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스님이 “책 읽지 마라” 했다지요? 남의 말 하는 것은 기피하고 있으나 인용 정도는 괜찮겠지요. 스님이 한 말이니, 불교의 깨달음과 독서의 관계를 이야기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제자나 신도들로부터 책을 읽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질문을 받았을 수도 있고, 본인이 책을 많이 읽어보니 아무 쓰잘데 없더라는 자기반상적 고백일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에게도 같은 질문이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의외로 수상자들의 답변 중에는 스님의 답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입니다. “항상 의심하라, 책 읽지 마라, 숙제하지 마라”고 답한 수상자도 더러 있다는 것을 보면요. 이걸 또 창의성이 중요하다면서 무슨 교육법이니 무슨 학습법이니 해가면서 돈벌이 기회로 삼던데요. 한 차례 법석을 떨고 나면 헤겔의 변증법도 아닌 것이 이번엔 또 180도 다른 비법이 판을 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창의성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지 마라고 했다가 다시 아니다 책을 많이 읽어야 된다고 합니다. 조금 더 지나면 독서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 중요하다라고 하면서 정반합을 찾아가겠지요. 또 조금 지나면 질적 변화는 양의 축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개념을 갖고 이야기 할거고..... 그리고 똑같지는 않지만 다르지도 않은 논리들로 갑론을박을 이어 갈 겁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독서에 대한 이야기이니 구도 과정에서의 독서는 다르다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다. 창의력 계발과 깨달음이 동일시 될 수 있느냐 라는 주제도 생각해 볼 만한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깨달음 만큼 창의적인 활동이 어디 있느냐는 견해를 지니고 있으니 자연스레 그렇게 연결이 되었습니다. 각자 한번씩 생각들 해 보시구요.
앞서 어떻게 수행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일단은 가만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지도를 볼 때 처럼 자기 위치부터 파악하라는 주문을 하고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보라’는 지침에는 ‘책 읽지 마라’도 포함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제 답은? ‘책을 읽지 마라’가 되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제가 독서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렇게 답을 할까요? 아닙니다. 읽고 싶으면 읽고 읽기 싫으면 읽지 말라고 합니다. 별 상관 없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극단을 좋아합니다. 짧은 이 생을 살아본 경험치로 따져 보니, 타인들보다 비교우위를 가지는 영역이 보인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글공부이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실참인 거겠지요. 그러니 자기가 잘 하는 것을 수단으로 목적지에 빠르게 도달해 보고 싶다는 속뜻이 숨겨져 있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잘 성찰해 보십시오. ‘책 읽지 마라’고 하면 평생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경전을 비롯하여 그 어떠한 글도 읽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반대로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면 지금까지 나와 있는 모든 전문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전만이라도 소화 가능하게 읽어낼 수 있겠습니까? 특히나 후자의 경우에는 번역의 문제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빠알리어를 한글로 직접 번역한 니까야가 국내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번역에 대해서도 전문가(불교학 박사)들 사이에 이견이 많습니다. 지엽적이고 특수한 영역에 대한 것이라면 대세의 영향이 없으니 읽고 받아들이면 되겠지만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불교 교리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개념에서부터도 의견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불경이라는 것이 부처님 말씀을 정확히 그대로 전달함을 보장하지 않는 겁니다.
책을 불경과 동일시해서 그 범위를 좁혀 놓아도 이러한데, 책을 불교 뿐 아니라 인류 지성의 보고로서 보다 넓게 그 범위를 정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 집니다. 불경을 줄줄 꿰고 있어도 첨단 과학과 역사, 철학, 문학 등 전범위에 걸친 지식에 능통하며 그것을 하나로 엮을 수 없다면 부처의 ‘전지’라고 할 수 없다는 의견도 존재하는 걸로 압니다. 한마디로 우주론 등의 물리학으로 노벨상 정도는 수상해야 부처의 경지에 비벼볼 수나 있다는 의미 같은데요. AI가 아니고서야 현대의 방대한 지식을 한 사람이 섭렵하여 하나로 엮는다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일 뿐 아니라, 2500여년 전 싯다르타 왕자는 현대에 통용되는 지식체계에 무지했음에도 어떻게 깨달음을 선언할 수 있었는가 라는 의문도 남습니다. 머리가 나빠 경전의 한 구절도 기억할 수 없어 눈물을 흘렸던 바보 스님 주리반특가 스님도 아라한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뭐 부처님 재세시에 맞추어 태어난 그 분의 홍복이라고 해 둡시다.
이쯤 되면 뭘 어쩌라는 말이냐란 푸념이 절로 올라 옵니다. 책을 읽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답은 해놓았습니다. 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십시오~ ㅎㅎㅎㅎㅎㅎ 궁금하면 읽고 안 궁금하면 안 읽으면 됩니다. 불교의 깨달음이 목표라면 당연히 불경을 읽어 보는 것이 이득일 겁니다. 아무런 재료도 없이 불교의 깨달음이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리라는 망상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바둑을 두고자 한다면 바둑의 룰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거기다 고수의 기보까지 공부한다면 보다 빠르게 바둑 실력을 늘릴 수 있겠지요. 요즘은 바둑 고수의 역할을 AI가 한다지요? 불교도 AI를 도입한다면 교리 분야에서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을 텐데...... 기득권의 방해만 없다면 기술적으로는 어렵지 않게 도입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글로 남아 있으니 그 자료들을 이관시키고, 역대 선사들의 선어록도 추가하고, 티벳 불교, 밀교, 불교의 역사와 전파 과정 등 모든 불교 관련 자료들을 다 쏟아부은 다음 ‘진리를 찾아라’ 한 줄 명령 후 ‘엔터’ 치면 몇 분 안에 불설/비불설 구분해 줄 테고, 화엄경에 기반하여 역대 스님들의 경지 또한 1지부터 10지까지 엑셀로 정리해서 프린트까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어라? 그럼 우리가 지금 불경을 읽을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을 공부해서 AI를 개발하는 데에 전력을 쏟아야 하는 건가? ㅋㅋㅋㅋㅋㅋ
러프하게 표현하다 보니 독서와 깨달음의 관계에 대한 서술로 보입니다만, 사실 이것은 교학과 실참이라는 불교계의 오랜 주제 입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의천의 ‘교관겸수’, 지눌의 ‘정혜쌍수’가 이 이야기 입니다. 두 분 다 경전공부와 실참공부를 같이 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신 거고요. 경전공부를 중시해야 하는냐 실참공부를 중시해야 하느냐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 것으로, 의천 스님은 교학을 중심으로 수행을 지눌 스님은 수행 중심으로 교학을 아우르는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두 스님 모두 고려시대 사람인 것을 감안하면 그 당시 불교계에 교학으로 치우치는 세력과 수행으로만 점철하는 세력 간의 논쟁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신라 상대에서 중대에 이르는 시기까지는 귀족 계층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교학 위주의 불교가 융성했을 것이고, 이로 인한 불만과 사회 신흥 계층의 계산과 맞물려 신라 하대에는 수행을 위주로 한 선종이 일어나게 되었을 겁니다. 의천과 지눌로 대표되는 고려 불교는 신라 시대의 불교의 변천과 갈등을 조화시키기 위해 ‘겸수’와 ‘쌍수’라는 말로 ‘함께 닦음’을 강조한 것으로 봅니다. 조선을 거쳐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새벽’이라는 놈이 ‘교학을 하든지 말든지 실참을 하든지 말든지 꼴리는 대로 해라~ 단, 지금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면서!’라고 지껄이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교학이냐? 수행이냐?를 논하는 시대에는 글공부를 하고 싶어도 책이 없었고 책이 있어도 까막눈이 많았습니다. 수행이야 지금이나 그 때나 눈 밝은 스승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였으니 마찬가지 입니다만, 교학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인터넷 서핑 반나절 해서 얻을 수 있는 불교 교학의 양이 그 시대에 접근 가능하던 모든 도서의 양을 압도합니다. 바른 교리를 공부하고 싶어도 방도가 없어 “교학 없이 수행만 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의 무게와 글공부는 하기 싫고 그나마 남들보다 실참이 나은 것 같아서 하는 “교학 없이 수행만 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의 무게는 같지가 않습니다. 교학 공부를 한다고 모두가 불교학 박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불교학과 불교는 같은 것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나는 불교학을 하는가? 불교를 하는가? 불교학을 하면 학위를 얻고, 불교를 하면? ㅋㅋㅋㅋㅋㅋ
극단을 놓으십시오. 우리네는 습관적으로 극단으로 기웁니다. 책을 읽을까? 말까? 라는 질문도 습관적인 극단 추구 입니다. 읽으면서도 읽지 않는 경계가 있고 안 읽으면서도 읽는 경계 또한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읽고 안 읽고’가 아니라 그 질문이 나오게 되는 상황, 나아가 원인과 조건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는 것임을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극단과 반대는 ‘중’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중도(=팔정도)는 총력전 입니다. 어느 하나 피해 가려 하지 마십시오. 마라 빠삐만이 그리 만만해 보이십니까? ㅋㅋㅋㅋㅋㅋㅋ 삼계를 놓고 빠삐만과 벌이는 전쟁에서 총력전을 준비하지 않고 어쩌시려고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첫댓글 부처님 가르침을 다른말로 감로법(甘露法) 이라고 합니다.
목마른 사람은 어디든 파게 되어있습니다. 교학 파다가 안되면 정학파고 정학 파다가 안되면 교학 팝니다.
아마 사막도 삽질해서 팔겁니다^^ㅎㅎ
사리불존자는 아싸지존자의 맑은감관과 거룩한 위의로 탁발하는 모습에 따라가 단 한마디 법을 전해듣고 그 우직하신 분이 짐싸들고 목건련 존자와 함께 산자야를 떠나 부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저도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아싸지 존자 같은 위의가 있어야 되는데..... 술 먹고 고기 먹고 욕지거리를 아무데나 내뱉고.... ㅎㅎㅎㅎㅎㅎㅎ 부처님 뵐 낯짝이 없네요... ㅎㅎㅎㅎㅎㅎㅎ
@새벽 삽질 잘하는 사람이 늘어난 실력이 뭐겠습니까~ㅋㅋ
매의눈 입니다^^ 귀신같이 찾아냅니다^^ㅋㅋ
극단(極端): 고행과 쾌락이라는 극단,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의 유무 극단, 단견과 상견의 극단, 육신과 정신을 같다고 보는 극단, 육신과 정신을 다르다고 보는 극단, 교학이 맞다는 극단, 정학이 맞다는 극단. 이 견해들은 모두 우리 중생들이 걷고있는 양극단의 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여러 사상가들이 내세운 견해기도 하고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나타내는 견해기도 합니다. 여기서 얼핏 겸손해 보이기도 하는 견해가 등장합니다~사리불존자와 목견련 존자가 스승으로 모셨던 산자야는 양극단에 유보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회의론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부처님 께서 말씀하십니다~
"니놈들 견해가 제일 나쁜 극단적인 견해여!!!" 라고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당시에 설파하셨습니다.당시에 사상들 중에서 가장 혹독한 비판을 하시는데 그럴바에는 차라리 유무극단이나 단상극단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설하신게 '중(中)'입니다.
그야 말로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하는 일이거든요.
이 '중' 이라는 것이요. 얼핏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답으로 내어놓아도 새벽님이 늘 주장하는 알고 말하면 "맞고" 모르고 말하는 것이면 답이 맞다고 하더라도 "틀리다" 거든요ㅠ
지가 본게 아니면 '틀리다' 가 불법 입니다.ㅠ
@사유수 우리 중생들이 걷고 있는 길이 '극단' 입니다.
그리고 그 극단은 '무명' 입니다.
제 말이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사유수 계율에도 극단이 들어가면 '계금취견'이 됩니다.
계율의본질을 한참 벗어나는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