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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다.
대망의 마지막 편이다. 지금껏 항상 강조해왔지만, 이 시리즈는 지난 이야기들을 착실히 읽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 특히 17편 <배신의 계절>과 20편 <왕의 귀환>은 꼭 복습하기 바란다.
1
테무진은 아버지를 잃은 고아였다. 그는 지옥 같은 포로생활과 도망자 생활을 거쳤고 아내를 빼앗겼고 화살에 목이 꿰어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전쟁에서 몇 번의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노인이 다 된 나이에 불과 19명의 부하만 남아 흙탕물로 갈증을 푼 적도 있다. 테무진은 자무카라는, 더없이 뛰어난 친구이자 라이벌을 만나 반 평생에 걸쳐 생사를 넘나드는 대결을 펼쳐야 했다.
그토록 많은 절망과 실패, 불운을 겪고 결과적으로 성공한 인물은 테무진이 유일무이하다. 그 성공의 크기는 가늠키 어려울 정도로 폭발적이다.
테무진은 나이만 정벌에 성공하면서 초원을 제패했다. 남은 적들을 초원 밖으로 완전히 몰아냈다. 무엇보다 1205년, 자무카가 죽었다. 테무진은 자무카의 죽음을 만류했지만, 속사정이 어쨌든 자무카의 죽음은 초원을 통일하는 마지막 방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세계, 즉 초원 유일의 칸이 되었다. 이제 유일무이한 군주로 등극하는 일만 남았다.
물론 테무진 본인이 절대적인 칸으로 등극하겠다고 설치면 그건 꼴불견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입지전적인 정복군주는 절대자로 '추대' 되는 모양새를 띈다. 이 편이 보기 좋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합리적이다.
혼자 절대자의 위치에 올라가면 그건 그저 싸움 잘하는 도적과 다를 바가 없다. 무슨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도 아니고, 혼자 '내가 킹왕짱이야!' 하고 1인자의 자리에 덜커덕 앉아버리면 남은 백성들 입장은 뭐가 되는가. 죄다 싸움에 진 피정복민이 되는 거다. 추대를 받는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합의를 얻어냈다는 뜻이다. 어차피 승자가 오르는 자리라지만 형식 즉 '모양새' 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테무진은 부하들과 초원 백성들에 의해 초원의 절대적 칸으로 추대 되는 순간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물론 놀고 있지는 않았다. 테무진은 자신이 절대적 대칸으로 추대 되는 순간, 지상에 출현해본 적 없는 새로운 국가를 출범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선에 승리한 후 정식 취임할 때까지 국정을 구상하는 대통령 당선자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테무진의 마음은 그것보다 백 배는 더 진지하고 복잡했을 것이다. 아예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거였으니까...
테무진은 문맹이었고, 당시 주변국이었던 고려나 금나라, 탕구트 등의 기준으로 보면 야만인이었다. 당시에 존재한 어떤 문자로도, 제 이름도 쓰지 못한 노인네가 국가 체계를 만들어야 할 상황에 처한 것이다. 국가란 복잡한 체계로써,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형성되는 법이다. 테무진은 이걸 하루아침에 만들어야 했다. 아마 골머리 깨나 썩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 편에서 테무진이 고민한 결과를 확인해볼 수 있다.
2
'자기가 속한 세계' 를 통일한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중국인들은 예부터 중원의 패권을 놓고 싸울 때 '천하(天下)를 논한다' 고 표현한다. 천하는 사전적으로는 인간 세계 전체를 뜻하는 말이지만, 정치적인 의미는 한정적이다. 중국인에게 천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주변국 군주들에게 조공을 받아 외교가 안정되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이 천하엔 북방 유목민들, 서역이라 부르던 아랍 문화권은 빠져 있다.
비슷한 예로 전국시대 일본의 영주들에게 천하를 제패하는 것은 '교토로 가는 것' 이다. 일본인에게 천하통일이란 교토에 있는 천황을 보위하는 쇼군이 되는 것이지, 중국으로 진출해 새로운 중국 왕조를 창건하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려와 후백제, 신라가 경쟁한 우리나라의 후삼국시대를 보면, 당시 사람들도 '삼한(三韓) 통일' 즉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업을 당연시하고 있다. 삼한통일은 궁극의 목표이자 결국 도달하게 될 종착역이다. 누가 이루냐의 문제일 뿐... 여기엔 중국을 침략하자거나 일본에 진출하겠다거나 하는 사족이 없다. 그런 건 통일 후의 외교문제다. 우리 조상들에게 '자신이 속한 세계' 는 한반도였고, 따라서 천하통일이나 삼한통일이나 결국엔 같은 말이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중세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에도 비슷한 패턴이 있다. 유럽 군주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타이틀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다. 이미 서로마제국은 멸망했고 명목뿐인 황제 자리긴 했지만 말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본인이나 유럽인들이나, 황제가 서아시아나 북아프리카에 진출해 술탄이 되거나 동로마를 점령해 로마 통합 황제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설정은 하지 않고 살았다.
반면 유럽에서 쳐들어온 십자군에 맞선 살라딘(원래는 '살라후 앗 딘' 으로 부르는 게 맞다.)은 이슬람 세계를 통일함으로써 당시 아랍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십자군을 물리쳤던 것도 그가 자신이 속한 세계를 통일해 힘을 한 데 뭉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와 중세 사람들의 세계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리보다 특별히 넓지도 않았다. 인간의 사고방식엔 비슷한 데가 있다. 테무진이 초원을 통일한 것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궁극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얘기다. 저번 23편 '초원통일' 에 나온 것처럼, 자무카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이 테무진과 자신의 대결을 낭만적으로 표현한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에서부터 해가 지는 서쪽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에 나의 이름이 닿았다."
자신은 비록 패했을지언정, 세계 전체를 놓고 테무진과 싸워왔다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이 세계는 초원 유목민 세계다. 물론 자무카도 초원 바깥의 세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살았지만 그가 투쟁의 무대로 설정한 세계는 자신이 태어나고 활동한 초원이었다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테무진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속한 세계' 를 통일했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 끝까지 올라간 것이다.
3
우리는 1205년 겨울에서부터 1206년 봄에 이르기까지, 테무진의 심경을 상상해보도록 하자. 이제 곧 자신은 초원세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기스칸' 으로 추대될 예정이다. 물론 우리는 익히 알다시피, 테무진은 젊은 시절 한 줌의 세력을 모아놓고 칭기스칸으로 추대된 적은 있다. 흔히 1차 즉위라고 부르는 그 사건을 역사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의 테무진은 명목 뿐인 대칸이었으며, 실제로 '칭기스칸' 이 된 후 자무카에게 처절하게 패배했다.
테무진이 '진정한' 칭기스칸이 되는 건 1206년에 2차 즉위, 혹은 '진짜 즉위' 라고 부르는 사건을 통해서다. 1차 즉위가 순 뻥카였다는 건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테무진 본인은 물론, 심지어 그의 부하들까지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이름을 두 번씩이나 주고 받을 이유가 없다. 여하튼 이제 곧 테무진은 칭기스칸이 된다.
자, 그럼 테무진은 뭘 하려고 했을까. 우리는 테무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는 초원에서 평생 군사 집단을 이끌고 싸워왔다. 글을 배울 기회는 없었고, 나중에 배웠지만 재능이 없었는지 글을 깨치는 데 실패했다. 타고난 두뇌는 그저 평균치거나, 그 이하가 분명하다. 카리스마가 있었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테무진은 신체적 능력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고 좌중을 사로잡는 특별한 감각이 있지도 않았다. <몽골비사> 에서 테무진이 실제로 했다고 기록된 대사들은 모두 소박하며, 심지어 전투 직전에 하는 말도 그닥 뜨겁지 않다. 그저 상식적인 말뿐이다. 그에 반해 자무카는 전투 전 웅장한 웅변으로 군사들을 휘어잡았으며, 다른 상황에서 보여주는 표현력도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테무진은 투르크족, 위구르 족 등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평생 부대끼며 살았지만, 단 한 마디의 외국어도 구사하지 못했다. 특히 투르크어가 심각하다. 중세 몽골어와 중세 투르크어는 서로가 서로의 방언이다. 거칠게 말해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아무리 거리를 벌려줘도 서울말과 제주도 사투리 정도다. 그런데 투르크어 한마디 하지 못했으니 정말 언어능력이 저렴한 사람이다. 요즘 한국의 수험생이라면 아마 언어영역과 외국어영역 점수가 처참했을 것이다.
그럼 무쇠처럼 단단한 성품의 남자였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테무진은 부하들과 가족들 앞에서 자주 울었으며, 특히 여자들의 호통에 정신을 번쩍 차리기도 한다. 판단력이 뛰어난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전쟁에 지고 나서도 현실을 부정하고 우왕좌왕한 적도 있다. 사람을 끝까지 우직하게 믿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의심하고 화내다가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다른 사람들 앞에서 딱 걸려버리는, 그런 인간이다.
테무진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실패를 몇 번이나 경험했다. 불운하기로 치면 테무진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거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점에서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안 죽고 오래 산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세계 전체를 통일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크게 성공하는 게 가능할까? 사람들은 대체 뭘 믿고 그를 우직하게 믿고 따랐단 말인가?
그가 성공한 이유를 한 번 복기해 보자.
헐룬은 자기 자식인 테무진의 장점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운동에도 재능이 없고, 특별히 용감한 것도 아니다. 아이들의 최고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개를 무서워해 부모들이 신기해 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도대체 얘의 어디가 뛰어나다고 칭찬해야 하는 걸까? 헐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테무진은 가슴에 재능이 있다."
엄마로서 무척 노력했다는 게 보인다. 딱 집어 칭찬할 게 없으니, 저렇게 뭉뚱그린 거다. 하지만 역시 엄마는 엄마다. 자식을 엄마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저 말은 테무진이 지닌 소박한, 그러나 확고한 장점을 기가 막히게 표현하고 있다.
몽골인들은 사람의 영혼이 피에 있다고 믿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뇌가 몽골인들에겐 피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情), 즉 뜨겁거나 차가운 마음의 에너지는 간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중세 몽골어에는 '간이 있다' 는 표현이 있다. 마음의 에너지가 간에 가득 찼다는 뜻이다.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다정한 사람, 즉 정이 많은 사람. 둘째는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 한국어가 몽골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우리는 정주 농경문명의 후손이지만, 그보다 역사를 더 오래도록 타고 올라가면 우리말의 기본적인 관념은 유목민의 생활에서 나왔다. 우리말에도 '간이 크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는 표현이 있다. 겁이 없다는 뜻이다. 이 사례는 중세 몽골어와 다를 바가 없다.
한국어의 뿌리는 몽골어와 마찬가지로 유목민의 언어다. 기본적으로 문맹이고, 실용적이면서 물질적이다. 문자란 건 배워본 적도 없는 사냥꾼이자 목동이자 전사를 생각해보라. 형이상학적인 언어 개념에 도달할 방도가 없다. 이들이 인간의 영혼, 정신, 양심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이들은 허구한 날 인간의 신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짐승들을 도축하는 삶을 산다. 원시적인 해부학자들이다.
물론 인격을 장기에 대입하는 건 동서를 통틀어 보편적인 언어습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유목민들이 더 세부적일 수밖에 없다. 왜 우리말에서 멍청한 사람을 돌머리라고 하겠는가. 두개골이 단단하단 뜻이 아니다. 두개골은 가장 소중한 뇌를 보호하는 장치기 때문에 사실 단단할 수록 좋다. 돌머리는 단단한 뇌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 죽은 후 부드러운 뇌조직이 굳어 단단해지는 현상을 뜻한다. 돌머리는 '뇌가 이미 죽어 생각할 수 없는 상태' 를 이른다.
중세 몽골인들에게 영혼은 피에 있고, 마음의 에너지는 간에 있다. 생각하는 능력은 물론 머리에 있다. 자존심과 과단성은 쓸개에 있다. '쓸개 빠진 놈' 이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기인한다. (쓸개는 한자로 담(膽)인데, 용기를 뜻하는 '담력' 은 중국에서 유래했다. 순우리말과 인격의 위치가 다르다.)
그렇다면 심장엔 무엇이 있을까. 선과 악, 즉 양심이 있다. 우리말에 '염통에 털이 났다' 는 표현이 있다. 양심이 없다는 뜻이다. 중세 몽골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선과 악에 재능이 있다라... 이게 대체 뭘까. 아예 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중세 몽골 초원엔 '보편적 도덕률' 같은 철학적인 개념이 없었다. 다시 말해 지구상 어디에서도 해서는 안 되는 보편적 악이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실천해야 할 옳은 일 같은 건 없었다. 중세 몽골인들에게 도덕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이런저런 사람들과 관계 하면서 맺는 '약속' 이다. 몽골 전사들에게 다른 부족을 기습해 약탈하고 학살하는 건 죄가 아니었다. 나는 그 사람들과 아무 약속도 한 게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중세 초원의 도덕은 '조폭의 의리', '조폭의 도덕' 이었다.
'가슴에 재능이 있다' 는 헐룬의 말은 테무진이,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대하는 데 남다른 면모가 있다는 얘기다. 누구도 억울하게 하지 않고, 누구한테나 같은 원칙으로 대한다. 테무진은 공정하다는 뜻이다.
물론 테무진이 성공한 데에는 여러가지 인간적 요소가 있다. 잡초 같은 인내력, 어떻게든 될 거라는 낙천주의가 없었다면 테무진이라는 인간은 진작에 무너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공정함이야말로 그를 초원 유일의 대칸으로 만든 최대 요인이다. 왜냐하면 칸은 혼자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서 싸우는 군사 지도자는 없다. 사람들이 따라주어야 한다.
테무진만큼 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영웅은 역사에 전무후무하다. 어린 시절 타이치우드족에 붙잡혀 있을 땐 소르칸 시라 가족의 도움을 받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젤메는 테무진이 쥐뿔도 없던 시절에 군신의 의무를 다한다고 그의 가족에 와주었다. 말을 도둑맞았을 땐 처음 만난 보르추가 친구가 되어 그를 도왔다.
테무진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만 받은 게 아니다. 그는 고아이자 포로로서 신분계층의 바닥을 경험해봤다. 테무진은 제로에서 출발했으며, 따라서 신분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도 제로에서부터 파악했다. 테무진이 자신이 맺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철저하게 공평하고 공정했다. 그래서 철저한 '계약의 인간' 이 된다.
4
공정함. 그리고 약속.
테무진은 이 평생의 모토 - 기브 앤 테이크라는 단순하고도 확고한 원칙을 새로운 국가에 대입한다. 여기서 성장이 둔하기 이를 데 없는 대기만성형 영웅 테무진의 숨은 재능이 드러난다. 광대한 사고의 스케일과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테무진은 '국가와 개인' 의 관계를 새로이 그리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구축해냈다. 조폭의 의리가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사회정의' 로 점프했다고 보면 된다.
그 과정을 보자.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한다. 군사지도자가 된 테무진은 백성들의 충성과 납세의 대가를 공정하게 되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칼을 쥔 권력자의 당연한 권리가 아니었다. 테무진에게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의무였다. 그는 초원 사람들이 처음 경험해보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군주였다. 초원 대중은 바보가 아닌 한 테무진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의 공정함과 민심은 상호 관계를 가진다. 민심이 그와 함께 했다.
테무진은 자무카와 함께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테무진은 자무카의 무리를 떠나면서 '초보 칸' 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자무카 무리의 태반이 테무진에게 넘어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쥐뿔도 없는 테무진에게 말이다. 물론 테무진이 보여준 모습에 감동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건 테무진에게 자신들의 인생을 걸면서 권력을 쥐어준 행동이다.
테무진이 13익 전투에서 자무카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한 후, 외려 승자 쪽에서 패자에 넘어온 부족들이 있다. 이후 테무진에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충성한 오로이드족과 망구트족이다.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에서 대패했을 때도 오히려 자무카 쪽에서 귀순자가 넘어왔다. 불과 19명의 부하만 데리고 발주나 호숫가로 도망갔을 때는 '초스 차간' 이 이끄는 고롤라스족이, 부족 전체가 조건 없이 귀순했다. 나이만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는 옹구트족의 지도자 '알라쿠쉬 디긴 코리' 가 세가 약해 불리해 보이던 테무진을 선택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드라마틱한 순간은 20편 '왕의 귀환' 에서 이야기한 테무진의 재기전일 것이다. 단 19명만 데리고 초원에 다시 나타난 테무진을 위해, 불과 며칠만에 수만 명의 전사들이 아무 조건 없이 결집했다.
결과적으로 그만한 숫자가 모일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당시 테무진은 상식적으로는 패배가 확실한 전쟁을 선포했다. 수만 명의 전사들은 테무진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모여들었다. 테무진을 향한 초원의 민심은 죽음을 각오할 정도였던 것이다.
테무진은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자신의 사회를 구축했다. 그래서 사회 전체에 대해 책임 의식을 갖게 된다. 이는 '경험한 것을 잊지 않는' 소박하지만 확고한 장점 때문이기도 하다. 테무진의 머리 속에서 개인 사이의 계약은 개인과 사회의 계약으로 확장된다. 이는 백성들 개개인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사회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소정의 책임을 진다.
테무진은 근대적 사회계약의 원리로 국가를 건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회는 대체 어떤 사회일까?
당연히 더 이상의 갈등과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다. 테무진은 기본적으로 야심가가 아니다. 그는 빼앗긴 아내 보르테를 찾기 위해 무력행사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자신의 목적에 사람들을 동원한 이상 칸으로서 책임을 져야 했고, 결국 초원통일이라는 목표를 향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하게 됐다.
전통적인 야심가에게 자신이 속한 세계를 통일하려는 이유는 스스로 그 세계의 정점에 서기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반면 테무진은 야심을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삼았다. 의도하지 않게 폭력에 뛰어든 테무진의 목표는 '지배' 가 아니라 '폭력의 종식' 이었다.
그러니 이제 1인자가 되었고, 1인자로 살다 죽을 문제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칭기스칸' 등극이 초원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바람직한 결과가 되어야 한다. 이제 밑에서 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일단 우리는 테무진이 칭기스칸으로 등극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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