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 . 유문석 . 유중성 . 이육희
함께 순교한 유항검의 가족들
신 회 : ?〜1802, 세례명은 미상,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유문석 : 1784〜 1801, 세례명 요한. 전주 감영에서 교수
유중성 : 1784〜1802. 세례명 마태오,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이육회 : ?〜1802, 세례명은 미상,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1801년 10월 6일, 우부승지가 대왕대비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柳重哲. 23세)과 유문석(柳文碩,혹은 문철. 요한, 18세)은 전주 부옥(府獄)에 수감 중이오니 곧 금부도사를 보내어 형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하소서. 유항검의 처 신희(申喜)는 함경도 경원부의 비(婢)로 삼고, 아들 일석(日碩, 6세)은 전라도 나주목 혹산도로, 일문(日文.3세)은 강진현 신지도로 보내어 노(奴)로 삼고, 딸 섬이(暹伊)는 경상도 거제부의 비(婢)로, 며느리 이순이는 평안도 벽동의 비로 삼으며. 조카 중성 (重誠)은 함경도 회령부로 귀양보내고, 유관검의 처 이육회는 평안도 위원군의 비로 삼으소서. 그리고 위의 죄인들이 전주 부옥에 갇혀 있으니, 아울러 형조에 명하여 각기 그 유배소까지 압송하도록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뢰오.”
연좌형에 따라 가족들을 노비로
이미 9월 15일 의금부에서는 연좌형에 따라 유항검, 관검 형제의 가족을 노비로 만드는 노적법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날로 전라 감영에서 포졸들이 나와 유항검의 처 신희, 둘째 아들 유문석. 조카인 유익검의 아들 중성. 동생 관검의 처 이육희 그리고 며느리 이순이를 장관청(將官廳)에 잡아들였다.
신희는 남편 유항검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열심히 믿었고. 신앙의 요구라면 무엇 하나 망설임 없이 성실하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친정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으나. 친정 동생 신경모(申景模. 니콜라오)가 1801년 4월 전주에서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5월 16일 명천(明川)으로 유배된 사실만 알려져 있다.
유문석은 신희의 둘째 아들로 1784년 전주 초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 유항검으로부터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아버지 밑에서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 김제의 가난한 양반인 한정홈(스타니슬라오)에게 글을 배웠다. 그리고 열한 살이 되던 1795년 5월, 자기 집을 방문한 주문모 신부에게 보례를 받고 주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사람들이 강주 도령이라고도 부르던 유중성(柳重誠. 마태오)은 유항검의 형 익검의 아들로, 전주 초남리에서 태어났다. 세 살 무렵인 1786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인 유항검 밑에서 자랐으며, 숙부에게 마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숙부의 신앙교육으로 신심이 독실하였으며, 초남리에서 나고 자랐지만 자주 서울에서 지냈다.
유관검의 처 이육회는 시집 식구들을 따라 천주교를 믿었으며. 이순이의'옥중 편지’ 에 의하면. 그녀는 딸 없이 아들 하나만을 두었다고 한다.
▲ 숲정이 성지와 오른쪽, 치명자산 성지
숲정이에 지는 꽃들
보름달이 유난히도 밝던 9월 15일 신회를 비롯한 유항검, 관검 형제의 가족들이 체포되었다. 3월에 헤어진 맏아들 유중철은 큰 옥에 갇혀 있지만 얼굴마저 볼 수 없는 처지였고, 아홉 살 난 딸
섬이와 여섯 살 난 아들 일석, 세 살 된 일문 등 어린것들은 부모와 떨어져 귀양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에 걸려 있는 달을 보는 어미 마음은 천만 칼이 가슴을 에는 듯하였다.
마침내 9월 17일 남편 유항검이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그리고 10월 9일에는 일찌감치 옥졸이 찾아와 둘째 아들 문석을 옥에서 불러내 갔다. 맏형 유중철이 갇혀 있는 큰 감옥으로 데려가서 형과 함께 가둘 것이란다. 그러나 그 길이 황천길인 줄 누가 알았으랴. 그날 유중철 과 유문석이 큰 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니, 그때 문석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문석이 처형된 지 4일 후 가족들은 의금부의 판결에 따라 유배지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신희 가족은 감영으로 들어가 “우리들은 모두 하느님을 공경하였으니 국법에 따라 죽어 마땅합니다” 하고 죽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판관과 포졸들은 막무가내로 그들을 내칠 뿐이었다.
아무리 간청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은 “만일 관가에서 저희를 그냥 살려서 귀양보내신다면 저희는 가는 고을마다 본관이 나라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천주교 신자들을 죽이지 않는다’ 고 떠들어 담당관이 나라의 죄를 얻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감사나 판관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결국 가족들은 유배 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이 백여 리쯤 가고 있을 때였다. 뜻밖에 전주 포졸들이 쫓아와서 유배를 취소하고 전주 옥으로 다시 끌고 갔다. 감영에 당도한 이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고통이었다. 신희는 이튿날 신문을 받으며 "야소교(耶蘇敎. 예수교)는 죽음을 영화로이 여깁니다.
남편이 그처럼 의롭게 죽었는데, 살아 있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숭배하며 받드는 도리를 다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서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고, 이육회는 “국법이 지엄하지만, 천주교도 소중합니다. 천주교를 배반하여 살기를 꾀하는 것보다 순절(殉節)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제 어찌 여러 말을 하겠습니까? 오직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유중성은 “천주교는 곧 집안에 내려오는 학술입니다. 둘째 숙부가 영광스럽게 돌아가셨으니 저도 따라 죽고 싶을 뿐입니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렇게 모든 가족이 하느님을 공경하며 죽기를 바란다고 하자. 전라 감사는 신희 가족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후, 정강이를 몽둥이로 치고 큰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
전라 감사가 장계를 올린 지 20여 일이 지나도록 의금부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신희는 할 일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동안 마음이 한없이 외로웠다. 몸 고생이건 마음고생이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초남리에 남은 가족들도 그렇고, 귀양지로 떠난 어린 자식들의 얼굴이 눈에 밟혀 마음이 산란했다.
옥에 갇혀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서 참고 있으려니 뼈가 말랐다. 특히 세 살배기 일문이의 울음 소리가 곁에서 들리는 듯하여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옥에 있는 일행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 위로하며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다짐하였다.
12월 28일(양 1802년 1월 31일) 마침내 이들은 사형을 받기 위해 전주 숲정이로 가고 있었다. 형장으로 가는 도중 신희가 귀양 간 어린 세 자식을 못잊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자, 며느리 이순이는 시어머니를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하지만 네 사람은 사형 장으로 가면서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기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렸을 때 신희는 마흔 살가량, 유중성은 열여덟 살, 이육희는 서른다섯 살가량이었다고 한다. 신희를 비롯한 이들의 주검은 노복들에 의해 용지면 제남리 바우백이에 나란히 묻혔는데. 그곳에는 이미 앞서 순교한 유항검과 유중철, 문석이 묻혀 있었다.
한편 일제 시대에 이 땅은 일본인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1914년 사순 시기에 땅의 소유주인 기바(木場)는 이곳에 과수원을 만든다는 구실로 묘를 이장하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전주 본당의 보두네 신부와 회장들은 이곳에 있던 일곱 기의 유해를 전주 본당에 임시로 옮겼다가 4월 19일 전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승암산 정상에 7인의 합동 묘를 조성하였다.
그 후부터 이 산은 ‘치명자산’ 이 라고 불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