의 직조 능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직조와 묘사가 내용의 공소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황병욱의 <포도밭 사막>은 흉작으로 남은 농부의 신산한 삶을 짜임새 있는 구성과 미감으로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3연의 ‘번화가’와 끝 연의 ‘열매를 맺는다.’는 돌연한 시어의 혼란과 상투적 인식이 새로운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끝까지 고심했던 작품은 지연의 <다르미타>와 하송의 <화해>였다. 지연의 작품은 쉬르레알리즘 기법을 연상케 하는 자유분방한 에스프리와 비유 그리고 감각적 묘사가 그간의 문학적 역량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다르미타>라는 제목의 낯설음에서 오는 이질감이 끝내 ‘불꽃의 접점’을 찾지 못해 아쉬웠다.
<화해>는 ‘꽃게와 바다’라는 비유와 상징의 공간 속에서 ‘갯벌 속으로∼몸을 숨기’며 오늘의 고난을 극복해가고자 하는 화자의 자기 고백적 주문이 긴장과 이완의 율조 속에서 하나의 ‘빛’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한 평생 배를 보이 않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결연함에서 일말의 연민을 느끼게 된다.
평이한 듯 보이나 체험이 육화된 그 평이함이 오히려 어떤 결기와 진정성으로 느껴져 앞으로의 가능성에 믿음을 갖고 당선작으로 올렸다. 보다 정진하여 격조와 품위를 더한 시인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김동수<미당문학회장,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2016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통화음이 길어질 때 / 진혜진
포도에서 만납시다
머리와 어깨를 맞댄
돌담을 돌면 포도밭이 있다
맛이고 흔적인
우리의 간격은 포도송이로 옮겨가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타고 몸을 쌓는다
씨를 품는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손끝이 뜨거워지고
포도는 오래 매달릴수록 그늘의 맛이 깊어진다
입꼬리 올린 갈림길마다 가위눌린 꿈에서
쓴맛이 돈다
포도는 입맞춤으로 열리고 선택으로 흩어진다
바둑판 위에서 반집을 지키는
흑백의 돌처럼
우리는 내려올 수 없는 온도
피가 둥글어진다
언젠가 통화음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마지막 고별이라는 걸 알았고
덩굴인 엄마가 욱신거려
그해 포도 씨는 자꾸만 씹혔다
깨물어 버릴까
한 팔이 눌리고 한 다리가 불면인 잠버릇이 생긴 곳
자유로를 지나 수목장 가는 길 포도 알맹이를 삼킨다
하나의 맛이 두 개의 흔적을 낸다
단단히 쌓은 탑을 나는 한 알 한 알 허물고 있다
탑이 물컹하다
[시 부문 심사평-신형철 평론가] “만남과 헤어짐의 진부한 사건 포도의 이미지로 생기를 얻다”
시는 가끔 속인다. 속이는 주체는 시 자체다. 쓰는 사람도 속이는 줄 모르고 속이고, 읽는 사람도 속는 줄 모르고 속는다. 시가 때로는 쓰는 사람을 초과하고 읽는 사람을 홀릴 때가 있다는 것, 그것이 시의 위력이자 위험이다. 그러니 단 한 편의 수작만으로는 시인을 믿을 수가 없다. 그것이 시인이 아니라 시 자체의 능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상현 씨의 ‘기다리는 여자’ 외 5편은 체험과 관찰에서 서정적 순간들을 이끌어내는 기예가 능숙했다. 이봄 씨의 ‘빙하기의 식사’ 외 2편은 부드러운 묘사와 딱딱한 진술을 교직하는 능력이 강점이었다. 이서영 씨의 ‘암전’ 외 4편과 이재민 씨의 ‘두근두근 동물원’ 외 4편은 삶의 내막을 투시하는 시선이 깊다는 점이 닮았다. 전자의 ‘10년 후’와 후자의 ‘간지’ 같은 작품은 여느 앤솔로지에 포함되어도 손색없을 수작이었다. 장수연 씨의 ‘나무의 표정을 빌리다’ 외 3편은 화술의 나이가 젊은데 특히 ‘비닐하우스’의 발랄한 상상력이 인상적이었다.
이분들에게서는 가장 좋은 시 한 편을 선뜻 골라낼 수 있었다. 그러나 김기숙 씨의 ‘선잠’ 외 3편과 진혜진 씨의 ‘먼지의 결혼식’ 외 4편의 경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김기숙 씨는 감정을 냉철하게 통제하고 정교한 언어의 구조물을 만드는 일에 실패가 없었고, 진혜진 씨의 작품들 역시 발상과 화술에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이 점이 오히려 두 사람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이중 진혜진 씨의 작품, 특히 ‘통화음이 길어질 때’가 선택된 것은 심사자의 취향이 개입한 결과다.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진부한 사건이 포도의 이미지로 생기를 얻는 장면들이 아름다웠다. 진혜진 씨에게 보내는 축하만큼의 진심을, 김기숙 씨에게 보내는 위로에도 담고 싶다.
[2016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둥근 길 / 문귀숙
허풍빌라에서 내린,
수백억 상속녀가 떨어뜨리고 간
셀 수 없는 동그라미의 말들
깔깔 거리다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꽃뱀의 뱃속 같은 골목을 후진으로
나오는 오늘 일진은 구부러진 끗발이다
금요일을 발광하는 네온사인을 비켜선
흐린 그림자 하나, 번쩍 손을 들었다
뒷자리에 앉자마자 웅얼거리는 목소리
백미러로 읽어야 하는 목적지가
번져 읽을 수 없다
붉은 신호등 하나를 넘으며 자정의 경계를 넘었다
어떤 넋두리도 용납되는 할증의 시간
갈림길 마다 좌회전을 외치며 더 흐려진 그림자
젖은 넋두리에 수몰된 길을
재탐색하라고 내비*가 얼굴을 붉힌다
붉은 기운이 부족한 사납금만큼 미터를 올리고
대낮처럼 환한 불면의 광장을 지나고
늙은 벚꽃나무가 떨어뜨리는 흐린 시간을
지나 돌고 돌아도 이어지는 길
더 이상 택시로는 갈 수 없는 길
내비가 멈췄다
그림자의 손가락 끝에 만월이 걸렸다.
*내비게이션
[2016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당선작, 詩를 밀고가는 힘 좋았다" / 시인 김준태
좋은 시는 어떤 것인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변치 않는 것은 좋은 시는 음악성(가락ㆍ리듬)과 회화성(그림ㆍ이미지)을 잘 갖추되 삶을 이끌어 올리는 힘이 엿보여야 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는 있지만 보지 못하는 그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데 시의 운명과 책무가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시인이 되려고 하는 자는 현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물론 과거와 미래까지도 동시에 담아내는 숨쉬는 그것들과 끊임없이 접신(엑스터시)하고 밀교해야 한다는 데에 시와 시인의 운명이 요구하는 그것일 터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광남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작품을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다. 온라인시대인지라 응모자들이 가히 전국적이었다. 서울, 경기, 강원, 경상, 충청, 전북을 비롯하여 광주전남에서 의욕적인 시작품이 들어왔다. 그런데 '시는 짧고 소설은 길다'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모르고 지나치게 지루한, 마치 콩트나 단편소설의 한 대목을 잘라다 놓은 것 같은 작품들이 많아 작금의 한국시의 병폐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최종에 오른 세 사람의 작품은 믿을 수 있는 대목이 많았다. 먼저 '탑의 형식' '장수하늘소의 꿈' 등의 응모자는 현대시의 특징 중의 하나인 판타지의 기법이 너무 지나치게 드러나서 시적 리얼리티 즉 감동이 따라갈 수 없었다.
다음으로 '동행' '저녁의 합석' '천년웃음' 등의 응모자는 시 속에 서정성과 서사성을 잘 교직하는 저력은 엿보였으나 삶을 눈뜨게 만드는 '아픔의 힘(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성 혹은 카타르시스의 힘이라고 말했다)'이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둥근 길' '플라잉 가이' '장구' 등 3편을 응모한 문귀숙 씨는 전체적으로 작품의 구성이 탄탄하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시적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시를 밀어 올리는, 끌고 가는 힘(에너지) 그리고 시적 의지가 좋았다. 음악성과 회화성 그리고 민요정신(Ballad Esprit)을 두루 갖춘 점이 크게 사줄만했다.
다만 모더니티와 언어의 나이브한 참신성, 리리시즘의 부족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우리시대를 깊이있게 통과하는 담론을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동시에 보여주면서 정진하기를 기대해본다. 새해를 맞아 당선시 '둥근 길'로 출발하는 문귀숙 씨가 나름대로 꽉 찬 '만월'을 보여주고 있어 독자들을 기쁘게 할 것으로 믿는다. 축하한다.
[2016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 지연
무덤 자리에 기둥을 세운 집이라 했다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으므로
무너진 방을 가로질러 뒤안으로 갔다
항아리 하나가 떠난 자들의 공명통이 되어 여울을 만들고 있었다
관 자리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던 일가는 어디로 갔을까?
한때 그들은 지붕을 얹어준 죽은 자를 위해
피붙이 제삿날에 밥 한 그릇 항아리 위에 올려놓았을 것도 같고
그 밥 그릇 위에 달빛 한 송이 앉았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항아리 혼자 구멍 뚫려
떨어지는 빗방울의 무게만큼
물을 조용히 흘러 보내고 있었다
산자와 죽은 자의 눈물이
하나가 되어 떠나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이 세상에 무덤 아닌 곳 없고
집 아닌 곳 없을지도
항아리 눈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이팝꽃이 내 어깨에 한 송이 툭 떨어졌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후두둑 그 집을 뛰쳐나갔다
비가 오는 날 내 방에 누우면
집이기도 하고
무덤이기도 해서
내 마음은 빈집
항아리 위에 정한수를 올려놓는다
2016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시 당선작
므두셀라 / 이서하
납작한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가락들
그 손가락들은 내 안에 들어온 적이 있다
내게 주먹을 쥔 적이 있다
내가 부은 날엔 혼자 병원에 갔다
두 개의 주머니가 팽창하는 중이다
주머니 속 먼지를 작게 쪼개면
더 작아져 날아가는 티끌처럼
수 십 억 년을 떠돈 므두셀라처럼
나의 날은 모래알같이 많으리라(욥기29:18)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어
두 개의 주머니를 오렸다
피 묻은 봉투 속에서도 나는 편안하다
좋은 것만 기억하는 그의 말이 잠 속까지 따라온다
나를
작게
쪼개면
더
작게
쪼개지는
내 아이들
혼자 떠도는 행성이 있다
그 행성의 이름은 므두셀라다
심사평 / 몸으로 기억하는 '상처'…문학적 낙천성으로 보듬어
2016 한경 청년신춘문예를 심사해 보니, 신춘문예로는 늦깎이지만 ‘청년’ 신인 문인의 등단에 초점을 맞춘 특성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늘어난 응모량도 그렇지만, 전년보다 젊은 감각을 지닌 언어들이 대폭 늘어난 것은 청년신춘문예의 앞날을 위해 고무적인 일이다.
‘달숲 공방’ 외 4편을 투고한 장우석 씨는 문장을 운용하는 단정한 품새가 돋보였다. 다만 물 흐르듯 논리적인 문장 흐름을 시적으로 전환시키는 문장의 분절, 사유의 모험이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내던져지다’ 외 4편을 투고한 김형주 씨는 일상적 풍경을 반성적으로 포착하는 직관력이 눈에 띈다. 그러나 풍경이 직관적으로 ‘포착’된 뒤에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시적으로 되새김질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수생식물로 돌아가는 밤’ 외 4편을 퇴고한 최민서 씨는 내면적 상처를 일상 풍경의 ‘환상적’ 가공을 통해 변형시키려는 시도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시가 되려면 말의 시적 변용 이전에, 사유의 시적 변용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작인 ‘므두셀라’ 외 4편을 투고한 이서하 씨는 당선작 ‘므두셀라’에서 보듯이 몸이 기억하는 상처를 ‘우주적 명랑함’으로 전환하는 위트와 자기 긍정성이 주목할 만하다. 삶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청년다운 문학적 ‘낙천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모든 응모자에게는 격려와 위로와 응원의 말씀을 전한다.
김기택(시인)·이원(시인)·함돈균(문학평론가
[제11회 경제신춘문예 시 당선작]
솟대 / 유택상
들판은 왜 저리 푸른가
아버지는 늙어서도 솟대이다
들판을 한 평생 지키시다 한 마리 새가 되었다
지적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땅을 지키기 위해
비를 맞고 눈을 맞고
가난한 살림에 몸피가 말라 있었다
자갈밭을 논으로 만든 옹이는
힘겹게 일궈 온 들판들 언제쯤 아버지 가는 주름살의
내력을 읽어 낼 수 있을까,
이것만은 지켜야 자식들 산목숨 이어줄 수 있다고 콜록콜록 막걸리 한 사발
가득 마시던 순간, 야윈 갈비뼈 사이에 깊이 앓았던 병이 도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들판에서 자꾸 흔들렸다
빛보다 어둠이 두려웠던 나는 들판에서 얼어 죽지 않으려고
아버지의 깃털을 뽑아 내 몸을 덮었다
겨울 동면에도 흘러 들어온 견딜 수 없는 추위 때문에
조금씩 아버지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한 평생 내내 몸이 젖은 들판은 살과 뼈로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아버지의 몸이 된 들판은
새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바람 찬 방안에서 비가 새는 걸 막으려고
밤새 솟대가 된 몸
밥그릇에 메아리치는 뜨거운 목숨의 노래
수풀 사이 땅바닥에 낙석처럼 버려진 삽 한 자루
아버지의 몸이다
[제11회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심사평 / 가족의 삶도 청춘의 고민도…더 풍성해진 '생활속 경제이야기'
올해 경제신춘문예는 응모편수도 지난해보다 양적으로 늘었고, 질적으로 아주 풍성했다. 시 응모작도 많이 늘어났지만 특히 소설과 수필(수기)쪽의 응모편수가 지난해 곱절 정도로 늘어났다. 심사결과 대상은 소설부문에서 나왔고, 우수상은 시 부분에서, 또 가작은 수필(수기) 부분에서 나왔다.
시 부문에서는 전체 수준은 예년과 비슷했지만, 출품작들의 우열이 너무 극명한 느낌이었다. '솟대', '간재미', '아가미 숨과 생활', '트레이더스 개점하다'가 최종 경합을 벌였다. '트레이더스 개점하다'는 시적 전개가 활달하고 주제도 선명했지만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고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아가미 숨과 생활'은 어판장 생선가게에서 젓갈을 담그는 그녀의 일상이 그림처럼 전개되나 '꽃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와 같은 생경한 표현이 시적 긴장을 약화시켰다. '간재미'는 간재미를 무치는 엄마의 모습을 정밀하게 묘사하듯 새콤하게 그려냈으나 마지막 마무리 연의 처리가 하나의 추억으로 전락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솟대'는 아버지를 마을이나 집을 지키는 수호신의 상징물인 솟대로 비유하며 아버지의 일생을 그려낸 수작이다. 솟대와 들판, 버려진 삽 한자루가 모두 아버지의 몸이다. 한 겨울 ‘아버지의 깃털을 뽑아 내 몸을 덮었’던 시인이 말하는 ‘밥그릇에 메아리치는 뜨거운 목숨의 노래’가 가슴 아프다. 이 작품과 소설 부분의 '팬티M'을 놓고 작품의 성취와 완성도를 따진 끝에 우수작으로 결정했다.
심사위원인 이순원 소설가와 이희주 시인
[2016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양을 찾아서 / 구녹원
마침내 양은 사라졌다
한 의식을 잃고서 나는 은주발에 담긴 눈*이 되고 싶었다
갈피가 다 바랜 경전 속에 없던 신이
밑창 닳아 낮아진 가죽신 아래에서 흘렀다
눈 내리는 게르 뒤란에서 그 의식은 치루어졌지
양 한 마리는 선택되었고
모든 자연의 의식 속에서 가장 무죄한 저 걸음걸이
죽음으로 걸어갈 때 누구라도 하늘을 보고 땅을 볼 것이다
단도가 양의 숨길을 통과하는 직전 그 눈은 검은 천으로 가리워지고
목자牧者 는 숨 털 한 올을 뽑아 속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한다
산자에게 건너간 울음소리, 가슴에서 질척이고
가장 조용히 자기를 버려 안식을 얻는 양의 침묵을 본다
양떼구름이 언덕으로 무리 지어 지나갈 때
두루마리 편지처럼 자꾸 도사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초원을 한 뼘 더 자라게 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펼친다
만나고 싶은 얼굴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침상 캐시미어에 머리를 파묻고 싶었다
천년을 흐르는 구름도 있었다
양은 어디에 있을까
*벽암록 제 13 칙 파릉(巴陵) 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 차용.
[신년특집 신춘문예 심사평]신선한 상상력·큰 스케일이 마음 사로잡아
본심에 30여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응모 편수는 많았으나 산뜻하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적 철학이나, 시적 사유의 폭이 약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최종적으로 논의가 거듭된 작품은 송현숙의 `배고픈 이름'과 구녹원의 `양을 찾아서'였다. `배고픈 이름'은 잊혀져 가는 `도장'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독특한 시각과 발상으로 `불운한 가족사'를 잘 그려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상투적인 표현으로 시적 긴장감이 떨어졌다. 제목 또한 상징성이 약한 것이 흠이었다. 당선작 구녹원의 `양을 찾아서'는 오랜 숙련의 흔적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사라진' 양의 죽음을 통해 삶을 영속하게 하는 존재의 비의에 천착한다. `가장 조용히 자기를 버려 안식을 얻는 양의 침묵을 본다'는 시구의 깊이, `초원을 한 뼘 더 자라게 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펼친다'는 신선한 상상력과 큰 스케일이 심사위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영춘·고진하 시인
[2016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맹수 / 정율리
하늘에는 울타리가 없다
이 쪽 저 쪽으로 몰려다니는 철새들
초승달로 기러기 행렬이 지나간다
하늘을 맹수라 불러보다 깜짝 놀란다
이동하는 저 철새들의 몇 마리는
땅으로 혹은 바다위로 곤두박질 칠 거다
초승달이 몇 마리 삼키고
구름이나 혹은 비바람이 또 몇 마리 삼키겠지
기러기들 서둘러 달빛을 벗어나려
한밤의 속도로 튕겨져 나온 행렬
어둠에 묻힌 채 날고 있다
하늘은 야생이다
무엇이든 먹어치우려는 난무(亂舞)의 태생지다
밤낮이 자유롭고 계절도 마음대로 바꾼다
낮과 밤은 서로 피해 다닌다
가끔 날아가는 비행기가 지상으로 떨어지고
하늘을 날아오른 집이며 자동차들이
구겨진 채 떨어진다
빈 껍질만 떨어지는 걸로 보아
저 하늘에 포악한 야생의 무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울타리가 없으니 야생이다
날아가는 것들은 무엇에 쫓긴 듯 서둘러 날아간다
낮과 밤이 맹수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폭식을 하고
낮엔 낮에 보이는 것들을 사냥하고
밤엔 밤에 보이는 것들을 사냥한다
조용한 날들이 없는 입이다
◇심사평 - "존재의 깊은 통찰·진중한 삶의 발걸음 박수"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그 첫째 기쁨은 1985년에 시작된 대전일보 신춘문예가 1999년 우여곡절의 춘궁기를 거쳤다가 올해 부활한 일이다. 또 하나는 시 부분 응모작을 심사하는 즐거움이었다. 모든 시는 영혼의 파란만장이다. 그 파란만장이 드리운 수심과 파고와 물보라에 함께 젖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이곳저곳에서 시가 죽어간다고 장송곡을 읊조리지만, 외려 새로운 부흥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을 읽는 내내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새로운 시인과 눈빛을 나누며 맞절하는 일은 가슴 벅찬 일이다. 부족한 홍보에도 241명이 987편의 시를 응모했다.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선자들이 주목한 시는 김식씨의 <명랑한 그림>외 4편, 이명선씨의 <그린 토마토>외 2편, 정율리씨의 <맹수>외 4편이었다. 김식씨의 시는 전체적으로 신선했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물방울처럼 새로운 이미지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딱히 한 작품을 선할 수가 없었다. 몇 번 읽다보니 사막을 걷듯 밋밋했다. 신선한 언어와 새로운 기법도 도식성에 빠질 수가 있구나. 경계하기 바란다. 손발을 삶의 바닥에 밀착시켜보는 어떨까? 아쉬움이 남았다.
이명선씨의 작품도 신선도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작품마다의 편차가 많았다. 독자를 미로로 끌고 가다가 작가가 외려 독자의 후미로 밀려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독자의 출구와 작가의 출구가 똑같을 필요는 없지만 행간에 간혹 친절한 안내도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랜 논의 끝에 정율리씨를 당선자로 뽑았다. 정율리씨의 작품은 모두 고른 수준이었다. 존재에 대한 깊은 해석과 중층적 사고 등은 다른 이의 작품보다 월등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가 휘발되는 시인을 많이 보아온 터라서 시인의 길을 오래 걸어갈 진중한 발걸음에 박수를 보내기로 했다. 분명 좋은 시인이 되리라. 선에 밀려난 다른 시인들의 아쉬움을 대신해서라도 각고의 길을 걸어가길 당부한다. 우리는 모두, 나이보다 작품이 일찍 늙는 일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당선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자리에 호명하지 않았어도 이미 좋은 시인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신작시를 쓰리라. 시는 또렷하게 작가를 응시한다. 서로 눈길 피하지 말자.
나태주·이정록 시인
[2016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팥죽 / 이은주
매월 달의 소유 기간은 멀면서 가깝다
쟁반에 빚어놓은 옹심이
달이 되려면 뜨거운 솥 안에서 익어야 한다
반은 떠있고 반은 잠긴 달들
팥물을 빨아들여서 잔뜩 부풀어 있다
오늘 뜬 달엔 팥죽이 묻어 있다
붉은 저녁이 걸쭉하게 담긴 그릇마다
몇 개의 잘 익은 달이 떠있다
그릇마다 달빛이 새어 나온다
그릇 하나를 밝히는 달빛,
하마터면 달빛을 엎지를 뻔 했다
예전에는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많이 떴었다
죽보다 달을 먼저 뜨셨다
만월이 씹히지도 않고 몰락한다
달이 하나 씩 줄어 들 때 마다 어두워졌지만
오늘은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그대로 떠있다
어디로 가는 길을 비추려고
죽 그릇에 달 하나를 남겨 두었을까
달 하나를 남기는 식량
누군가에게는 달이 되고 부적이 되는 애기동지
보름으로 갈수록 살이 오른다
동짓날 밤 수십 년째 비어있는 어머니의 밤을 열어 보면
그릇하나를 밝히는 얼음으로 빚은 달이 무수히 떠있다
해마다 오는 긴 밤을 비춰줄 달을 꺼내 놓으시는 걸까
그런 밤이어서 달이 익어 가는 걸까
저 달이 잘 익으면 드시기 좋겠다
청상은 불구의 밤을 부적으로 쓰는 달
저 달들을 골목마다 내걸고 싶다
[시 심사평]세밀한 시적 구성, 신뢰와 온기 전해져
여전히 젊은 시를 대할 때는 가슴이 뛴다. 가슴에 달이 뜨게 하는 것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함을 건네는 것도 시 한 줄의 힘이다.
단 한 편의 당선작밖에 내지 않는데도 신춘지대를 통과하고 싶은 가슴이 아직도 여전한 시대라는 점은 즐거운 고통이다. 더구나 한라일보 신춘문예는 그 지정학적 위치부터 얼마나 매력적인가. 응모작들에서는 그러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광활한 시의 숲을 헤쳐 나오면서 어디에 이러한 예비시인들이 숨어 있었던가. 고투의 흔적들을 함께 느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응모한 이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몇 가지는 짚고 가자. 신춘의 경향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작품들, 대체로는 산문시가 적지 않았다. 리듬감을 무시하거나, 현란하고 모호한 언어의 기교로 내면의 고백에 치중하고 있는 것도 거슬렸다. 간혹 내용이 허술한 경우, 정작 시가 지녀야 할 응축과 긴장성 등의 요소를 담보하지 못하거나, 내용이 있어도 감정의 과잉, 단순 발상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었다. 좋은 시는 시인의 내면과 외피를 아우르는 치열한 과정에서 탄생하지 않는가. 과연 그런 작품을 찾을 수 있을까.
당선작 '팥죽'에 이르러서 심사위원들은 망설이지 않아도 되었다. 옹심이, 그 달의 이미지를 통한 어머니의 기억은 섬세하면서도 가볍지 않았다. 탄탄한 시적 구성으로 잔잔하게 직조된 그 속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신춘의 성격처럼 신선함, 치밀함, 신뢰할 만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믿어도 좋았다. 확장된 시세계를 보이고 있는 '임관의 숲' 등 다른 경향의 세 편 역시 내공이 엿보였다.
당선작 외에 최종심까지 올라 논의된 작품들은 '망모'(홍성남) 등 네 편. '망모'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으로, 오래도록 정진해오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미지의 조율과 사유의 깊이 또한 엿보였으나 평면적이고 치밀함에서 조금 미흡했다. 산문시 '따뜻한 숲'(강동완), '꽃의 잠복'(이윤주)은 기교는 탁월했으나 상징과 이미지가 지나쳤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자신만의 언어의 집을 지으며 정진하고 있는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에게는 오늘이 또 다른 시작의 관문이 되길 기원한다. 그리고 오늘 이 신춘의 첫 아침, 잠시나마 이 한 그릇 팥죽의 온기가, 달이 독자들에게 전해지기를!
문학평론가 김병택, 시인 허영선
[제22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정자나무를 품다 / 염병기
내 고향
동구 밖
수백 살 나이에 지난 세월 움켜쥔 늙은 정자나무는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다
고향 길에
어김없이 지나야 하는 그 곳은
돌담 길에 호박 엮이듯
어릴 적 추억들도 걸려 있다
옹기종기 모여 동네의 쉼터로
부초처럼 동네를 돌아다니는 이야기
풍문으로 떠돌던 이끼 낀 세월의 얘기도 묻혀 있고
저마다 자신만의 사연으로 바라본다
만만치 않은 세상, 삶이 고달플 때
의연함으로 시절을 버틴 정자나무는
살아온 날에 대한 다독임
살아갈 날에 대한 묵묵함으로 속마음을 대신한다
한 움큼씩 안고 사는 시린 사연도
송두리째 흔들렸던 삶의 모습에도
지나온 세파에 견딘 세월의 약(藥)으로
그 앞에서면 살포시 봄눈 녹듯 치유가 된다
고향 정자나무에서 느끼는 바람결
한 자락 쓸어 담아 가슴에 품는다
말 없는 살랑거림은 존재 의미를 더 하고
굳건함은 의지에 다시 일어나 시작할 마음을 부추긴다
시 부문 심사평 / 자기숨결의 정체성 찾기 능력 돋보여
이번 신인문학상 공모에 응모한 작품(472편)을 읽고 대부분의 시작들이 다양하고 나름대로의 개성과 새롭고 탄탄한 시세계가 엿보이기도 하였으나 아직도 신인문학상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룬 작품으로는 전효정의 ‘골목의 어둠’과, 김회권의 ‘엎어진 개밥그릇’과, 허은규의 ‘삼거리 청정횟집 감성돔의 푸른 눈’, 그리고 염병기의 ‘정자나무를 품다’란 작품이다.
전효정은‘골목의 어둠’이란 작품에서 밤의 골목은 저만의 어둠과, 낡은 시멘트벽엔 덕지덕지 광고지가 회색빛으로 물든 골목과 화자, 백열등의 불빛과 밤벌레의 유혹, 그 어둠이, 옹크린 골목에 백열등을 통해서 또 다른 희망이란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다.
김회권의 ‘엎어진 개밥그릇’은 토방 아래 달싹 엎어진 개밥그릇을 백구 한 마리가 반나절 넘게 자기의 밥그릇을 일으켜 세우려고 입으로 물고 제쳐도 뒤집어지지 않는 막사발을 일으켜 보았자 뜨거운 공기만 고봉으로 담겨져 있을 터인데 자기 밥그릇을 위한 발버둥치기행동에서 산 생명의 존재적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허은규의 ‘삼거리 청정횟집 감성돔의 푸른 눈’이란 작품은 철갑고래와 흰 얼굴들이 등 무늬로 번지는 고향 닮은 바다에 백합조개, 난파선을 들락거리는 해마, 강장동물의 촉수로 그려지는 해협과 청정횟집 감성돔의 푸른 눈을 통해서 저들의 무리와 헤엄치고 싶은 충동을 애증의 모습으로 그려내는 솜씨가 엿보인다.
염병기의 ‘정자나무를 품다’란 작품은 고향 길에 지나는 동구 밖의 정자나무는 마음의 고향으로 믿음의 그늘로 그리움의 터전으로 존재한다. 부모와의 삶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곳이란 걸 일깨우고 그 앞에 서면 세파에 견딘 세월의 약으로 한 자락 쓸어 담아 가슴에 품게 한다. 뿐만 아니라 다시일어나 시작할 용기와 힘을 주는 존재로 의미가 강한 사유의 깊이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도구적인 목적시나 관념적인 산문시가 난무하는 세태에 자기숨결의 정체성 찾기의 능력이 돋보인다. 염병기의 ‘정자나무를 품다’를 당선작으로 밀며 사물과 사유를 절제된 시로 갈고 닦는 작업에 힘써 건실한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 정연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