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사실 열심히 공부하고 땀 흘려 일하는 이유도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비젼을 성취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며 크게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준비하고 수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개인을 보았을 때 땀 흘려 일하는 것도 행복을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일까요? 많은 물질을 벌어서 재물을 모으면 참된 행복이 있을지? 아니면 좋은 직장에 안정된 직업생활이 행복을 줄지? 아니면 행복은 마음으로 시작하는지? 이 잠언서는 인생에 지혜를 줍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가장 현명한 왕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복을 받아 물질도 왕궁에 황금이 흔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고 최고의 권력을 진 자였습니다. 그가 남긴 지혜의 잠언 중에 오늘은 참된 행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한다.
잠언서 15:13 말씀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모든 것이 마음이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져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얼굴에 표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 얼굴에 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배가 아플 때, 위장이 아플 때, 정말 음식을 잘 못 먹어서 배가 아플 때도 있습니다. 또한 위에 병이 생겨도 아프겠죠. 그런데 많은 경우 신경을 심하게 쓰면 위장병이 걸립니다. 그것은 마음에 걱정을 하니까 위장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됩니다.
우리 몸은 신경으로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신경은 머리에서 시작하여 몸 안에 연결되어 손끝이나 발끝까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거나 의도를 가질 때 신경이 근육을 움직여서 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육체가 연결되는 중간 역할이 신경이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과 육체는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우면 몸도 가볍고 건강합니다. 물론 마음이 원치 안 해도 육체에 병이 들면 아플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건강과도 연관됩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이 즐거우면 행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갈 5:22~23절 말씀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주의 영이 계셔서 희락 즉 즐거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평 즉 평안을 주십니다. 즉 영혼의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환경에 따라 바뀝니다. 좋은 상황이 되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면 즐겁습니다. 직원이 월급을 많이 받으면 기쁩니다. 부모로서 자녀가 잘 되면 기쁩니다. 그 모든 것은 환경에 따라 즐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환경과 관계없이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평안과 즐거움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빛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즐거움으로 가득차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우리가 물질을 많이 가져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이 잘 되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족의 상황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성령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심지어 환경이 어려워도 성령의 주시는 기쁨과 평안은 여전히 변하지 않으며 더 큰 기쁨을 주십니다. 아멘 13절에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어떤 어려움이 생기고 가정에서 또 걱정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사람들은 염려하고 걱정하여 심령이 상하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성경예화) 감옥에서 찬양하는 바울과 실라
우리는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 주님의 성령이 주시는 흔들리지 않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 성에서 전도하다가 귀신들인 여인을 고쳐주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아시아의 여신을 공경하는 신상의 물건들을 만들어 파는데 손해가 될 것 같으니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고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나 환경이나 여건이 그 정도 되면 슬퍼하고 걱정하고 두려울 것이 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셨는데 지진이 나서 옥문이 다 부셔지고 감옥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간수를 전도하고 간수의 가족까지 다 복음화 하게 됩니다. 그 다음날 관리들로부터 환송을 받으며 그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아멘 환경과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성령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주를 위해 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아멘
둘째, 가산이 적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16절 말씀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살다가 보면 때로는 물질로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예화) 이집트 콥틱 교회
이집트에 가면 아직도 콥틱교회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이집트에는 오래전부터 교회가 생겨서 지금까지 복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슬람 지배하에서도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슬람 지배하에 있을 때 많은 회유를 받았습니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세금도 면제해주고 많은 혜택이 있다고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3D 업종이라고 흔히 표현하는 그런 어려운 일들을 해왔습니다. 쓰레기 정리를 담당하는 일을 한다든지 그런 일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그들은 어찌 보면 천시 받고 지내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런 희생을 각오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앙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현실적으로 물질을 부요함을 추구하고 세상적 출세를 따라서 살았다면 그들의 신앙을 벌써 수백년 전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어려운 이슬람의 지배하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가산이 적어도 하나님 믿는 신앙을 선택했습니다. 아멘
아무리 부요하고 아무리 세상에서 출세를 해도 예수님을 안 믿고 구원도 못 받고 잘 살면 뭐합니까? 지옥에 가는 인생인데, 또 그 삶은 행복하겠습니까! 겉으로 아무리 화려한 삶이라 하더라도 주님 없이 사는 인생이 결코 그 영혼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창대하게 됩니다. 오늘날 세계 강대국은 대부분 기독교 국가입니다.
예화) 한상동 목사님과 한명동 목사님
한상동 한명동 목사님은 김해 출신입니다. 그들은 한씨 집안의 자손으로 당시 일제시 때 유교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집안에서 예수믿는다고 호적을 팔 것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호적을 파도 좋으니 예수 믿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가문에서 쫓겨나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 둘은 예수를 잘 믿고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은 일제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수년간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거창교회 담임이셨던 주남선 목사님과 약속하기를 혹시 하나님이 이 감옥에서 나가게 하시면 신사참배하지 않은 훌륭한 목사를 배출하는 신학교를 만들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1945년 8.15일 해방이 되어 출옥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상동 목사님, 주남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등이 세운 신학교가 고려신학교입니다. 동생 한명동 목사님은 해방후 부산 제일영도교회 담임으로 계시면서 SFC를 만들었습니다. 그 SFC 학생 선교단체가 오늘날 중고등부와 대학부로 전국에 있습니다. 그 한상동, 한명동 목사님의 자녀들이 창대하게 잘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가문에서 쫓겨났지만 그들이 위대한 일을 하셨으며 그 후손들이 창대하게 잘 되었습니다.
셋째,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17절 말씀에 [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원어에 보면 약간의 채소를 먹으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즉 ‘보통의 채소를 먹으며, 많은 것도 아닌 적당한 채소를 먹으며’라는 뜻입니다. 그저 평범하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살진 소를 먹는다는 것’은 잘 산다는 의미입니다. 부요하게 잘 살며 좋은 음식을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워낙 잘 살게 되어 보통의 서민들의 가끔은 소고기를 먹고 삽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일반 서민이 먹고 싶을 때 소고기 먹고 사른 민족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이 부자로 잘 사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부자이면서 서로 싸우며 사는 것보다 가난해도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더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잠언 21:9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집이 크고 좋은 집에 살며 아내와 다투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움막에서 살며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낫습니다. 행복이 주는 조건이 좋은 집이 주는 것보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잠언 21:19에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부부가 싸우며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행복의 시작입니다. 대부분 행복은 어디 있는가 물으면 가정이라 제일 먼저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이 왜 행복입니까? 나를 사랑해준 부모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 없기 끝없이 나를 사랑해준 부모님이 있기 때문에 가정이 행복한 것입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 없이 끝없이 사랑해주는 가족이 행복한 것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그 은혜를 이해하고 부모가 늙었을 때 잘 공경할 때 그 가정이 행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물질이 좀 부족해도 집이 좋은 집이 아니더라도 좋은 소고기 안 먹어도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살 때 행복한 것입니다.
20절 말씀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녀는 그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녀는 늘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서로 귀중히 여기고 사랑할 때 행복한 것입니다. 부부가 그렇습니다. 비록 물질이 부요하지 않더라도 진실로 서로 신뢰하고 서로 사랑할 때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은 마음이 우선입니다. 마음으로 서로 진실되고 충실해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 믿지 못 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어찌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물질도 부요하고 집도 좋은 집에서 그리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면 더 좋겠죠. 우리 젊은이들은 특별히 배우자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서로 진실되고 충실한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잠언 31:10에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만나겠는가? 현숙한 여인은 진주보다 더 귀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그런 아내를 만난다고 했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는가? 하나님을 진실로 공경하는 자가 그런 현숙하고 진실 된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그런 신실하고 끝까지 아내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나겠는가? 잠언 31:30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결국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제일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좋은 배우자를 허락해주십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이 귀한 가정을 이루게 하시며 참된 행복을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