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이야기
백운산 기슭에서 조그만 농원을 가꾸면서 꽃과나무를 사랑하는 친구인 B교장이 찔레꽃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어린시절 시골에 살때는 산 기슭이나 시냇가 언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지만 요즘은 찔레꽃은 보기드문 추억의 꽃이 되었습니다.
간식거리도 없었던 어린시절 시골의 어린이들에게 봄이면 가장먼저 맛볼 수 있는 간식거리가 찔레순이었습니다. 젓가락만큼이나 통통하게 자란 찔레순을 꺾어서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먹으면 약간 달착지근하고 상큼함 맛이 요즈음 아이들의 아이스크림 먹는 맛보다 더 시원했을 것입니다.
찔레꽃을 볼 때마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잊지못할 추억이 있습니다. 70년대에 백운산 기슭에 있는 동곡분교장에서 7년간을 근무했었는데 학교뒤로는 커다란 폭포가 떨어지는 용쏘가 있었고 산속에 그림처럼 자리한 학교에 하얀 찔레꽃처럼 맑고 순수한 예쁜어린이들이 다니는 동화속의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학교였습니다.
본교에 가려면 산길을 십리나 걸어서 내려가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습니다. 버스를 타려면 버스출발시간 한시간전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본교나 교육청에 가려면 이것저것 챙겨야 할 준비물도 있고 해서 준비를 하다보면 때로는 버스출발 50분전 때로는 40분전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반은 걷고 반은 달리다시피해서 겨우 차시간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차시간에 맞추기위해서 산길을 달려내려갈 때면 “아하! 옛날 도인들이 썼다는 축지법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별게아니다. 이게 바로 축지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내려갈 때는 축지법을 써서 어떻게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한시간 가야 할 거리를 50분,40분에 내려갔지만 올라올 때는 한시간 거리를 걸어올아가야 하는데 건너뛰는 축지법도 안통하고 꽤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처럼 찔레꽃이 필 무렵이면 시내를 따라 올라가는 길가나 시내기슭에 찔레나무가 많아서 하얀 꽃들도 예쁘지만 그윽한 질레향기가 꼴짜기에 가득해서 산길을 걷는 피곤함을 가시게 해 주었습니다.그 골짜기를 떠나왔어도 해마다 찔레꽃 피는 계절이면 시냇가언덕을 하얗게 뒤덮었던 찔레꽃과 향긋한 향기를 잊을수가 없습니다. 그 때 그 찔레꽃은 지금도 피고 있겠지만 찔레껓처럼 예쁘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나처럼 함께 늙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5월도 저물어가는 30일 일요일에 한달만에 고향에 있는 농원엘 갔습니다. 내가 농원에가면 맨먼저 들리는 곳이 동쪽 귀퉁이에 있는 조그만 연못입니다. ‘금붕어들은 잘 있는가? 얼마나 자랐는가? 한달동안이나 먹이를 안주었으니 죽지는 않았을까?’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농원을 처음 시작할 때 꽃과 나무뿐만 아니라 염소나 닭이나 개같은 동물도 길러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사람이 늘 붙어있어 끼니때마다 밥도 챙겨주어야 하는데 나처럼여행을 좋아해서 며칠씩 때로는 해외여행을 나갈때는 한달간씩 집을 빙는 일도 있기 때문에 동물들은 기르지않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금붕어는 물만 있으면 먹이를 안주어도 물속에서 생기는 미생물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먹이를 안주어도 한두달은 살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려고 연못으로 가니 갑자기 새들이 몇마리 나타나서 발악을 하면서 내게로 달려들었습니다. 정면으로는 오지않고 뒤쪽으로 와서 머리를 공격하는지 모자를 쓴 머리쪽에 충격을 가해왔습니다. 발이나 주둥이로 쪼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잔디밭에 앉은 아내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니 그냥 날개를 부디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농원을 찾아오니 主客이 顚到되어 남의 농원에 와서 사는 새들이 주인을 몰라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10년 이상 농원생활을 하지만 새에게 공격을 받아보기는 처음 이었습니다. 비둘기 보다는 좀 작고 참새보다는 큰 새인데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가끔 무화과나 감이 익을 무렵에 나무에 달라붙어 과일을 훔쳐먹는 새인 것 같았습니다.
얼마전 모 스님이 쓴 글이 생각났습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환절기에는 비가 많이 오는데 또 환절기에는 산새들이 알에서 깨어나는 시기라서 비가 내리면 알에서 갖깨어난 아기새가 엄마새를 기다리다 땅에 떨어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공격했던 새들도 연못가의 왕대나무에다 집을 짓고 새끼를 기르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니 새끼를 보호하기위해 자기집 근처에 오지못하도록 경고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그 스님이 쓴 글에서 보면 사람들은 집을 지으면 백년쯤 지나도 끄덕 없는 경고한 집을 짓는데 새들은 기껏해야 일년 살고 버릴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전한 자리를 찾아 경고하게 집을 짓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것이아니라 자기집근처에 오지말라고 땅주인에게 경고하는 버릇없는 새인셈입니다. 아무튼 사람이나 짐승이나 새들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식을 보호하기위한 본능은 위대하다고 생각됩니다.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함께 들어간 친구들은 남자7명 여자2명 9명이었습니다. 9명중 나만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우리집이 특별이 부자집도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집이나 우리집이나 농사는 다 비슷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어머님의 교육열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자식을 교육시키기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내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었던 것은 어머님의 신념과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설날 ,대보름날, 백중날, 추석날 등 명절이 많았습니다. 명절이나 생일때는 밥상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어머님께서는 맨먼저 기도부터 드렸습니다.새벽 일찍 아랫목에 상을 차려놓고 어머님께서는 두손을 싹싹 비비면서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무슨 기도를 드릴까 하고 항상 궁금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초등학교 5학년때인가 어머님의 기도가 긑난뒤 ‘무슨 내용을 빌었냐?’고 그랬더니 어머님께서는 “우리 아들,군수나 도지사가 될 수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고 대답을 하셨습니다.그 때부터 나는 도지사나 군수가 되어야하지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의 염원대로 군수나 도지사는 못되었지만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고 또 교감,교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의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오늘은 어제 사용한 말의 결실이고 내일은 오늘 사용한 말의 열매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한말의 95%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말은 뇌세포를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 듯 말의 파장이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합니다. 김영삼대통령이 책상앞에다‘미래의 대통령김영삼‘이라고 써놓고 공부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흡인력이 있고 파장이 있다는데 자식을 위한 어머님의 절실한 기도는 얼마나 큰 힘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어머님의 기도 때문에 내가 교사도 뙤고 교장도 되었다는
것을 확신 하지만 그런 것을 깨달았을 때는 부모님은 이미 옆에 계시지않습니다.끝없는 회한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찔레꽃의 꽃말은 온화, 우애,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입니다.가정의 달 오월, 노천명 시인이‘계절의 여왕’이라고 노래했던 오월도 회한속에 지나가고 신록의 계절인 유월이 왔습니다.
유월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푸르른 신록처럼 님의 가정에도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유월의 첫날 석 송 정 절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