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 안원숭(安元崇)의 문과 급제와 정당문학 역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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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Antares
게시글 본문내용
안원숭(安元崇)은 문과에 급제했고, 역임한 최고위 관직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다. 그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한 것은 현직에 있을 당시의 기록도 있지만, 그가 문과에 급제했다는 명문 기록은 고려시대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1480년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그의 급제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안원숭(安元崇)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을 지냈다는 기록
목은문고 제19권 / 비명(碑銘)
계림 부윤(雞林府尹) 시(諡) 문경공(文敬公) 안 선생(安先生)의 묘지명 병서(幷序)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문성공(文成公) 향(珦) 이후로 현달한 관원이 많이 배출되었다. 문성의 증손인 정당문학(政堂文學) 원숭(元崇)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1302~1357) 사후 22년 (1378)에 지었다.
안원숭(安元崇)이 1378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었다는 것은 목은 이색의 하 죽계 안씨 삼자등과시 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에도 나온다. 다만 해석상의 논란이 있어 여기의 정당공(政堂公)이 안원숭 아닌 그 부친 안목을 뜻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을 뿐이다.
태종실록에 나오는 안원숭의 장남 안원(安瑗)의 졸기(卒記)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1월 13일 경오 4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전 개성 유후 안원(安瑗)의 졸기(卒記)
전 개성 유후(開城留後) 안원(安瑗)이 졸(卒)하였다. 안원은 순흥(順興) 사람이고 예전 이름은 정(定)인데, 정당 문학(政堂文學) 안원숭(安元崇)의 아들이다. 홍무(洪武) 갑인(甲寅)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어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사람 됨이 온화하고 누그러지고 부지런하고 근신하고 용의(容儀)가 장엄하고 진중하여, 비록 창졸(倉卒)한 일을 당하여도 일찍이 질언(疾言) 거색(遽色)이 없었다. 병이 있으매, 자부(子婦)가 기도하기를 청하니, 말리며 말하기를, ‘천명이 있다.’ 하였다. 죽으니, 나이 66세였다. 조회를 3일 동안을 정지하고, 사제(賜祭)하고, 부의로 종이 1백 50권, 촉(燭) 10정(丁)을 주고, 시호(諡號)를 경질(景質)이라 하였다. 아들은 6인인데, 안종약(安從約)·안종례(安從禮)·안종의(安從義)·안종렴(安從廉)·안종신(安從信)·안종검(安從儉)이다.
이 졸기에서 안원숭(安元崇)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장남 안원(安瑗)은 초명이 안정(安定)이며 홍무(洪武) 갑인(甲寅)년 즉 1374년 급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록 원문에는 안원숭의 손자로 잘못되어 있으나 번역문에는 아들로 바로 잡았다.)
성석린(成石璘, 1338~1423) : 안원숭의 셋째 사위
독곡집 > 獨谷集行狀 > 行狀 > 獨谷先生行狀
......公娶 政堂文學安原崇女。生二子二女。......
景泰七年蒼龍丙子(1456) 六月日。姻孫嘉靖大夫平安道都觀察黜陟使金連枝。謹編。
안원숭(安元崇)의 문과 급제 기록
1530년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풍기군(豐基郡)의 인물에는 안원숭(安元崇)이 문과에 급제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고 나온다. 이것이 그가 문과에 급제했다는 명문 기록으로는 최초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480년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증보한 것으로, 많은 내용이 동국여지승람과 같다. 동국여지승람은 극히 일부만 전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증보한 부분은 "신증(新增)"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으므로 이 표시가 없는 내용은 대체로 1480년대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내용 그대로라고 보면 된다. 동국여지승람은 고려사가 편찬 완료된 1454년으로부터 불과 30년도 채 지나지 않아 편찬된 것이므로 고려사와 거의 같은 신뢰도를 가진 책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안원숭(安元崇)이 문과에 급제했다고 나오는 이상 그의 문과 급제는 사실임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사가(私家) 족보도 아닌 관찬 도서에 안원숭의 경력을 일부러 부풀려서 적을 이유는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豐基郡)
【인물】 고려 안유(安裕) 흥주(興州) 사람이다. 뒤의 이름(즉 안향(安珦))은 우리(조선(朝鮮)) 문종(文宗)의 휘(諱)에 저촉되므로 처음 이름을 쓴 것이다. 원종(元宗) 초에 과거에 급제했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좇아 원 나라에 갔는데, 원 나라의 승상(丞相)이 전지(傳旨)하기를, “너희 임금은 어찌하여 우리 공주(公主)와 가까이하지 않는가.”하였다. 유가 말하기를, “안방의 일이야 외신(外臣)이 알 수 없는 것이오. 오늘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니, 들을 가치가 없지 않겠소.” 하였다. 승상이 이로써 아뢰니, 황제(皇帝 원제(元帝))가 이르기를, “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먼 나라 사람으로 볼 것인가.”하고서 다시 묻지 아니하였다. 벼슬은 중찬(中贊)에까지 이르렀다. 학교(學校)가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고, 또 그의 노비[藏獲]를 들였다. 문장(文章)이 맑고 힘차서 볼 만했으며, 또 감식(鑒識)하는 안목이 있었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晦菴 주희(朱喜)) 선생의 화상을 걸어 두고 경모(景慕)하다가 드디어 회헌(晦軒)이라는 호(號)를 썼다. 충숙왕(忠肅王) 6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우기(安于器) 유(裕)의 아들이며 벼슬은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에 이르렀다. 안목(安牧) 우기(于器)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다. 안원숭(安元崇) 목(牧)의 아들이며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安元崇。牧之子。登第,官至政堂文學。) ..........
본조 안천보(安天保) 태종(太宗) 때의 사람이다. 벼슬은 영돈녕부사(領頓寧府事)에 이르렀다.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구(外舅)이다. 안원(安瑗) 원숭(元崇)의 아들이다. 벼슬은 유후(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안경공(安景恭) 종원(宗源)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으며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하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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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안향(安珦)부터 그 10대손 안정(安珽)까지 11대 연속으로 장남이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것이 한 가문에서 연속 급제한 역대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 이 중 안원숭(安元崇)만은 위에서 본대로 급제는 확실하나 급제연도가 미상이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방목에서 급제연도까지 정확히 밝혀진다. 이 11대 연속 장자(長子) 급제는 단순한 전승이 아니라 실제 기록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고령신씨도 11대 연속 급제했다고 전한다지만, 순흥안씨와 달리 당시 기록에서 급제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연속 11‧10‧9‧7대에 걸쳐 급제의 영광을 누린 가문들
순흥안씨(順興安氏)는 고려와 조선조에 11대 연속으로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월정집(月汀集)』 別集卷4, 漫錄, [만록(漫錄)]에 의하면 고령신씨(高靈申氏)와 광주이씨(廣州李氏)는 고려조와 조선조에 걸쳐서 각각 11대, 10대 연속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시대 문과로 보면, 여흥민씨(驪興閔氏) 가문은 1597년(선조 30) 민기(閔機)에서부터 1880년(고종 17) 민영일(閔泳一)까지 10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나주정씨(羅州丁氏) 가문은 1460년(세조 6) 정자급(丁子伋)이 평양별시에서 3등으로 문과에 등과한 이후, 1694년(숙종 20) 정도복(丁道復)이 별시에서 병과19등으로 등과할 때까지 무려 9대 234년에 걸쳐 대를 이어 문과에 합격하였다. 한편, 대구서씨(大丘徐氏) 가문도 연속 7대에 걸친 급제자를 내서 나주정씨에 버금가는 기록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