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의 고향 안동을 찾아서
가을이 무르익고 있는 어제(9/24)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동연회(안동지역 출신 재경교수모임)에서 근 4.5년만에 안동을 찾아가기로 했다. 동연회라는 모임은 안동과 그 주변지역(영주, 봉화, 예천, 의성, 영양, 영덕 등) 출신으로서 서울에서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행에 참석한 인원은 22명이었다.
8시에 출발하여, 11시 경에 안동 인근의 풍산읍에 도착하였다.
재령 이씨의 문중인 이민정과 이민각 형제 선비의 형제애를 상징하는 체화정에 들렀다.
이어 안동시내로 들어가, 광산김씨 종가였던 집을 사들여 새로이 단장한 권오춘씨의 구담정사에 들렀다. 권오춘씨(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는 성공한 기업인으로 자신의 고향의 문화를 선양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는 광산 김찌 종택을 사들였으나, 그 집을 판 광산김씨 문중에서 되팔 것을 요구하였으나 자신이 너무나 이집을 많이 고쳤기 때문에 팔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하회마을로 들어가, 마을을 돌아본 것이 아니라, 마을 앞을 휘돌아가는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서애 유성룡의 집필실 옥연정사를 둘러보았다. 서애는 이 집에서 징비록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강변 북벽 위에 선 부용대 위에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전경이 그만이었다.
이어서 병산 서원에 들러 만대루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였다. 만대루에는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건물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금하고 있다.
점심을 먹고,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로 평가가 최종적으로 확정된 봉정사 극락전을 찾았다. 안동에는 5개의 국보가 있는데, 봉정사에 2개(극락전과 대웅전),하회마을의 탈과 역시 하회마을의 징비록, 그리고 안동댐가에 서 있는 7층 전탑이 그것들이다.
이때까지는 부석사 무량수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공인되고 있었으나 최근 봉정사 극락전으로 공식적으로 수정되었다.
이어서 <원이엄마 상>으로 이동했다. 원이엄마 상은, 16세기 안동지방 한 무덤에서, 20대에 남편을 여윈 한 여인 원이엄마가, 남편의 무덤 안에다가 혼자 먼저가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라고 하느냐는 애절한 편지를 써서 넣었는데, 그 무덤의 발굴시 그것이 훼손되지 않고 발견되어 큰 화제를 뿌린 적이 있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낙동강 강변에 입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이어서 <안동 독립운동 기념관>으로 이동하여 관람하였다. 시설이 뛰어나고 전시 내용이 풍부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립운동 기념관의 부속시설인 숙박시설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시설이 뛰어나고 깨끗하여 좋은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저녁 식사로 미리 준비한 보신탕과 안동 식혜가 제공되어 오랜만에 고향의 음식을 맘껏 들 수 있었다.
안동 독립운동가들로서는 해삼위에서 13도 의군 도총재로 추대되었던 서간도의 의병장 의암 유인석, 서로군정서의 독판과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 마주벌판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통의부의 총장을 지냈던 일송 김동삼,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 등이 있어서 유난스레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였다. 기념관 한편에 서 있는 안동출신 독립운동가 1000 인의 기명 기념물은 눈길을 끌었다.
이튿날 아침, 기념관 가까이 있는 내앞마을에서 학봉종택을 방문하였다. 학봉 김성일은 의성김씨 시조로서 조선통신사로 도일하여 일본의 전쟁준비상황을 살피고 오라는 선조의 명을 받았다. 그는 정사 황윤길의 의견과는 다르게 전쟁발발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영남병사로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의성김씨를 비롯한 안동사람들의 학봉 사랑은 대단한 바가 있다. 조선조에서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을 안동이 배출한 3대 걸출한 인물로 꼽는다.
학봉의 선친은 청계공 김진으로서, 당파싸움에 회생되는 자손들을 구하기 위해 벼슬을 참판 이상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의성김씨로서 서울시립대학 부총장을 지내신 김원교수가 정년 후 고향으로 낙향하여 바로 학봉 종택 근처에 살고 있어서 몰려가 차를 한잔씩 하였다. 이 일대를 안동사람들은 내앞마을이라고 한다.
청계공 김진의 후손들은 넷째 아들 학봉을 비롯하여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다. 현 한국에서도 크게 활동하는 포항공대 총장을 지낸 김호길박사, 현 총장이신 김영길 박사 그리고 우리 동연회의 존경받는 명예회장이신 김종길 교수들이 모두 학봉의 후손들이다. 이들 두분 학봉의 후손들은 세계적인 공과대학인 오늘날의 포스텍을 만든 장본인들이다.
학봉의 지방수령으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학봉은 호남의 대읍인 나주의 목사로 나간 적이 있었다. 관할구역인 영암고을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송사 하나가 들어와서 학봉의 판결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송사의 원고는 양반 이지도였고, 피고인은 노예 다물사리라는 82세의 여종이었다. 원고는 다물사리가 양반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혀달라는 것이었고, 다물사리는 자신이 노비호적에도 올라가 있는 노비라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의 노비제도는 종모법을 따라서 여자종이 출산시는 자식은 아비가 어떤 계층이건 노비가 되어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남자종이 여자 양반가의 딸과 혼인했을 때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럴 경우는 종부법을 따라 자식이 노비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남자 종의 주인의 소속이 된다는 것이다. 종부법은 당시 양반들이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수단이 되어, 자신 집의 남자종을 양반집 딸과 혼인시키는 경우가 흔히 있었고, 조선 중반기에 남자 종의 3분의 1이 양반집 딸과 혼인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피고인 다물사리는 여자종이지만 공노로서 관청에서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가외노비라 하여 독자적인 주거를 가질 수 있었고, 근무도 출퇴근하였다.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어서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양반가의 딸임이 판명되면 남편의 신분을 따라서 가내노비가 되어 양반댁의 행랑채에 기거하면서 소나 돼지처럼 근무해야만 했다. 다물사리는 이점을 노려 자신의 남자종 신분의 남편에게서 자신 소생 6형제를 빼내서 공노비의 신분을 부여하기 위해 영암고을의 아전과 짜고 호적을 조작하였던 것이다.
부사 학봉은 이 사실을 밝혀내고 다물사리가 양반가의 딸이었음을 들어 남편과의 사이에 출생한 자식 6명이 원고 이지도의 종임을 밝혀냈다는 재판기록이 학봉 종택에 보관되어 있다.
학봉 종택 바로 옆집이 학봉의 둘째 형인 귀봉의 종택이다. 귀봉은 임진왜란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여 그 일기를 매일 매일 썼다. 그래서 이순신의 <난중일기>, 서애 유성룔의 <징비록>, 귀봉의 <호종일기>를 임진왜란 삼대 저작물로 보고 있다.
이육사의 문학박물관에 들렀다. 이육사의 형이 이원조라는 사람인데, 해방 후 가장 뛰어난 문학평론가였다. 월북하여 크게 활동하였으나 남로당 제거시 제거되었다.
집사람(김갑영 공주대교수)의 외삼촌이 고 이원흡으로서 뛰어난 서예가 인데, 바로 육사의 본명인 원록과 같은 항렬이고 실제적으로 같은 마을(예안 마을)에서 태어나 같이 성장한 가까운 집안이었다.
이어 도산서원에 들렀다. 근 5년만에 찾아온 도산서원이었다 서원 앞의 큰 호수가 바로 집사람의 친정이 살던 예안마을로서 안동댐 건설시 수몰되었다. 장모님이 태어나 사시던 집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하여 민속마을의 앞산에 조성된 민속촌으로 집이 옮겨졌다. 그 집들 중에서 <이필구의 집>이 바로 그집이다.
이어서 국학진흥원으로 옮겼다. 원장인 김병일 전 장관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김 원장은 필자와 서울대 문리대 동기생으로서 그 인연으로 일행에게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냈다.
김병일 원장은 일요일인데도 출근하였으며 흰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있어서 우리를 환영하는 마음을 잘 읽게 했다.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냈으나 재임중 건강을 핑계되고 장관을 일년 이상 하기 싫다고 스스로 사표를 던진 사람으로 유명하다. 문리대 사학과 출신으로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원장이 일요일 출근을 하니 과장급들이 전부 출근하여 우리를 반겼고 좋은 비리핑을 했다.
먼저 장판각으로 올라가 관람하였는데, 730 여 문중에서 위탁한 족보와 문집등 30만점 이상이 빼곡이 진렬되어 있었다. 놀라움이 가슴을 채웠다. 편액관도 돌아보았다. 정자나 종택 등의 대문에 걸려 있던 문구를 적은 나무판을 편액이라 하는데, 지금 현재로도 800 여개가 수집되어 있었다.
안동에는 삼다(三多)가 있다고 하는데, 산과 서책과 인물이라고 한다.
이렇게 서책과 족보, 판본, 편액등이 이 안동지역에 넘쳐나는 이유는 물론 유학의 고향으로서 안동 선비들의 남다른 향학심의 결과로도 볼 수 있지만, 순조 철종 시의 안동김씨 집권시기를 제외하면 서인 노론의 중앙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들이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고향마을에서 하는 일이 없으니까 오직 서책을 벗삼았었다는 사실에서도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유교문화박물관으로 옮겨서 관람하였다. 5년 전에 갔을 때보다 훨씬 많은 소장품이 진렬되어 있었다. 관람이 끝나고 브리핑실에서 실무과장 다섯명이 참석한 가운데 브리핑이 있었은데, 나는 국학진흥이기 때문에 너무 유교에만 기우러지지 말고, 봉정사나 부석사도 있고 하니 불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어제 본 안동독립기념관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음을 나는 지적하였다. 안동 유림들이 만주로 이주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은 유림세력이 아니라, 동학란의 주동세력인 천도교 세력임을 지적하였다. 너무 지나치게 유림세력 위주로 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장품도록을 삼만원에 구입하였다. 김병일 원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틀간 숨돌릴 사이도 없이 안동을 품으려고 돌아다닌 것같다. 몇장의 사진과 수많은 팜풀렛 그리고 문집들과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몇권의 책이 남아 있다.
참여자 명단: 권순(초당대), 권원오(서울시립대), 김갑영(공주대), 김경동(카이스트, 서울대), 김재은 (이화여대),김부동(서울산업대),김용호(인하대), 깁봉구(고려대), 김하진(아주대), 김대원(경기대), 김원(서울시립대), 신명순(연세대),이동원(이화여대),이장우(영남대),이준오(숭실대), 유세희(한양대), 정소성(단국대), 황재국(강원대),이장욱(영화감독)
내앞마으에 있는 학봉 종택
풍산 양반 이민적과 이민각의 형제애를 담고 있는 채화정
광산 김씨 종택이었던 구담정사
강 건너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하회유씨 종택은 양진당이고 서애 사당 충효당은 서애 몰 후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사애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옥연정사, 영의정에서 은퇴한 서애는 너무나 가난하여 이 정사를 스님의 시주로 10년에 걸려 지었다.
병산 서원의 누각
국보인 만대루의 모습
만대루의 아래면
한국 최고령의 목조건물로 밝혀진 봉정사 극락전으로 가는 길
국보
원이 엄마의 청동조상
김지섭 아상룡 김동삼 지사와 함께
학봉 종택
국학연구원 김병일 원장과 함께
이육사 문학관 앞에서
이육사와 동시대의 경북 문인들
국학연구원의 장판각 판각본 실에서
국학연구원 편액본 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