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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단군신화(檀君神話)
고기(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 ― 제석(帝釋)을 이름 ―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계시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人間世上)을 탐내어 구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산(三危太伯山)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 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 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桓雄)은 그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佰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서 이 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삼백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하였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神, 환웅)이 신령한 쑥 한 심지[炷]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기(忌)한 지 삼칠일(三七日)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기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여자가 된 곰은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壇樹) 밑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桓雄)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그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堯)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 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아마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 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에 옮겼다. 그 곳을 또는 궁(弓)―혹은 방자(方字)로도 되어 있다.―홀산(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한다. 그는 일천 오백 년 동안 여기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1천9백8세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기(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제석(帝釋)을 이른다.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天下)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人間世上)을 몹시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곧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 의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서 이 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삼백예순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敎化)시켰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桓雄)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이 때 신(神, 桓雄)이 신령한 쑥 한 심지炷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기(忌)한 지 21일三七日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기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그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 왕검(壇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堯)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 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확실한 여부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기니, 그 곳을 궁(弓)혹은 방(方)이라고도 한다.홀산(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한다. 그는 1천 5백 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1천9백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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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중국의 〈위서 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 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을 들 수 있다. 그밖에 고려 후기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 조선 초기 권람(權擥)의 〈응제시주 應製詩註〉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풍부하여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고기〉의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랜 옛날에 환인의 서자(庶子: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을 가리킴)인 환웅이 항상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보내 인간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여기를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한번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여 3·7일(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호랑이는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이다. 왕검이 당고(唐高:중국 3황 5제 중의 堯를 말함. 당시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조의 이름이 요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뜻이 같은 高자를 대신 쓴 것임) 즉위 50년 뒤인 경인년(庚寅年:당고의 즉위년은 무진년으로 50년뒤면 정사년이므로 경인년이란 표현은 아마 틀린 듯함)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弓자 대신 方자를 쓰기도 함)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했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의 호왕(虎王:주의 무왕을 말함. 고려 2대 혜종의 이름이 武이기 때문에 이를 피한 것임)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그밖의 다른 기록들도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단군신화의 해석
〈단군신화〉는 우리 역사상 등장한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 관한 것인 만큼 오늘날에는 민족 전체의 국조신화로 여겨지고 있으며 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신화란 원래 당시의 현실 속에서 고대인이 경험한 것을 객관화시켜 형성된 관념이 간접적으로 표현된 사회적 의식형태의 하나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전하는 신화는 과거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완전한 형태로 정착된 것은 아니다. 역사발전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화도 오랜 세월 변천을 거듭하여 내용의 일부가 소멸하기도 하고 첨가되기도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때문에 학자들 사이에는 신화의 내용을 허구로 인식하여 〈단군신화〉와 관련된 고조선의 존재조차도 부정하는 견해로부터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다양하다.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를 관점의 차이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볼 수 있다.
〈단군신화〉의 생성과정과 주인공에 관한 학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는 견해이다.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와 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 사상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가지는 종족들이 백산(白山)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종족적 관계는 여하튼 간에 이 문화가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가 바로 단군과 부루(夫婁)라고 본다. 둘째, 이 신화가 삼신(三神)사상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 두 계통의 신화가 섞여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신화를 달리하는 두 종족이 정치·사회적으로 통합되면서 두 종족의 시조신화가 융합된 것으로 이해했다. 셋째,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했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祭主)의 의미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의 의의가 강하다고 보아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이 명칭상에서 구분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넷째, 신화 또는 토테미즘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 우리 민족 태고의 의식을 보여주는 사실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단군신화〉의 농경관계 기사를 곡물재배민족의 제의(祭儀)로 파악하고 환웅과 웅녀를 쌍분체제(雙分體制 dual organization)로 간주하여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을 일광금기(日光禁忌)와 탈피(脫皮)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다. 다섯째, 단군신화에 나타난 곰숭배사상에 주목하여 이 신화내용을 동북아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Paleo Asiatic)과 연결시키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논거로 고아시아족의 시조설화에 곰숭배사상이 포함되어 있고 자신들은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었던 점, 최고의 샤먼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이 어원상으로 관련이 있다는 점, 텡그리의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界木:고대신화에서 하늘과의 통로로 여겨진 신성한 나무) 관념이 신단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민족의 개국신화로 정착되는 과정에 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원래 고조선의 한 종족신화였던 〈단군신화〉가 대몽항쟁(對蒙抗爭)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에 전체 민족의 신화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서는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편찬시기가 대몽항쟁기였던 점,〈제왕운기〉에서 구월산(九月山)을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아사달산으로 보고 거기에 사당이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이 무렵부터 단군신화가 민족 전체의 신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을 모신 뒤로는 명실상부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신화〉가 처음부터 우리민족의 건국사화(建國史話)로 인식되었다고 보고 있다. 즉 고조선은 이미 BC 12세기 이전에 북경 근처의 롼허 강[河]서쪽 경계로 하여 동북부는 헤이룽 강[黑龍江] 밖까지 이르는 만주일대와 한반도 전지역을 영토로 하는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실재하고 있던 국가이므로 〈단군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며 따라서 단군은 그뒤 줄곧 개국시조로 인식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신화에 담겨진 역사적 현실과 그 시기 및 사실성 여부에 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다.
첫째, 〈단군신화〉가 시대적 변화를 계기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1단계에서는 씨족사회에서의 단순한 씨족토템이 생겼고, 2단계에서는 군사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했으며, 3단계에서는 계급국가 형성 뒤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으로 보았다.
둘째,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고대국가의 성립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서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우사·운사·선·악·곡·형 등 360가지 인간사 등의 단어들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여 〈단군신화〉에 나타난 사회가 부권(父權) 중심의 농경사회 내에서 계급분화가 이루어지고 지배자가 등장한 청동기시대 초기라고 보았다. 또한 곰과 호랑이, 환웅과 웅녀의 결혼 등의 내용을 통하여 토템을 믿는 몇 개의 종족이 결합하여 부족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셋째, 〈단군신화〉가 포용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를 고고학적인 연대와 관련하여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 지역과 관련되며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담당자가 고아시아족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단군신화〉의 시대적 성격이 신석기문화와 연결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넷째, 〈단군신화〉를 4단계의 역사적 발전단계가 압축된 것으로 보아 무리사회 단계인 환인시대, 부락사회 단계인 환웅시대, 부락연맹체사회 단계인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 국가사회 단계인 단군시대로 보아 한민족의 역사적 체험, 즉 인류사회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각 시대를 고고학 자료와 연결시켜 환인시대는 1만 년 이전의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 환웅시대는 1만 년 전 전후부터 6,000여 년 전까지의 전기신석기시대,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는 6,300~4,300여 년 전(BC 2300경)의 후기신석기시대, 고조선시대는 BC 2300년경부터 BC 2세기말까지로 보아 신화의 내용 대부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함께 랴오닝[遼寧] 지역의 풍하문화(豊下文化:夏家店下層文化)가 청동기문화로서 단군의 개국연대와 연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단군신화〉를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언급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즉 문헌에 보이는 자료를 토대로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 내의 화상석(畵像石)의 그림과 〈단군신화〉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이의 전파가 종족 이동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했다. 최근에는 이 견해의 바탕이 되는 무씨사당의 화상석이 단군신화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밖에 단군과 관련된 문헌 중 도가(道家) 계통의 역사서인 〈규원사화 揆園史話〉· 〈환단고기 桓檀古記〉 등을 제시하여 단군조선의 역사가 47대의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실사(實史)였음을 강조한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이 역사서가 한말과 일제하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라는 비판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해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한 점이 많다. 어쨌든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고 계속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민족의식의 고양과 관련하여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大倧敎)이다. 대종교는 1909년(융희 3) 나철(羅喆)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대종교에서 단군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이던 개천절(開天節)을 8·15해방 후 정부가 정식으로 국경일로 지정했다. 1945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령으로 공포되어 사용되던 단기(檀紀)는 고려말 우왕(禑王)의 사부였던 백문보(白文寶)가 사용한 예에서 처음 보인다. 요즘의 단기는 조선시대의 사서 〈동국통감 東國通鑑〉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요 즉위 25년 무진년으로 본 것에 근거하여, 단군 원년을 BC 2333년으로 정한 것이다. 5·16군사정변으로 군사정부가 집권한 뒤인 1962년 1월 1일부터 단기 사용을 중지시키고 공식적으로는 서기(西紀)만을 쓰고 있다.(출처 : 李弼永 글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년(충렬왕 7)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 5권. 목판본.
〔편찬과 판본〕 일연이 이 책의 저술을 위하여 사료를 수집한 것은 청년시절부터였고, 그 원고의 집필은 대개 70대 후반으로부터 84세로 죽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루어졌다.
저자 일연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제자 무극(無極)이 1310년대에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는데, 이때 그가 첨가한 기록이 두 곳에 있다. ‘무극기(無極記)’라고 표한 것이 그것이다. 무극의 간행이 초간인지 중간인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초기에도 ≪삼국유사≫의 간행이 행하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이 시기 고판본의 인본(印本)인 석남본(石南本)과 송은본(松隱本)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보물 제419호로 지정된 송은본은 현재 곽영대(郭永大)가 소장하고 있다. 이 본은 3·4·5권만 있는데, 권3의 첫 6장까지와 권5의 끝부분 4장이 없는 잔본이다.
석남본은 1940년부터 송석하(宋錫夏)가 소장하였던 것으로 왕력(王歷)과 제1권만 남은 잔본으로 소장처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남본 및 송은본을 모사한 필사본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940년 이후 몇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1512년(중종 7)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한 ≪삼국유사≫는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또는 정덕본(正德本)이라고 한다. 이 본의 권말에는 중간 경위를 밝힌 이계복의 발문이 붙어 있다. 이 발문에 의하면, 당시 경주부에는 옛 책판(冊板)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1행 중 겨우 4, 5자를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마멸이 심하였다. 이계복은 완전한 인본을 구해서 책판을 개간하였다.
발문에는 당시에 전 책판을 개간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전체 책판 290매 중 약 40매는 구각판(舊刻板)을 그대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다시 새겼다. 다시 새긴 판에 각자(刻字)의 양식이 다른 것들이 많음은 각 고을에 나누어 새긴 탓이기도 하고, 개각판은 복각(覆刻)과 필서보각(筆書補刻)의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정을 담당하였던 최기동(崔起潼)·이산보(李山甫)의 교정능력이 의심스럽다.
이계복이 중간한 책판은 19세기 중반까지 경주부에 보존되었지만, 전하지 않는다. 중종임신본을 인행(印行)한 몇 종의 간행본이 현재 국내외에 전한다. 5권이 갖추어진 완본인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은 이계복이 판각한 뒤 32년 이내에 인출된 것으로, 훗날 순암 안정복(安鼎福)이 소장하면서 가필을 한 때문에 이와 같이 불린다. 이 본은 이마니시(今西龍)가 1916년부터 소장하였는데(일인들은 흔히 今西本이라 칭한다),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의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본은 완본이지만 약간의 가필이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본은 초기의 임신고인본으로 평가되고 가필과 가획이 없어 원형에 가까운 귀중본이다. 이 밖에도 중종임신본은 몇 가지 더 전한다.
〔구 성〕≪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1·2권에 계속된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붙어 있다.
흥법편에는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항목,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효선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하였다.
이처럼 5권 9편 144항목으로 구성된 ≪삼국유사≫의 체재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高僧傳)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것과도 다른 체재이다. ≪삼국유사≫가 고려 후기의 전적에 인용된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후에 이루어진 여러 문헌에서는 이 책의 인용이 확인된다. 조선 초기 이후 이 책이 두루 유포되어 참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동국여지승람≫으로부터 ≪동사강목≫에 이르기까지 허황하여 믿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되었다.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선 초기 이후의 많은 역사책에 인용되었고 영향을 주었다. 최근 이 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면서 그 간행과 유통 또한 활발해졌다.
〔유 통〕 현재 간행, 유포되고 있는 ≪삼국유사≫는 여러 종류로 영인본·활판본·번역본 등이 있다. 1926년 순암수택본을 축소, 영인하여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총서 제6으로 간행하였고, 고전간행회에서 1932년 순암수택본을 원래의 크기로 영인, 한장본 2책으로 간행하였다. 1964년 일본의 가쿠슈원동양문화연구소(學習院東洋文化硏究所)에서 고전간행회영인본을 축소, 재영인하기도 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3년 서울대학교 소장본을 반으로 축소, 영인하였는데, 이동환(李東歡)의 교감을 두주(頭註)로 붙이고, 〈균여전 均如傳〉 및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를 부록으로 덧붙인 양장본이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1983년 만송문고본(晩松文庫本)을 축소, 영인하였다. 부록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소장 필사본, 즉 석남본 및 송은본의 모사본을 영인하여 수록하였다.
활자본으로는 동대본(東大本, 東京帝國大學 문학부, 1904)·속장경본(續藏經本, 동대본을 정정하여 속장경 지나찬술부 사전부에 수록)·계명본(啓明本, 崔南善 교정, 啓明 제18호, 1927)·신증본(新增本, 최남선, 三中堂, 1943·1946)·증보본(增補本, 민중서관, 1954)·대정신수대장경본(大正新修大藏經本, 1927)·조선사학회본(1928)·한국불교전서본(韓國佛敎全書本, 동국대학교 출판부, 한국불교전서 제6책에 수록, 1984) 등이 있다.
〔번역본〕≪삼국유사≫의 번역본으로는 국역본·일역본·영역본 등이 있다. 국역본으로는 사서연역회번역본(고려문화사, 1946)·완역삼국유사(고전연역회 이종렬 책임번역, 학우사, 1954)·원문병역주삼국유사(李丙燾 譯, 동국문화사, 1956)·수정판역주병원문삼국유사(이병도 역주, 廣曺出版社, 1977)·한국명저대전집본(이병도 역, 大洋書籍, 1972)·조선과학원번역본(북한에서 1960년 번역)·세계고전전집본(李載浩 譯註, 광문출판사, 1967)·세계사상교양전집본(李民樹 譯, 乙酉文化社, 1975)·권상로역해본(權相老 譯解本, 東西文化社, 1978)·성은구역주본(成殷九 譯註本, 전남대학교 출판부, 1981)·역해삼국유사(박성봉·고경식 역, 서문문화사, 1985)·삼중당문고본(李東歡 역주, 1975)·삼성문화문고본(이민수 역, 1979) 등이 있다.
일어번역본으로는, 원문화역대조삼국유사·초역삼국유사·국역일체경본·임영수(林英樹) 역본·완역삼국유사(金思燁 역, 朝日新聞社, 1979) 등이 있다. 1972년 연세대학교에서 영역본삼국유사를 간행하였다.
≪삼국유사≫의 주석서로는 미지나(三品彰英)의 ≪삼국유사고증≫ 상·중 2책이 있다. 색인으로는 이홍직(李弘稙)이 ≪역사학보≫ 5집에 발표한 것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삼국유사색인≫이 있다. 이홍직이 작성한 것은 최남선의 ≪증보삼국유사≫의 부록으로 소개되기도 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작성한 색인은 주제별 및 가나다 색인이다.
〔특 징〕≪삼국유사≫의 체재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와 다를 뿐 아니라 불교사서인 ≪해동고승전≫과도 다르다. 이 책의 체재를 10과(科)로 분류한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의 경우와 비슷한 듯하지만, 왕력·기이·효선 등 중국 고승전의 선례와 다른 것도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편찬된 것은 아니다. 또한, 삼국의 불교사 전반을 포괄하지도 못하였다.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다.
이 책의 성격에 대해서도, 불교사서, 설화집성집, 불교신앙을 포함하는 역사에 관한 문헌, 잡록적 사서, 야사 등 많은 견해들이 있다. 이 책의 내용에는 불교사적인 것이 많지만, 순수한 불교사서로 보기는 어려우며, 많은 설화를 수록하고는 있지만, 간단히 설화집으로 평가하기도 어렵다. 저자가 서명(書名)을 통하여 밝히고 있듯이, ≪삼국유사≫는 사가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어 표현한 것이다.
이 사서가 정사가 아니라고 해서 만록(漫錄) 정도로 취급하기는 어렵다. 이 책에는 저자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역사의식이 스며 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신이(神異)한 사화(史話)가 많음이 흔히 지적된다. 이는 역사에 반영된 신이가 하등 기이할 것이 없다는 일연의 역사인식과 많은 사료를 수집, 전거를 밝혀 인용하고 고대사료의 원형 전달을 도모한 역사서술방법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연의 역사인식과 서술태도는 유교적 역사관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사학사적인 위치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비하여 복고적이라거나 진보적이라는 상반된 견해도 있다. 찬술동기나 서술체재가 서로 다른 두 사서의 직접적인 비교는 바람직하지 않고, 또 ≪삼국유사≫의 역사서술 방법론에 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오늘날 ≪삼국유사≫는 한국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에는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안첩(按牒) 등의 고문적(古文籍)에 이르는 많은 문헌이 인용되었다. 특히,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기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삼국유사≫는 신화와 설화의 보고이다. 또한, 차자표기(借字表記)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誓記體)의 기록, 이두(吏讀)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이 전해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 최대로 꼽히는 것의 하나는 향가이다. 14수의 향가는 우리 나라 고대문학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삼국유사≫는 또한 한국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연구를 위한 가장 오래된 중요한 문헌이기도 하다. 탑상편의 기사는 탑·불상·사원건축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싣고 있다. 이 책은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유적, 특히 불교의 유물·유적을 조사·연구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헌으로 꼽힌다.
≪삼국유사≫는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전해주고 있다. 이 자료들은 종교적이고 풍류적인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삼국사기≫ 화랑관계 기사와는 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저자 일연의 찬(讚)이 있어 그의 시문학이나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다.
≪삼국유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적지 않다. 이 책의 체재, 즉 권차(卷次)·편목(篇目)·항목 등에는 약간의 혼란이 있다. 본문 또한 오자(誤字)·탈자(脫字)·궐자(厥字)·중문(重文)·혼효(混淆)·전도(顚倒) 등으로 인한 변화도 있다. 정밀한 교감이 요구된다. 고대사료가 가진 애매성이나 신이한 설화의 문제도 있다. 역사·문학·종교 등 종합적인 연구와 자세한 주석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三國遺事의 新硏究(新羅文化宣揚會, 1980), 三國遺事의 硏究(東北亞細亞硏究會, 中央出版, 1982), 三國遺事硏究 上(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3), 三國遺事硏究論選集Ⅰ(白山資料院, 1986), 三國遺事의 綜合的檢討(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