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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태후를 죽여라 위소보는 구름을 타고 안개 위를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들이 뒤로 스쳐지나 갔으며 갈수록 산 위로 높이 오르고 있 었다. 그는 속으로 여간 두렵지 않았다. (이 땡초중은 일검으로 나를 찔렀으나 내가 죽지 않은 것을 보고 크게 오기가 치밀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하여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마음 먹고 만장의 높은 봉우리 위에서 나를 던져 죽는지 죽지 않는지를 보려 는 게 아닐까?) 과연 그의 짐작대로 백의승려는 갑자기 위소보를 내던졌다. 위소보는 크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데 곧이어 등이 땅에 닿았다. 백의승려는 그를 바라보더니 냉랭히 말했다. "소림파에는 호체신공이라는 것이 있어 칼과 창도 그 몸을 뚫지 못한다 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네까짓 소화상이 그것을 알고 있었구 나." 위소보는 그 사람의 음성이 맑은데다가 다소 간드러진 데가 있음을 느 끼고 의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두 눈썹은 초생달 같았다. 그리고 눈에는 수심이 가득 어려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지극히 아름다운 여 자였다. 그리고 나이는 약 삼십여 세 정도 되어 보였다. 머리는 빡빡 깍았고 정수리에는 계를 받을 때 생긴 향파 즉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 는 것을 보니 그는 본래 여승이 아닌가? 위소보는 속으로 기뻤다. (여승이라면 아무래도 화상보다 말하기가 낫지.)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런데 가슴팍이 격렬히 아파왔다. 조금 전 그녀에게 일검을 찔렀을 때 보의가 몸을 보호해 주긴 했으나 그녀의 내력이 너무나 심후하여 그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여 전히 아프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이구 하는 소리와 함께 다 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비구니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나는 소림신공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별 게 아니었구나.?" "솔직이 사태에게 말씀드려서 청량사의 대웅보전에는 삼십 육명의 소림 승려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달마원의 수좌이고 어떤 사람은 반야당의 수좌입니다...... 어이쿠, 어이쿠...... 소림파에서 명성이 쟁쟁한 십팔나한도 모두 그 안에 있습니다. 하나같이 소림파에 서는 으뜸가는 고수들이죠. 그들 삼십육 명도 사태 한 사람을 당해 내 지 못했습니다...... 아이쿠......"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진작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저 역시 소림사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 다. 아이쿠...... 차라리 사태를 사부님으로 모시는 것이 백배나 더 나 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백의여승은 싸늘하고도 준엄한 얼굴에 한 가닥 웃음을 띄우고 물었다. "자네 이름은 무엇인가? 소림사에서는 몇 년 동안 무예를 익혔지?"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황상을 찔러 죽이려 했고 또 대명나라 천자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으니 자연히 반청복명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천지회 와 친구인지 적인지 모르니 역시 잠시 실토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저는 양주에 사는 궁한 집의 고아입니다. 아버님은 오랑캐에게 살해당 해 어릴 적부터 황궁으로 들여보내져 소태감이 되었지요. 이름은 소계 자라고 한답니다. 그 후에......" 백의여승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소태감 소계자라고? 네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구나. 오랑캐 조정에 대간신 오배라는 자가 있었는데 소태감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했 다. 그는 네가 죽인 것이냐?" 위소보는 오배의 이름에 대간신이라는 석 자가 더 붙는 것을 보고 재빨 리 말했다. "네, 제가 죽인 것입니다." 백의여승은 반신반의했다. "정말 네가 죽인 것이냐? 그 오배의 무공은 매우 고강하여 만주 제일용 사라 일컬어지고 있다. 네가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었느냐?" 위소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오배를 잡게 된 경과를 말했다. 어떻게 소황제가 명령을 내려서 손을 쓰게 되었는가, 또 어떻 게 자기가 오배가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한칼로 찔렀으며 또 어떻게 하다가 향로의 재를 그의 눈에다 뿌리고, 그 후 어떻게 뇌옥에서 그의 등을 찔러 죽이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했다. 백의여승은 조용히 듣고 나더니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장씨 집안의 그 과부들은 정말 자네에게 감사 해야겠군."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어르신은 장씨 집안의 셋째 젊은 마나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는 이미 나에게 사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한 하녀까지 저에게 딸려 주었 지요. 그 하녀의 이름은 쌍아라고 합니다. 지금쯤 그녀는 초조해져 죽 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녀는......" "너는 또 어떻게 하다가 장씨 집안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느냐?" 위소보는 그간의 사정을 다 털어놓고 말했다. "어르신께서 만약 믿을 수 없다면 쌍아를 불러 물어 보도록 하십시오." "자네가 셋째 작은 마나님과 쌍아를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참말같구나. 그대는 또 어떻게 하다가 화상이 되었지?" 위소보는 노황야가 출가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숨겨야겠다고 생각하 고 말했다. "소황제는 저를 자기 대신으로 삼아 소림사로 가서 출가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저를 청량사로 보냈습니다. 소림파의 무공 중 제가 배운 것은 별로 없죠. 기실 또 다시 수십 년을 더 배워, 뭐라더라, 위타장, 반야장, 염화금나수 등 등을 모조리 다 배운다 치더라도 어르신 앞에서 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백의여승은 갑자기 안색을 굳히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한나라 사람이라면 어째서 적을 애비로 삼듯 목숨을 걸고서 황 제를 보호하려고 하지? 정말 타고난 노예근성이 아닌가!" 위소보는 가슴속에 서늘해졌다. 이 한마디의 질문에는 실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백의여승은 냉랭히 말했다. "만주의 오랑캐들이 우리 대명나라의 천하를 가로채갔다. 하지만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장 나쁜 사람은 바로 오랑캐의 앞잡 이 노릇을 하는 한나라 사람들이다. 그저 자기의 부귀영화만 바라고는 어떠한 일이라도 해내는 사람들 말이다." 그녀는 위소보의 얼굴을 쏘아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이 산봉우리 위에서 내던지겠다. 너의 호체신공이 과연 쓸 모가 있을까?" 위소보는 큰소리로 말했다. "물론 쓸모가 없지요! 기실 저를 산 아래로 던질 것까지도 없습니다. 그저 가볍게 나의 머리 위를 치기만 하면 저의 머리통은 즉시 박살나서 열 일곱 여덟 조각이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오랑캐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무슨 이득을 얻으려고 했 느냐? "나는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소황제는 나의 친구입 니다. 그는...... 그는 영원히 세금을 징수하지 않겠으며 백성을 사랑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강호의 사내들은 의리를 중시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아낍니다." 기실 그는 강희황제에 대해 확실히 의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 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백의여승은 얼굴에 한가닥 망설이는 빛을 띄우고 말했다. "그가 영원히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지 않겠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아 끼겠다고 했다구?"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몇백 번을 말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는 오랑 캐의 황제가 중원으로 들어온 후 백성들을 많이 죽인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며 양주십일과 가정삼도는 그야말로 짐승들의 짓이었다고 말했습니 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불안해 했으며 그래서...... 그래서 오대산으 로 올라와 부처님에게 예불을 드리게 된 것이고 또한 성지를 내려 양주 와 가정의 백성들이 삼 년 동안 세금을 내지 않도록 면해 주었습니다." 백의여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오배 이 대간신은 많은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을 해쳐 죽였습니다. 소황제는 그에게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명했으나 그는 한사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소황제는 크게 노하셔서 저에게 그를 죽이라고 했습 니다. 사태, 만약 사태께서 소황제를 죽인다면 조정의 큰일은 태후에 의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이 늙은 갈보는 너무나 나쁘답니다. 그녀 가 만약 정권을 잡게 된다면 또한바탕 양주십일과 가정삼도 같은 일을 일으킬 것입니다. 사태께서 오랑캐를 죽이겠다면 역시 태후라는 늙은 갈보부터 죽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백의여승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앞에서는 그와 같이 막돼먹은 무례한 말은 하지 말아라." "네, 네. 어르신 앞에서 이후 칠팔십 년 동안 다시는 반 마디라도 천한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백의여승은 고개를 쳐들고 하늘에 둥실 떠 가는 흰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야 물었다. "태후의 어떤 점이 나쁘다는 것이지?"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태후가 한 나쁜 짓은 저 여자와 전혀 상관이 없다. 얼렁뚱땅 죄명을 만들어야지.) "태후는 지금은 대청나라의 천하이니 마땅히 대명나라 십 칠팔대 황제 들의 무덤을 파헤쳐 무덤 안에 어떤 보배가 숨겨져 있는지를 봐야 한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하의 주씨 성을 가진 한나라 사람들을 살려 둬 서는 안 되고 모조리 멸족을 해서 그들이 다시는 대청나라의 강산을 빼 앗지 못하게 해야......" 백의여승은 대노해서 오른손을 들어 옆에 있는 바위를 내려쳤다. 그러 자 대뜸 돌가루가 분분히 날아올랐다. 그녀는 날카롭게 외쳤다. "그 여인은 정말 악독하구나!" "그렇지 않구요? 저는 소황제에게 그와 같은 일을 해서는 절대로 안된 다고 권했습니다요." "흥, 자네에게 무슨 학문이 있어서 그와 같은 도리를 이야기 할수 있었 고 또 소황제가 자네의 말을 믿도록 전할 수 있었지?" "저의 방법은 그럴싸했죠. 저는 항상 사람은 어쨌든 간에 죽게 된다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그대들 만주인들이 권력을 쥐고 있 으나, 저승의 염라대왕이 한나라 사람인지 아니면 만주 사람인지 황상 께서 아시냐고 물었죠. 그리고 소귀(小鬼), 우두(牛頭), 마면(馬面)에 흑무상과 백무상이 한나라 사람이냐 아니면 만주 사람이냐고 물었죠. 그들은 하나같이 한나라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황상께서 이승 에서 한나라 사람들을 못 살게 굴고 압박을 가한다면 설사 황상께서 백 살을 넘게 사신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죽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 다. 소황제는 "소계자, 정말 깨우쳐 줘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따라 서 태후의 그와 같은 나쁜 생각을 소황제는 한 마디도 듣지 않고 오히 려 천하에 은자를 내려서는 대명나라 황제의 무덤을 크게 다듬도록 했 으며 홍무(洪武)황제의 무덤부터 고치기 시작해서 숭정황제의 무덤까지 고치겠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복왕, 노왕, 당왕, 계왕의 무 덤도 고친다고 했습니다. 저로서는 그많은 황제들을 다 기억할 수가 없 군요." 백의여승은 갑자기 눈가를 붉히며 눈물을 흘렸다. 한 방울 한 방울의 눈물이 그녀의 옷자락에 또르르 굴러 떨어져 풀밭 위로 떨어졌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너는 비단 아무런 잘못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커 다란 공로가 있다. 하마터면......우리 대명나라 역대 황제들의 능묘가 모두 다 그......나쁜 여인에게 파헤쳐질 뻔했구나......" 거기까지 말하더니 목이 메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몸을 일 으키더니 한 벼랑 위로 올라갔다. 위소보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태, 그대는...... 그대는 결코...... 스스로 자결을 해서는 안됩니 다." 그는 달려가 그녀의 왼팔을 잡아당겼다. 그녀와 자리를 함께 한 지 얼 마 되지는 않았지만 위소보는 이 아름다운 여승에 대해서 이미 상당히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답고 우아할 뿐 아니라 정숙하 면서도 인자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평생 본 여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녀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왼팔을 잡아 끌어당겼으나 빈 소맷자락만 잡혔다. 위소보는 어리둥절해졌다. 그제서야 그녀에게 왼팔이 없다는 것을 알았 다. 백의여승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구나. 내가 어째서 자살을 한단 말이냐?" "저는 사태께서 너무나 슬퍼하시기 때문에 혹시 깨닫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내 스스로 자결을 하게 된다면 너는 황제 곁으로 돌아가게 될것이고 이후부터 크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니 더 좋지 아니한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소태감이 된 것은 부득이해서 였습니다. 오 랑캐의 군사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데 제가 어찌 적을 그 무엇이 냐..... 어버이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너는 그래도 양심이 있구나." 그녀는 몸에서 십여 냥의 은자를 꺼내더니 그에게 주며 말했다. "너에게 노자돈을 줄 테니 너는 양주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남들에게 은자를 줄 때도 이백 냥이나 최소한 백 냥은 되었는데 누가 이까짓 돈을 대단하게 여길까봐? 이 사태의 마음은 매우 부드러운 것 같다. 나는 아예 그녀의 호감을 사도록 해야겠다.) 그는 은자를 받지 않고 갑자기 땅바닥에 엎드려 그녀의 다리를 얼싸안 고 대성통곡을 했다. 백의여승은 눈쌀을 찌푸렸다. "무엇하는 것이냐? 일어나라, 일어나." "제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습니다. 한 번도 그 누가 저를 귀여워해 준 적이 없습니다. 사태, 그대는...... 그대는 정말 저의 어머님과 같 습니다. 저는...... 혼자 종종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한 분의...... 한 분의 저를 귀여워 해주는 어머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요." 백의여승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나직이 꾸짖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나는 출가인이야......" "네, 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눈물 자국으로 얼굴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울 고 싶을 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원래 그의 특기 가운데 하나였다. 백의여승은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나는 본래 북경에 가려고 했다. 그렇다면 너를 함께 데리고 길을 떠나 도록 하마. 하지만 너는 소화상이라......"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바라던 바다.) 그는 재빨리 말했다. "이 소화상은 가짜입니다. 산을 내려간 이후 다른 옷으로 바꿔 입으면 화상이 아니게 됩니다." 백의여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봉우리 아래 로 내려왔다. 험준하고 걸어가기 어려운 곳에 부딪히게 될 때마다 백의 여승은 가볍게 그의 옷자락을 들고 경쾌하게 건너 뛰었다. 위소보는 찬 탄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소림파의 무공이 천하에 이름은 알려져 있으 나 그녀에게는 도저히 미칠 수 없다는 말도 반복해서 지껄였다. 그 백의여승은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그러다가 위소보가 일곱 여덟 번 그와 같은 말을 하자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는지 말했다. "소림사의 무공은 독특한 데가 있다. 어린애야, 제발 우물 안 개구리처 럼 함부로 지껄이지 말아라. 단지 너의 칼과 창이 들어가지 않는 호체 신공만 하더라도 나는 모르고 있다." 위소보는 혓바닥을 낼름 내밀었다. "저의 호체신공은 가짜입니다." 그는 겉옷을 벗고 보의를 드러내 보였다. "이 잠방이야말로 칼과 창으로 꿰뚫을 수 없답니다." 백의여승은 손으로 잡아당겨 보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이 와 같이 잡아당기는 힘에는 강철로 만든 철사도 끊어질 판이었다. 그러 나 그 잠방이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원래 그랬었구나. 나는 본래 이상하게 생각했었지. 설사 소림파의 내 공이 정말 뛰어나다 하더라도 자네같이 어린 나이에 그토록 깊은 조예 를 쌓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마음 속의 의문을 풀게 되자 그녀는 무척 기쁜 듯 다시 웃으며 입을 열 었다. "너라는 어린아이는 말하는 것이 정말 솔직하구나." 위소보는 속으로 웃었다. 한평생 남에게서 솔직하다고 칭찬을 받은 적 이 거의 없었고 희귀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로 솔직하지 못하답니다. 그러나 사태 께 대해서는 한 마디 한 마디 진실을 토로하게 되는군요. 저 역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십중팔구 저는 사태를 아무래도 저의...... 저 의 어머님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이후부터 다시는 그 말을 들먹이지 말아라. 정말 듣기 거북하구나." "네, 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검끝으로 내 가슴팍을 꽉 찔러서 아직도 아프단 말이오. 내가 당신보고 이미 몇 마디 어머니라고 불렀으니 그야말로 서로 손해를 보 지 않게 된 셈이외다.) 그가 다른 사람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갈보라고 욕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의기양양해진 끝에 그는 다시 백의여승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녀는 우아하고 존귀한 기품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서부터 존경심 이 우러나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녀를 몇 번이나 어머니라고 불렀 다는 사실이 후회스러웠다. 그는 다시 백의여승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하지 않는가? 그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물론 위소보로서는 백의여승이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 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저 잠방이는 내가 진작 생각했어야 했다. 그이...... 그이에게 도...... 이와 같은 보의가 하나 있지 않았던가?) 백의여승은 산을 내려갔다. 그리고는 동쪽으로 꺽어 들었다. 한 고을에 이르러서 위소보는 옷을 샀으며 소년 공자 차림으로 분장을 했다. 길을 가면서 그는 객점의 사환들을 시켜 정갈한 소찬으로 백의여승을 대접하게 했다. 그는 그야말로 백의여승에게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들었 다. 백의여승은 반찬에 대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매우 따지는 편이었다. 큰 부자집이나 귀한 집에서 태어난 것 같았다. 위소보에게는 은자가 많이 있었다.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면 인 삼, 연와(燕窩), 은이(銀耳) 등을 따지지 않고 아무리 귀하고 비싸더라 도 돈을 주고 샀다. 그는 북경의 황궁 주방을 관장하고 있었기에 소찬 에 대해서 아는 것이 퍽이나 많았다. 때로 객점의 숙수(요리사)가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 모를 때는 오히려 그가 주방으로 가 가르쳐 주기도 했으며 그렇게 해서 만든 음식은 황제 께서 드시는 수라상의 음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며칠 후 그들은 북경에 도달했다. 위소보는 한 커다란 객점으로 찾아 들었다. 그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열 냥의 은자를 행화전으로 내놓았다. 객점의 주인은 여승이 객점에 든 데 대해서 약간 뜻밖으로 생각하는 눈 치였다. 그러나 귀공자의 돈 씀씀이가 헤픈 것을 보고 은근히 환대를 했다. 점심을 먹은 후 백의여승은 말했다. "나는 매산에 가 보겠네." "매산으로 가시겠습니까? 그곳은 숭정황제가 돌아가신 곳이 아닙니까? 우리 가서 몇 번 절을 하도록 하지요." 그 매산은 바로 황궁 옆에 있어서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산 위에 오르게 되자, 위소보는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며 말 했다. "숭정황제께서는 바로 저 한 그루의 나무 위에서 목 메달아 돌아가셨 죠." 백의여승은 손을 뻗쳐 나무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손과 팔을 끊임없이 떨었다. 눈물이 주르륵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자기 그녀는 대성통곡을 하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위소보는 그녀가 슬피 우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하니 그녀가 숭정황제를 알고 있단 말인가?) 다른 생각도 떠올랐다. (혹시 그녀는 도고모처럼 대명나라 황궁의 궁녀였는지도 모른다. 그리 고 어쩌면 숭정황제의 비빈인지도 모르겠구나. 아니다. 나이가 틀리다. 그녀는 늙은 갈보보다도 더욱 젊으니 결코 숭정황제의 비빈이 될 수 없 을 것이다.) 그녀는 매우 슬피 울며 숨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위소보 는 그 광경을 보고 자기도 참을 수 없어 눈물을 흘렸으며 땅바닥에 엎 드려 그 나무를 향해 몇 번 절을 했다. 이번만은 일부러 우는 흉내를 낸 것이 아니고 정말 진정으로 운 것이었다. 백의여승은 한참 동안 슬피 통곡을 하더니 몸을 일으키고 나무를 얼싸 안았다. 갑자기 전신을 와들와들 떨더니 그만 까무러치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깜짝 놀라 재빨리 부축하며 부르짖었다. "사태, 사태! 빨리 정신을 차리세요." 한참 후에야 백의여승은 차츰차츰 깨어났다. "우리는 황궁으로 가 보자꾸나." "좋습니다. 우리는 먼저 객점으로 돌아가지요. 제가 가서 태감의 옷을 한 벌 구해 오겠습니다. 사태가 바꿔 입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사태를 모시고 궁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백의여승은 노해 부르짖었다. "내가 어찌 오랑캐의 옷을 입는단 말이냐?" "네, 네. 그렇다면......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사태께서는 라마 로 가장하십시오. 황궁에는 종종 라마가 드나든답니다." "나는 라마로도 분장하지 않겠다. 이대로 궁안으로 들어가 누가 나를 저지하는지 보겠다." "네. 그 시위들도 사태를 막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 만...... 그렇게 된다면 크게 살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사태께서는 그저 사람을 죽이느라고 바쁘셔서 차분하게 정탐을 하실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는 백의여승과 이대로 황궁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백의여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옳아. 오늘밤 어둠을 틈타서 궁안으로 뛰어들기로 하자. 자네 는 객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게. 위험을 당하지 않도록 말이야."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함께 가겠습니다. 사태 혼자 궁안으로 들어 간다면 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황궁 안은 제가 저의 집 사정 처럼 잘 안답니다. 그곳 지형에도 익숙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잘 알 고 있죠. 사태께서 보고 싶은 곳이 있으시다면 제가 그곳으로 모시겠습 니다." 이경 무렵이 되었을 때 백의여승과 위소보는 객점에서 나왔다. 그리고 궁궐 담장밖에 이르렀다. 위소보는 입을 열었다. 위소보는 입을 열었 다. "우리들은 동북 모퉁이 쪽으로 돌아가기로 하지요. 그곳의 궁담장이 비 교적 낮습니다. 그곳에는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라 시위가 순찰을 돌지도 않는답니다." 백의여승은 그가 가리키는 대로 북쪽 열 세 채의 집이 나란히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위소보의 허리를 껴안고 가볍게 궁안으로 뛰어들었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낙수당(樂壽堂)과 양성전(養性殿)입니다. 사태께서 는 어느 곳을 구경하시려고 합니까?" "어떤 곳이든 다 보겠네." 그들은 서쪽으로 향했다. 낙수당과 양성전 사이를 가로지르고 기다란 낭하를 빙 돌아 현궁보전(玄穹寶殿), 경양궁(景陽宮), 종수궁(鍾粹宮) 을 지나 어화원(御花圓)으로 들어섰다. 백의여승은 어둠속이었나 매우 신속하게 나아갔으며 모퉁이를 돌 때도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시위들과 순라를 도는 야경꾼을 만나면 집 모퉁이나 숲속에 몸을 숨겼다. 위소보는 크게 이상하게 생각 했다. (그녀는 어떻게하여 궁중의 사정에 이토록 밝을까? 그녀는 이전에 틀림 없이 궁안에서 살았던 게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를 따라 어화원을 지나 계속 서쪽으로 나 아갔다. 그리고 곤녕문을 나서서 곤녕궁밖에 이르렀다. 백의여승은 잠시 망설이더니 물었다. "황후는 이곳에서 머물지?" "황상께서는 아직 혼례를 올리시지 않았기 때문에 황후가 없습니다. 옛 날 태후께서는 바로 이곳에 머물렀었지만 지금은 자녕궁으로 가 있답니 다. 지금 곤녕궁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들어가 보자." 그녀는 곤녕궁밖에 이르러 손을 뻗쳐 창틀에 손을 갖다대더니 살짝 힘 을 주었다. 그러자 창틀의 빗장이 우지직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부 서져 나갔다. 창문을 열어 젖힌 그녀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위소보 는 기어서 들어갔다. 곤녕궁은 황후의 침궁이었다. 위소보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다. 그 리고 침궁에는 오랫 동안 사람이 머물지 않았기 때문에 코에 와닿는 것 은 먼지와 매캐한 곰팡이 냄새였다. 희뿌연 달빛이 창호지 사이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어렴풋이 백의여승이 침대위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잠시후 톡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녀의 눈물이 옷자락에 떨어지 는 소리였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구나. 그녀는 십중팔구 도고모님처럼 본래는 궁안의 궁녀였고 명 나라 황후를 모셨던 모양이구나.) 문득 그녀가 고개를 쳐들고 대들보 쪽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주(周)황후께서는 바로...... 바로 이곳에서 자결하셨다." "네." 그는 속으로 더욱더 자기의 생각했던 바가 옳다고 확신하고 나직이 물 었다. "사태께서는 저의 고모님을 만나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너의 고모님이라고? 그녀는 어떤 사람이지?" "저희 고모님은 성이 도씨이고 이름은 홍영이라고 하죠......" 백의여승은 놀라 나직이 부르짖었다. "홍영이라구?" "그렇습니다. 어쩌면 사태께서 그녀를 알아보실지도 모르죠. 저의 고모 님은 옛날 숭정황제의 장공주(長公主)를 모셨던 사람입니다." "좋다, 좋아! 그녀가 어디 있지? 너는 빨리...... 빨리 가서 그녀를 나 에게 데려 오거라." 그녀는 줄곧 태연자약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에는 매우 초조해하는 기 색이 담겨 있었다. "오늘밤은 부를 수 없습니다." "어째서? 어째서이냐?" "저희 고모님은 대명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계시며 한때 오랑캐의 태후 를 찔러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찔러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궁안에 숨어 있는 형편이지요. 그녀가 오늘 저의 암호를 봐야 내일 밤 에 나를 만날 수 있답니다." "매우 좋다. 홍영이란 계집애는 정말 지조가 있구나. 너는 어떤 암호를 쓰느냐?" "저는 고모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쓰레기를 태우는 곳의 옆 의 바위 위에 한 대의 나무조각을 꽂아 놓으면 그녀는 즉시 알아보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곧 암호를 만들자꾸나." 그녀는 창밖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위소보의 손을 잡고 융복문(隆福門) 을 나서서 영수궁(永壽宮), 체원전(體元殿), 보화전(保華殿)을 지나 북 쪽의 쓰레기 더미에 이르렀다. 위소보는 한 조각 숯을 집어 나무 판대 기 위에 참새 한 마리를 그린 다음 어지러이 바위들을 쌓고 그 위에 나 무 판대기를 꽂았다. 이때 백의여승이 갑자기 말했다. "그 누가 오고 있다." 이곳은 궁중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곳인데 깊은 밤에 그 누가 온다는 것 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위소보는 백의여승의 손을 잡고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발걸음 소리가 사뿐사뿐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몸을 세우더니 사방을 살폈다. 위 소보가 꽂아 놓은 나무 조각을 보고 약간 어리둥절해하더니 다가와서 그것을 뽑았다. 그 사람이 몸을 돌리게 되었을 때 달빛이 그 사람의 얼 굴을 비추게 되었다. 위소보는 바로 도홍영임을 알고 속으로 크게 기뻐 서 불렀다. "고모님,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도홍영은 서둘러 달려오더니 대뜸 그를 끌어안고 기쁜 어조로 말했다. "정말 착한 애구나! 끝내 와 주었구나. 매일 밤, 나는 이곳에 와 본단 다." "고모님, 한 사람이 고모님을 뵙고자 합니다." 도홍영은 약간 의아하다는듯 그의 몸을 내려놓고 물었다. "누구냐?" 백의여승은 몸을 똑바로 세우고 나직이 말했다. "홍영, 너는...... 너는 아직도 나를 알아보겠느냐?" 도홍영은 위소년 외에 다른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해 깜짝 놀 라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허리께를 더듬더니 단검을 손에 뽑아들고 말했다. "누구......누구지?" 백의여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나를 몰라보는구나." "나는...... 나는 너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너는...... 너는......" 백의여승은 몸을 살짝 돌렸다. 달빛이 그녀의 반쪽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너의 모습도 많이 변했구나." 도홍영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 그대는......" 갑자기 그녀는 단검을 내던지고 부르짖었다. "공주, 그대이십니까? 저는...... 저는......" 풀썩 다가들더니 백의여승의 다리를 얼싸안았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엎 드려 흐느꼈다. "공주, 오늘에서 만나 뵙게 되었군요. 저는...... 이제 즉시 죽어 도...... 여한이 없습니다." 공주라는 한 마디에 위소보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곧 도홍영 이 들려 주었던 옛이야기를 상기했다. 그녀는 명나라 궁중의 궁녀였다. 줄곧 장공주를 모시고 있었다. 여진족이 북경으로 공격을 해오자 숭정 황제는 검을 들고 장공주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녀의 팔 하나만을 자르 고 말았고 도형영은 그 혼란 틈에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펴보니 황제와 공주는 모두 보이지 않았다. 대강 그러한 사연이었다. 위소보는 고개를 쳐들고 백의여승을 한 번 바라본 후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에게 한 팔이 없고 또 궁중의 사정에 대해서 이토록 잘알고 있으 며 또 곤녕궁에서 흐느껴 우는 것을 봤을 때 나는 진작 생각했어야 했 다. 내가 이제서야 깨닫다니 정말 커다란 천치바보이다.) 이때 백의여승은 말했다. "그 동안 너는 줄곧 이 궁안에 있었느냐?" 도홍영은 흐느끼며 말했다. "네." "이 어린 사람이 그러는데 너는 오랑캐의 황태후를 찔러 죽이려고 했다 는데 정말 잘했다. 그러나...... 그러나......"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도홍영은 말했다. "공주는 만금지체(萬金之體)이십니다. 이곳에서 지체해서는 안됩니다. 쇤네가 즉시 공주님을 궁에서 벗어나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미 공주가 아니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쇤네의 마음속에 그대는 영원히 공주이며 저 의 장공주이십니다." 백의여승은 처연히 웃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 방울이 완연 했는데 그 웃음은 더욱 처량한 감을 안겨 주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영수궁에는 지금도 사람이 거처하고 있겠지? 가 보고 싶구나." "영수궁은...... 지금 오랑캐의 건녕공주가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며칠 동안 오랑캐의 황제와 태후, 그리고 건녕공주도 모두 궁안에 있지 않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답니다. 영수궁은 지금 몇 명의 궁녀와 태감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쇤네가 그들을 죽이고 공주를 모시도록 하 지요." 영수궁은 공주의 침궁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명나라 장평공주(長平 公主)가 옛날 거처하던 곳이었다. 백의여승은 말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가서 보기만 하자꾸나." 그녀는 장평공주가 이미 초범입성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 고 그저 위소보가 그녀를 데리고 궁안으로 잠입해 들어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세 사람은 북쪽으로 향하다가 다시 서쪽의 철문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꺽어져 동쪽을 향했다. 순정문(順貞門)과 북오소(北五所),차고(茶庫)를 지나서 영수궁밖에 도달했다. 도홍영은 나직이 말했다. "쇤네가 들어가 궁녀와 태감들을 몰아내도록 하죠." "그럴 필요 없네." 그녀는 손을 뻗쳐 문을 밀었다. 문 빗장이 가벼운 소리와 함께 부러지 고 궁문이 활짝 열렸다. 백의여승은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이미 나라는 바뀌었지만 궁중의 규칙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영수궁은 백의여승의 옛 거처였다. 그녀는 태감, 궁녀들이 어디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뭇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일일이 여러 사람들의 혈도를 짚 어 버리고 공주의 침전으로 들어갔다. 도홍영은 기쁜 어조로 말했다. "공주, 뜻밖에도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계셨군요?" 백의여승은 침대가에 앉아 이십여 년 전의 옛일을 생각했다. 그때 자신 은 바로 이곳에서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으며 또한 그 사람과 한 이불 속에서 베개를 나란히 했었다. 그런데 이제 천하는 오랑캐들이 차지하게 되고 자기의 이 한칸 침실도 오랑캐 공주에게 빼앗기고 말았 으며 그 사람은 만리타국에 갔으니 살아 생전에는 다시 만나 보기 어려 우리라...... 도홍영과 위소보는 옆에 시립해 있었으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한 참 후에야 백의여승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 었다. "촛불을 켜게." 도홍영은 촛불을 켰다. 그러고 보니 벽, 탁자, 의자 위에는 모두 칼과 검, 가죽 채찍 같은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마치 무사의 거실 같았다. 백의여승은 말했다. "원래 이 공주 역시 무공을 좋아하는 성격이었군." 위소보는 말했다. "이 오랑캐 공주의 성질은 매우 괴상합니다. 비단 사람을 때리는 것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맞는 것도 좋아한답니다. 그러나 무공은 평 범하기 그지없어 저만도 못하답니다." 그는 침대 위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날 공주의 이불 속에 숨었다가 태후에게 잡혔던 사실을 상기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만약 그때 오룡령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은 아마 저승에 가서 소태감 노릇을 하며 염라대왕의 공주를 시중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백의여승은 나직이 말했다. "나의 그 그림들과 서적들은 모두 그녀가 내버렸는가?" 도홍영은 말했다. "네. 그 오랑캐 여자는 글조차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찌 단청과 도서를 알겠습니까?" 백의여승은 왼손을 쳐들었다. 소매가 살짝 흔들리며 촛불이 대뜸 꺼지 고 말았다. "자네는 나를 따라 궁에서 나가도록 하자." 도홍영은 말했다. "공주의 솜씨가 그토록 뛰어나니 만약 오랑캐의 태후를 잡는다면 그녀 를 다그쳐서 그 몇 권의 경서를 내놓도록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 게 된다면 오랑캐의 용맥을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경서인가? 오랑캐의 용맥은 또 무엇이지?" 도홍영은 즉시 사십이장경의 내력을 간단히 설명했다. 백의여승은 다 듣고 나더니 한참 동안 생각한 다음 말했다. "그 여덟 권의 경서 가운데 정말 그와 같이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고 오랑캐의 용맥을 깨뜨릴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겠지. 오랑캐 황태후가 궁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우리 다시 찾아오자." 세 사람은 영수궁에서 나왔다. 그들은 담장을 넘어 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객점으로 돌아가 쉬었다. 도홍영과 백의여승은 한방에서 머물렀다. 이십여 년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오늘밤 다시 옛날 주인과 한방에서 거처하게 되 니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어찌 잠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위소보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섯 권의 경서는 내 수중에 있고 한 권은 황상이 가지고 계시다. 그 리고 다른 두 권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공주이신 사태께서 늙은 갈보 를 다그쳐서 경서를 내놓으라고 하더라도 늙은 갈보는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한두 마디의 말로 공주 사태가 그녀를 죽이게 된다면 그 야말로 황상과 나의 눈에 박힌 가시를 뽑는 셈이 아니겠는가?) 며칠동안 백의여승과 도홍영은 객점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러나 위소보 는 매일같이 나가서 염탐을 했다. 황상이 이미 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는 가를 알아본 것이었다. 이레째 되는 날 오전에 강친왕, 색액도 다륭 등 이 한떼의 어전시위들과 더불어 몇 대의 커다란 교자를 호위해서 궁안 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에 한떼의 친왕들과 패륵, 그리고 각부의 대신들이 잇달아 궁안 으로 들어갔다. 물론 만승천자에게 삼가 절을 하고 편안히 다녀오셨음 을 축하하는 것이리라. 위소보는 객점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렸다. 백의여승은 말했다. "매우 좋다. 오늘밤 나는 궁안으로 들어가겠다. 오랑캐 황제가 이미 돌 아왔으니 궁중을 지키는 사람들은 지난번보다 엄밀하고 또 몇 배가 될 것이다. 그대들 두 사람은 객점에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게나." 위소보는 말했다. "공주사태,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도홍영 역시 말했다. "쇤네도 공주를 따라가고 싶습니다. 쇤네와 이 아이는 궁안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위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옛날 주인과 다시 만나게 되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백의여승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이날 밤 세사람은 태후가 거처하는 자녕궁밖에 이르렀다. 사방은 조용 했다. 백의여승은 두 사람을 데리고 궁 뒤로 돌았다. 그리고 위소보의 허리를 잡고 담장을 넘어 뛰어들었다. 땅위에 내려섰을 때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도홍영이 뛰어내리게 되었 을 때 백의여승은 왼손 소맷자락으로 그녀의 허리를 부축해 주었다. 위 소보는 태후 침전의 옆 창문을 가리키며 바로 태후가 그곳에 거처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고 두 사람을 데리고 후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자녕 궁 궁녀들의 거처였다. 창문에서 담담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백의여승은 방의 창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십여 명의 궁녀들이 나란히 걸상에 앉아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은 고개 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치 중이 입정한 것 같았다. 그녀는 가볍게 휘 장을 들추고 곧장 태후의 침전으로 걸어들어갔다. 위소보와 도홍영도 따라 들어갔다. 탁자 위에는 네 대의 붉은 초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방안에는 아 무도 없었다. 도홍영은 나직이 말했다. "쇤네는 세 개의 상자를 열어 보고 서랍 속도 모두 뒤져 보았습니다만 경서의 그림자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이구! 누가 오고 있습니다." 위소보는 그녀의 옷자락을 한 번 잠아당기고 재빨리 침대 뒤로 가 숨었 다. 백의여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도홍영과 함께 역시 침대 뒤에 숨었 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위해서 이 일을 해냈으니 저에게 어떤 상을 주 시겠어요?" 바로 건녕공주의 음성이었다. 그러자 태후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너에게 시킨 조그만 일을 가지고 상을 바라다니, 지나치구 나." 두 사람은 말을 하면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건녕공주는 말했다. "어마! 이게 작은 일이란 말이에요? 만약 황제 오라버니가 조사를하여 내가 가져간 것을 알게 된다면 크게 화를 낼 것이 틀림없어요." 태후는 앉으면서 말했다. "한 권의 불경을 가지고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 우리가 오대산으로 가 서 예불을 드린 것은 바로 부처님에게 보호해 주십사 하는 뜻 아니었 니? 그리하여 궁으로 돌아오게 된 이후에는 여전히 불경을 읽고 염불을 해야 보살께서 좋아하시지 않겠느냐?" "큰일이 아니라면 제가 황제 오라버니에게 이야기를 하겠어요. 어머니 가 저를 시켜 이 한 권의 사십이장경을 가져와 불경을 읽고 염불을 해 서 부처님에게 황제 오라버니의 나라가 편안하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되 기를 보호해 주십사 빌려고 했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황제 오라버니 만 세 만만세를 부르도록 하죠." 위소보는 속으로 기뻐했다. (정말 잘되었다. 원래 공주를 시켜 경서를 훔쳐 오게 했구나.)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운수가 좋지 못했다. 만약 이번에 백의여승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면 그 경서는 충분히 자기 손에 넣을 수가 있겠지 만 지금은 그런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태후는 말했다. "네가 가서 이야기하도록 해라. 황제가 만약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 일을 모르겠다고 딱 잡아뗄 것이다. 어린애가 함부로 한 말을 가지고 어찌 곧이 곧대로 믿는다더냐?" "어머니, 억지를 쓰시겠다는 거예요? 경서는 분명히 이곳에 있어요." 태후는 쳇 하고 웃었다. "내가 화로에 집어넣어 불태워 버리면 될 것이 아니냐?" 공주는 웃었다. "그만두겠어요. 그만 두겠어요. 나는 언제나 어머님을 이길 수 없더라. 정말 치사하다구요! 상을 내려 주시지 않으려면 그만 두지, 오히려 이 딸을 못살게 구시는군요." "너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데 또 무슨 상을 바라는거냐?" "저에게는 모든 것이 있지만 한 가지만은 없어요." "뭐가 없느냐?" "저와 함께 놀아 줄 소태감이 없어요." 태후는 웃으며 말했다. "소태감이라구? 궁안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소태감들이 있다. 네가 그 누구에게 너와 놀아 달라고 명령만 내리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그 소태감이 어딜 가겠느냔 말이다." "아니엥. 그 소태감들은 너무 우둔해서 함께 놀아도 재미가 없단 말이 에요. 나는 황제 오라버니 곁에 있는 그 소계자를 갖고 싶어요." 위소보는 흠칫했다. (저 죽일 계집애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그녀를 상대로 놀아 주기란 정말 쉬운 노릇이 아니다. 잘못하다가는 바로 이 한 목숨을 잃 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공주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황제 오라버니에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황제 오라버니는 소계 자를 북경으로 보내 일을 보게 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토록 오래 돌 아오지 않아요. 어머니, 어머니가 가서 황제에게 이야기해 보세요. 그 러면 그는 소계자를 나에게 줄 거예요."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이 계집애가 정말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쓰는구나! 내가 너의 손에 떨 어지게 된다면 매일같이 전신에 열 일곱 여덟 군데의 커다란 상처가 나 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성을 쓰마. 아이쿠! 공주의 성 이 뭐였더라? 공주는 소황제와 똑같은 성이다. 그런데 소황제의 성은 또 뭐였지? 나는 정말 멍청하구나. 여태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이대 태후는 말했다. "황제는 소계자에게 어떤 일을 처리하도록 내보냈다는데 너는 그가 어 디로 갔으며 무슨 일을 하러 갔는지 아느냐?" "그건 내가 알고 싶어요. 시위들의 말을 듣건데 소계자는 바로 오대산 에 있다고 하더군요." 태후는 아! 하고 나직이 놀라 부르짖었다. "그가...... 바로 오대산에 있다구? 그럼 이번에 우리는 어찌 그를 만 나 보지 못했지?" "저 역시 궁으로 돌아온 이후에야 시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요. 그런 데 황제 오라버니가 그를 오대산으로 무엇 때문에 보냈는지 알 수가 없 네요. 시위들의 말을 들으니까 황제 오라버니는 그의 벼슬을 또 높여 주었데요." 태후는 음 하더니 잠시 동안 생각해 보고 말했다. "좋다. 그가 궁으로 돌아온다면 내가 황제에게 이야기 하도록 하지." 그런데 그 음성은 매우 떨리고 있었으며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듯한 기 미가 엿보였다. "이제 늦었으니 너는 돌아가 자거라." "어머니, 저는 돌아가지 않을래요. 어머니와 함께 자겠어요." "너는 어린애가 아니다. 어째서 너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느 냐?" "저의 방에는 도깨비가 나와 무서워요." "터무니없는 소리, 무슨 도깨비란 말이냐?" "어머니, 정말이에요. 저의 궁안의 태감과 궁녀들도 모두 말했어요. 며 칠 전 밤에 모든 사람들이 도깨비에게 홀렸대요. 그리하여 이튿 날 점 심 때에 가서야 깨어났으며 하나같이 악몽을 꾸었대요."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있겠느냐? 그들이 함부로 지껄인 말을 믿지 말 아라. 우리들이 궁에 없으니까 그들은 내심 무서워서 도깨비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빨리 돌아가거라." 공주는 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잘 주무시라는 인사와 함께 물러갔다. 태후는 탁자가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턱을 고이고 촛불을 바라본 채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한참 후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 렸다. 그런데 바로 이때 벽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춤추는 촛불을 따라 미미하게 어른거리고 있지 않는가? 그녀는 자기의 눈이 가물가물해져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나다를까, 두 개의 그림자였다. 하나는 자기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 기의 그림자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기가 과거에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자 불현 듯 전신의 솜털이 올올이 곤두섰다. 아무리 일신에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감히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도깨비에게는 그림자가 없다고 했다. 그림자가 있다면 도깨비가 아니 다.) 그러나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지만 주위에서는 다른 사람이 들이마시 고 내쉬는 숨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극도로 놀라 전신에 맥이 빠져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벽에 어른거리는 두 그림자를 바라보 면서 거의 까무라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별안간 침대 위쪽에서 나직이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속으로 기뻐 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한 백의여승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쌍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들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용모 가 지극히 아름답긴 하나 표정이 없이 딱딱했다. 사람인지 도깨비인지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태후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당신은 누구시오?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 죠?" 백의여승은 냉랭히 물었다. "너는 누구이지? 어째서 이곳에 있지?" 태후는 그녀의 말하는 소리를 듣자 놀란 가슴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가 있었다. "이곳은 황궁의 내원이에요. 당신은...... 당신은 정말 대담하군요." 백의여승은 냉랭히 말했다. "맞았어. 이곳은 황궁의 내원이지. 도대체 당신이 무엇인데 대담하게 이곳까지 왔지?" 태후는 노해 말했다. "나는 황태후이다! 당신은 어디서 나타난 요사한 사람이냐?" 백의여승은 오른손을 뻗쳐 태후 면전에 놓인 그 사십이장경 위에 손을 얹더니 천천히 그 불경을 들었다. 태후는 호통을 내질렀다. "손을 놔랏!" 휙! 하니 일장을 들어 상대방의 안면을 공격해 갔다. 백의여승은 오른 손을 쳐들고 그녀와 일장을 마주쳐 교환했다. 태후는 몸을 흔들하더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직이 호통을 내질렀다. "좋아! 알고보니 무림의 고수였군!" 상대방이 도깨비가 아닌 것을 알게 되자 두려운 마음이 모두 가셨다. 그녀는 달려들어 휙휙 하니 잇달아 사장을 후려쳤다. 백의여승은 의자 에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경서를 품속에 집어 넣고서야 손을 들어 그녀가 공격해 온 사초를 일일이 해소시켰다. 태후는 그녀가 경서를 집어넣는 것을 보자 놀람과 분노에 얽혀 더욱더 장력에 힘을 주었다. 삽시간에 잇달아 다시 칠팔 초를 공격했다. 백의 여승은 일일이 해소시켰으나 시종 반격하지 않았다. 태후는 손을 뻗쳐서 오른쪽 다리를 더듬었다. 어느덧 그녀의 손에는 한 자루의 싸늘한 광채가 감도는 짧은 무기가 들려 있었다. 위소보는 정신 을 가다듬고 바라보았다. 태후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한 자루의 백금 점강아미자(白金點鋼蛾眉刺)였다. 바로 그날 해대부를 죽일 때 사용한 무기였다. 그녀는 무기를 손에 들자 더욱더 기세가 등등해져서는 잇달아 백의여승 을 찔러갔다. 손으로 후려치고 아미자로 찌르는 등 침실안은 그저 한줄 기의 하얀 광채가 번개처럼 번뜩이게 되었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내가 나가서 그녀를 멈추게 하겠소. 사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말이오." 도홍영은 그를 잡아당기며 나직이 말했다. "그럴 필요없네." 그러고 보니 백의여승은 여전히 차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 른손 식지로 동쪽을 한 번 찌르고 서쪽을 한 번 찌르면서 태후의 날카 롭기 이를데 없는 공세를 일일이 해소시켰다. 태후는 벼락같이 들이닥 쳤다가 벼락같이 물러나곤 했으며 갑자기 몸을 솟구쳤다가는 갑자기 몸 을 웅크리듯 하는데 쾌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촛대의 불꽃이 더욱더 뒤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별안간 방안이 어 두컴컴해졌다. 네 자루의 촛불 가운데 두 자루가 꺼진 것이었다. 몇 초 더 싸우게 되자 나머지의 두 자루 촛불마저도 꺼져 버리고 말았다. 어둠속에서 그저 장풍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태후의 가 쁜 숨소리만 들려왔다. 별안간 백의여승이 냉랭히 말했다. "그대는 황태후의 신분으로 이와 같은 무공을 어디서 배웠지?" 태후는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힘써 공격을 했다. 별안간 철썩 하는 맑 은 소리가 네 번 울려퍼졌다. 아마도 태후가 얼굴에 네 대의 따귀를 얻 어맞은 모양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아 하는 소리를 부르짖었는데 그 소 리는 분노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어서 쿵! 하는 소리가 한 번 들리더니 방안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어둠속에서 불빛이 번쩍했다. 백의여승은 두 손으로 이미 하나의 화섭 자에 불을 켜 들고 있었다. 태후는 뻣뻣하게 그녀의 앞에 꿇어앉아 있 었는데 꼼짝도 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오늘은 기필코 저 늙은 갈보를 죽여야지.) 이때 백의여승이 화섭자를 가볍게 위쪽으로 던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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