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개노래(069)-삶이 점점 이상해지다(180204연중5나)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욥 7,3-4).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
불어 에뜨랑제(étranger)나 이태리어 스뜨라니에로(stranièro)는 ‘이방인’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 바탕 뜻은 ‘이상한 녀석’ 또는 ‘외계인’이다.
‘외국인’도 되지만 내국인이면서도 ‘이상한 사람’을 일컫는다.
영어 니어 스트렌저(near-stranger)는 ‘가까이 있어 늘 봐도 거북하고 어색하고 낯선 사람’, 곧 ‘먼 당신’을 뜻한다.
모든 인생은 기간제다.
전세든, 월세든, 일세든, 시세든······.
길든 짧든, 자기주체성이나 자아를 운운하더라도 나의 생전이나 사후는 내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죽을까 봐 벌벌 떠는 그 알량한 몸뚱아리로 숨을 쉬는 동안만 인생의 주인, 아니 입주자 행세를 한다.
그래서였는지.
신리에 거지도 아니면서 거지 노릇을 하던 챙겨(한창규)가 있었다.
그는 깨달은 낭인처럼 한곳에 머물지 않고 양 소매에 손을 가로질러 끼고 늘 웃으며 서에 번쩍 동에 번쩍 대전리와 강개를 돌아다녔다.
이제 생각하니 그의 웃음과 행동에는 소월의 ‘낭인의 봄’ 노래가 배어 있었던 것 같다.
휘둘니 산을 넘고
굽어진 물을 건너
푸른 풀 붉은 꽃에
길 걷기 시름이여.
윤형중 신부님은 ‘사말의 노래’에서 취득시효가 지난 육체, 곧 ‘죽음’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미안백분 화장품 한끗뿌려서 예쁜모양 내려고 애도쓰더니
그얼굴에 구더기 들썩거리고 흐늘흐늘 썩음을 알기나하나
부드러운 비단만 입으려하고 입에맞는 음식만 골라먹더니
버러지의 양식을 예비해주려 그와같이 몹시도 안달을했나
아리따운 자태는 형용도없이 흥건하게 널속에 고여썩은것
화장품의 향내는 어디로가고 코찌르는 독취만 가득하구나
거울앞에 앉아서 꾸미던얼굴 구멍세개 뚜렷한 해골바가지
신식치장 다차려 모양내던몸 엉성한뼈 몇가락 이게네차지
소신학교 때 극작가 이서구 아우로 경향신문사 창설멤버인 소설가 이선구 선생님(당시 한국일보 논설고문)은 작문수업을 하며 ‘사말의 노래’를 읊다가 “죽음, 그 무서운 걸 어떻게 홀로 맞나?” 하며 몸서리 쳤다.
죽음에 대한 글을 지은 분이나 그 글을 보며 질겁한 분이나 다 죽었다.
올해로 윤형중(마태오, 1903-1979) 신부님은 40년째, 이선구(아우구스티노, 1914-1985) 선생님은 34년째 기년(忌年)을 맞는다.
물심양면으로 부유했고 자식을 잘 두었던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온몸이 고름이 흐르는 처지가 되었다.
처와 벗들은 그런 욥에 대해 이죽거리며 상처를 헤집고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의심하여 고춧가루를 뿌리고 와사비를 발라 싸매준다.
그리고는 모두 “사람 속 알 수 없다, 역겹다.” 하며 머리를 흔들면서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욥은 자기 고통의 무게를 저울로 달 때마다 다르고, 저울대 끝에서는 추가 곤두서버린다.
욥은 자신의 삶이 왜 갑자기 이상해졌는지, 왜 낯설기만 한지 어리둥절해졌다.
욥은 이제까지 누리던 것들에 대한 상실과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이상해져 가는 삶의 모양 때문에 괴로웠다.
욥은 하느님과 단절된 채로 가족에게서도 친구들에게서도 세속에서도 이방인, 아니 외계인 취급을 받는 것이 괴로웠다.
가까운 이들한테 소외되는 것이나 죽음으로 홀로 되는 것이나 그것은 내가 극도로 무의미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활동 첫날,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룻날’(마르 1,21-39) 방치되거나 홀로 되어 무의미해져 가는 인생들과 맞닥뜨리신다.
열병에 걸린 시몬의 장모, 마귀 들린 이들, 갖가지 병에 걸린 이들······.
병을 죄의 결과로 여기는 구약의 누념(陋念)에 따르면 예수님 앞에 선 병자들은 선민도 이방인도 아니다.
그저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또는 점점 이상해져 버린 죄인들일 뿐이었다.
순례자들에게 말하곤 한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죽어서 갈 곳이 없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놓고 죽었지만 갈 곳이 명확한 분이다.”
“어찌 어찌하다가 죽어서 갈 곳 없어져 버린 인생들, 영원에 대한 신념이 없는 신세들은 어찌해야 하나?”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라는 예수님 말씀에 바오로는 포인트 미장을 한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
‘앓은 양 한 마리’처럼 그 누구도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상해지지 않고 빠짐없게 된다는 것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는 말씀대로 산다면······.
삶이 점점 이상해지면 욥처럼, 외딴곳으로 가시는 예수님처럼 홀로됨을 자초하라.
홀로 됨이 어쩔 수 없이 주어지더라도 골이 나서 마음의 그릇을 깨거나 쭈그리지 마라.
욥이나 가파르나움의 병자들처럼 고통으로 옹졸해져 가는 마음의 그릇을 하느님께 넉살 좋게 내밀어라.
내 삶에 흠이 있더라도 그것은 구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본디 내게 주신 것을 찾아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