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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배를 드려라
2025년 3월 2일 / 대예배 / 요한복음 4:20-24
요 4:20-24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1. 신구약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
① 구약 / 봉사와 섬김의 ‘Service’라는 의미의 예배라는 단어가 있다. 히브리어 ‘아베다’ - 종, 노예라는 [에베다]의 어원을 갖고 있다. 예배를 섬기기 위해서는 '종'이라는 자기의식이 있어야 한다. 낮추어진 자기의식이 있어야 섬기는 위치에 갈 수 있다. 계급사회에서의 개념이 아니다. 종과 친절한 주인과의 관계를 함축한 것이다. 종과 주인의 연합한 관계는 특권과 영광의 관계를 말한다. 다윗 역시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 했다. 비하한 것이 아니다. 주인에게 순복, 밀착되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정도로 밀착된 관계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따라서 주님의 성품과 뜻을 알고 올바로 섬기기 위해 종이라고 표현했다.
② 신약 / ‘엎드려 부복하다’라는 뜻으로 겸손한 자세를 나타낸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예배의 자리에 서기 위해 우리의 생각, 의지 등 모두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순복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예배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worship)라고 한다. 그 정확한 개념은 ‘존경을 나타내다,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라는 뜻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존경을 나타내는 경건과 의식을 뜻하며,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논란의 대상이었던 예배의 장소
요 4:19-20 /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는 예언자이십니다. 20)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왜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유일한 예배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의 장소를 그리심산에서 드려도 된다고 하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직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하므로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다.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과의 다툼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를 얼핏 보면 동문서답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누구 편도 아닌 가장 핵심 되는 답변이었다.
요 4:21-24 /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여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하다. 22) 너희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예배드리지만, 우리 유대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예배를 드린다. 이는 구원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4) 아버지께서 이런 예배를 우리에게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빌도록 하신 그리심산이 옳은가? / 그리심산은 사마리아 지방의 중심지며, 예루살렘에서 정북쪽으로 50Km쯤 떨어져 있는데 모세는 그리심산을 축복을 비는 산, 에발산을 저주를 비는 산으로 불렀다(신 27:12-14). 후에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대로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각 지파를 나누어 세우고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였다(수 8:33). 현재도 매년 유월절이 되면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의 지시에 따라 그리심산에서 전통적인 유월절 행사를 한다. 그리심산의 정상에는 또 하나의 성지가 있는데 사마리아인들에 의해서 모리아산으로 믿어진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모리아산과 상반되는 것으로서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이 이곳 그리심산 정상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다고 한다.
예루살렘이 옳은가? / 이곳은 다윗 때부터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성전이 있는 곳이다(신 12:5).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에 대해서 여인은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하셨다.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배 장소가 아닌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는 방법이었다.
▶ 사람들은 예배를 보러 온다고 한다. ‘누가 왔나, 성가대가 잘하나, 이 예배당이 잘 지어졌는가, 목사가 설교 잘 하나?’를 먼저 생각한다. 지금까지 예배를 보러 왔다면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예배를 드려야 한다. 어떤 예배는 내 감정이 자극되어서 흥분되고, 신나고, 뜨겁고.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누구의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기분이 좋아진 것인가? 내 기분이 좋아진 것인가? 내 기분이 좋아지니 뿌듯하고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예배는 내 감정이 좋아지라고 드리는 것이 아니다. 내 기분이 좋고 내가 만족스러워지라고 드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제물이다. 나는 정성껏 하나님께 드리면 된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었다면 내가 드린 그 예배는 정말로 잘 드린 올바른 예배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인 장소 문제보다 근본적인 예배자의 태도를 언급하셨다. 그렇다고 일정한 장소에서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참다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과 신령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은 예배란 것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영적 예배는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예배하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큰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오케스트라와 수많은 성가대의 찬양이 있는 예배당에서 예배드린다고 할지라도 예배의 대상자이신 하나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예배의 회복이 올 수가 없다. 사마리아 여인은 구원주, 메시아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다. 무시와 천대 속에서 서글펐던 그녀의 기구한 삶은 마침표를 찍었다. 방황과 고통 속에 몸부림을 쳐왔던 이 여인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요 4:24-26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드디어 그녀는 예배의 대상자이신 주님을 만났다. 여인은 너무나 좋아서 자기가 물을 기르기 위해서 가져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내려갔다. 사람을 만날까봐 두려워 낮에 물을 길으러 왔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남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동네에 내려가서 외쳤다(요 4:28-29).
같은 예배인데도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만나는 감격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어떤 사람은 맹숭맹숭 딴 생각하다가 씁쓸하게 예배당을 떠나고 ….
▶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북녘땅에서는 지하에서, 알 수 없는 굴속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찬송을 소리내어 부를 수 없어서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며 찬양하고 있다. 성경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나누어진 쪽복음 성경을 다 낡아서 너덜거리도록 읽고 있다. 소리내지 못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 비록 우리처럼 화려한 조명과 우렁찬 소리로 찬양 드리지 못하지만, 그들의 눈물이 어린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 받으신다.
■ 예배의 소중함을 알자 / 80년대 말경 구소련의 어느 도시에서 이삭 목사는 한 비밀 예배처를 탐방할 기회를 얻었다. 예배처에 가보니 예배드리기 전부터 성경 통독을 하면서 울던 성도들은 예배가 시작되어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낡은 풍금으로 반주하는 몇 명뿐인 성가대의 송영도 울음 때문에 제대로 나오지 않고 회중의 찬송 소리에도 울음이 섞였다. 설교를 들을 때나 성찬을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배를 마친 후 ‘그렇게 울면서 예배드린 이유가 뭐냐?’라고 물었더니 ‘그것이 이 세상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 중에는 어느 날 갑자기 KGB에 잡혀가서 20년 혹은 3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주일마다 예배드릴 수 있는 우리는 고난 속에서 목숨을 걸고 감격적으로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는지?
다른 종교의 신전을 보면 이슬람교 사원이나 불교의 법당, 로마교의 성당은 건물이나, 장소에 대한 의미를 크게 부여한다. 오늘날 개신교 역시 교회당 건물의 꾸밈, 유리창, 값비싼 오르간, 내부 장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롬 12:1-2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 2)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딴 사람이 되십시오. … .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정성을 다하지 않는 예배도 아니며, 대강 드리는 예배도 아니며, 헌신이 없는 예배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인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데 특별히 예배자의 자세는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데, 이 단어는 ‘진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거짓으로 형식적으로 또는 입으로만 드리는 예배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헌신(몸과 마음과 영의 헌신)이 없이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진정한 예배 즉 영의 예배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예배가 상달되지도 않고 그곳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3. 영적예배의 흐름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비롯하여, 노아(창 8:20), 아브라함의 사적(창 12:8, 13:18)등 하나님께 대한 사람들의 제사는 출애굽 당시의 희생제사(제물)를 드리는 것을 중심으로 히브리 종교의 중요한 예배 양식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영적예배라는 개념은 선지자, 특히 예레미야, 미가 선지자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고, 이것은 제사 의식인 희생제사 예배와 대립하여 유대 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시 40:6, 50:12 이하, 미 6:6등). 그러나 제의(祭儀)적 예배는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완전 붕괴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예배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신자들의 내적요소 즉 본질적 요소에 신앙의 우위를 두시고 영적예배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셨다(요 4:24).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영적예배는 사도시대에 와서 외적인 관습이나 형식보다는 내적인 신앙이 더욱 강조되었다(롬 14:5~). 영적예배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드려지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이다.
▶ 특히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말씀이 있다. 즉 눈에 보이는 성전에 들어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자세를 볼 때 그런 성전은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다.
눅 18:9-14 /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자기가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는 세관원이었다. 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12)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13) 그러나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관원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막 13:1-2 /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마 24:1-2, 눅 21:5-6] 그날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려 할 때 제자 한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님, 얼마나 훌륭한 건물입니까! 돌을 조각하여 장식해 놓은 이 벽을 보십시오.’ 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큰 건물이 멋있어 보이느냐? 그러나 돌 하나라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4.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전
■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 / 교회는 무언가를 받기 위해 오는 곳이 아니라 먼저 드리러 오는 곳이어야 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을 보면 이 사실은 분명해진다. 솔로몬은 성전 장소를 백방으로 찾던 중에 다윗이 범죄한 후 제단을 쌓았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으로 선택하였다(대하 3:1).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7만 명의 무고한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갈 때 다윗은 그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제사를 드릴 때에 재앙이 그쳤다(삼하 24:2). 그런데 그 장소는 일찍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려했던 곳이다. 아브라함은 사흘 길도 마다 않고 그곳으로 갔다. 이삭도 순순히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 하나님께서도 어린양을 준비해 놓고 계셨으며 축복을 내려주셨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며 도와주시기 위해 찾아오시고, 인간도 드리기 위해 찾아오는 곳, 그 모리아산이 예루살렘 성전이 되었고 지금도 이 헌신(몸을 드림)의 정신이 교회의 초석이 된다.
■ 유대인들에게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두 형제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주었다. 형제는 물려받은 토지에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그해 가을이 되자 풍성히 수확을 했다. 쌓아올린 낟가리를 보면서 동생은 자기보다 가족이 많은 형님을 생각하면서 밤중에 몰래 자기네 볏단을 지고 형님의 곡식 낟가리에 쌓아 두었다. 형은 결혼하지 않은 자기 동생을 생각하면서 야밤이 되면 볏단을 지게에 지고서 동생의 곡식 낟가리에 쌓아 두었다. 이런 일에 계속되었는데 어느 날 밤, 형제는 볏단을 옮기는 중 큰 타작마당 가운데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제야 자기 볏단이 줄어들지 않게 된 이유를 알게 된 형제는 얼싸안고서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이다. 그 장소가 바로 오르난 타작마당 자리이며,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쳤던 바로 그 모리아 산인데, 탈무드에 의하면 솔로몬이 이 얘기에 감동하고 그곳에다가 유대인 최초의 화려한 성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성전은 드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은혜받은 우리는 몸과 마음, 물질과 찬양, 감사를 드리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축복을 내려주시며 성령을 보내주시는 그런 만남의 장소가 바로 성전이고 교회이다. 성경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행 20:35).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기쁨으로 드리는 곳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복된 곳이다.
▶ 사마리아 성전은 이미 BC 125년에 파괴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에 성전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할까? 예수님은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마 5:3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누가 17:20-21 /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시작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도 말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마 16:18 /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다. 육신의 성전은 헤롯이 지은 성전에서 2번씩이나 장사치들을 내어 쫓으셨다. 예수님은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에 있던 장사꾼들을 다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을 큰소리로 꾸짖으셨다. ‘성경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느냐?’(마 21:12-13)
건물은 예배당이며 성전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이다. 즉 거듭난 성도들의 몸과 마음은 하나님을 모신 육체 즉 성전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성전을 거룩하게 세우고 깨끗하고 흠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전 3:16-17, 6:19).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교회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cclesia)라고 하는데 ‘죄에서 벗어나 불러 모았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전이란 구원받은 성도의 몸이며, 교회는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구원받은 성도 개인의 집합을 말하며, 예배당은 성도들이 모여서(교회)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교제하고 봉사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장소이다.
고전 3:16-17 / 여러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성전인 바로 여러분 속에 계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17)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거나 허물어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고 정결하며 여러분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6:19-20 /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성령의 집이며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신다는 것을 아직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2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비싼 대가를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사용하십시오. 여러분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5. 회중 예배(會中 禮拜)의 필요성
에베소서 2:19에 보면, 성도들을 가리켜서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다. 권속이라는 말은 '한 가족'이라는 말이다.
엡 2:20-22 / 여러분은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그리고 이 건물의 머릿돌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21)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아름답게 점점 커가며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22) 여러분도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또 서로가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사시는 이 집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혈연으로 연결되었으며, 집단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성전인 것이다(고전 3:16, 고후 6:16). 이처럼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성전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다(고전 3:9).
마 18:19-20 / [내 이름으로 모인 곳] 내가 또 진정으로 말한다. 만일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 위에서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리고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성도는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성도가 함께 모여야 하는 이유는 놀랍고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돌로 만들어진 성전이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물론 혼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들의 모임 가운데서 예배해야 한다.
왜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만 할까?
히 10:24-25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일에 응답하여 우리도 서로 돕고 친절히 대하며 선할 일을 힘써 행합시다. 25) 어떤 사람들처럼 교회에 모이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옵니다. 더욱 서로 격려하고 충고합시다.
성도는 서로를 위하여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집단적인 모임이 필요하다. 성도가 연합할 때 그 아름다움과 큰 힘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예배가 있다면 그것은 주일예배를 비롯하여 드리는 공중예배(회중예배)이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회중예배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이전에 혼자서는 세상을 이기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주일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그 자리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
■ 어떤 시골의 한 청년이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교회 공동예배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예배를 잘 드리고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겨울 저녁에 담임목사가 그 청년의 집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벽난로 앞에 앉아서 이런저런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교회 출석 문제를 화제로 올리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시간이 흐른 뒤 목사님은 벽난로 옆에 있던 부젓가락을 집어 불 속에서 반쯤 타고 있는 석탄 덩어리 하나를 꺼내서 그것을 난로 밖에 따로 놓았다. 그러자 그 석탄의 불은 이내 꺼져버리고 말았다. 벽난로 속에 있는 석탄 덩어리들은 여전히 붉은빛을 내면서 활활 타고 있었다. 꺼져가는 꺼낸 석탄을 다시 벽난로에 집어넣자 활활 타올랐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청년은 목사님에게 ‘목사님, 이번 주일부터 교회 예배에 꼭 참석하겠습니다. 이제는 절대 빠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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