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모를 비목이여 - 한명희
- 비목 작사자가 되새기는 6.25의 슬픔 -
6월의 묘표에서 발효된 비목
6월 ...... 비록 파종의 노역과 보릿고개의 쓰라림이 기다리고 있었다해도 우리의 정서만은 그래도 윤택했고 정스러웠으며 싱그런 물기마저 돌았었다.
하늘은 푸르고 대지도 푸르며 그 얼품에 우리의 속알도 마냥 푸르기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진달래 철쭉이 산불을 지르고 햇나물 두룹순에 가슴이 물들면 싱그러운 6월의 산하엔 온통 사랑과 낭만과 희열로 일렁이며 우리의 삶은 더불어 아름답고 덩달아 즐거워지더 게 저만큼 엊그제까지의 우리네 인박힌 생활감각이요 대물림된 토속감정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6월, 자연의 축복이 일렁이고 생명의 희열이 출렁이던 우리의 6월은 이제 그만 그 오묘하고도 신비스런 빛깔을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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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름이 푸르름이 아니고 싱그러움이 싱그러움이 아닌 6월, 그것은 이미 우리네 어제의 6월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결코 삶의 축복도 희망도 낭만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차라리 절망이요 비탄이며 참담한 저주였음에 틀림없었다.
그 어느해이던가. 그러니까 연초록 옷자락이 태백의 준령 백두의 정봉까지 물빛 차일을 칠 때 붉은 공룡의 발자국이 뚜벅뚜벅 반도의 등성이를 짓밟고 나던 후텁지근한 어느해 6월, 바로 그해 그달부터 우리의 6월은 찬연한 빛을 잃고 잿빛 하늘아래 오열하고 신음하며 겨레의 천추의 한을 증언해오고 있지 않던가.
태양도 차마 먹구름속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늘도 땅도 창백하게 푸르름을 잃던 그해 그달부터 기실 비목의 싹은 우리들 모두의 가슴 속에 돋아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비목의 주제의식은 민족의 통한이 응어리진 짙푸른 6월의 묘포에서 발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육군소위가 본 갈대밭의 저녁노을
이처럼 누구나의 가슴속에 앙금져 있던 비목적 인자가 한그루 가녀로운 묘목을 태어나게 된 것은 그후 10여 성상의 세월이 흐르고 멀리 인적없는 강원도 두메산골 첩첩산중의 양지바른 계곡에서 어느 다감한 청년 장교의 순진한 감성을 맞나고 난 후의 일이었다.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양지녘'인 백도라지의 심심산골 화천북방의 백암산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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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ROTC 육군소위로 수색중대 DMZ의 초소장으로 근무하던 곳은 바로 화천북방의 백암산 우전방이었다. 평화의 댐을 지나 북한강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멀리 금강산으로부터 발원하는 북한강이 금성천이라고 하는 또하나의 지류를 불러들이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이 일대의 고지들이 내가 복무하고 있던 현장이었으며 비목이 잉태된 온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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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초록빛 등고선이 하루가 다르게 성큼성큼 산마루로 솟아오르고 가을이면 분홍빛 단풍의 물결들이 하루가 뒤질세라 성큼성큼 갯벌까지 뛰어 내리던 백암산 일대의 사철. 그 속에서 낙원인 양 무리지어 뛰노는 맷돼지와 노루들의 생태란 또 얼마나 인상적이었던가. 따스한 양광 속에 산간의 정적을 깨뜨리던 방정맞은 궝소리는 그 얼마나 춘흥에 겨웠으며 북한강변 백사장에 내여와 물 한모금 마시고는 구름 한점 없는 창공을 응시하며 먼 태고의 전설을 얽어내던 숫노루의 모습은 또 얼마나 의젓했던가. 바로 거기 강변의 외로운 노루를 소재로 해서 어줍잖은 한시 한 귀절을 엮어 은사에게 보냈던 일은 지금와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붉어지는 치기어린 추억으로 애써 잊어두고 싶은 사연이지만 이 또한 모두가 이곳 '별유천지비인간'의 감격스런 풍광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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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감동적인 환경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정감을 체감했고 참으로 많은 섭리를 터득했으며 참으로 많은 역리를 앓아보기도 했다.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한 박소위는 소위 예능계를 졸업했다는 나 못지않게 다감했던 터라 우리는 곧잘 같은 정황에 공통된 반응을 보이곤 했었다. 두견이 우는 봄밤이나 궂은비 내리는 여름날이면 우리는 으례 전화를 연결하여 저만큼 갓나온 학창을 그리며 못하는 노래까지 돌려부르지 않았던가. ...... 선무용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진주가 천리길'도 구성졌으며 특히나 교교한 '전선의 달밤'에 당대의 히트곡이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가냘픈 전파를 타고 허허로운 적막강산에 물결질 때의 그 애절한 여운이란 문자 그대로 폐부까지 스며드는 듯 싶었다.
포탄에 벗겨진 대머리산
...... 그때 당시만 해도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이란 고작 잡초속에 나뒹구는 녹슬은 군사분계선의 철조망 한가닥뿐이었다. 그래서 호전적인 저들은 무시로 분계선을 넘어와 도발한다던가 시지어 이쪽 장교를 업어가고 목까지 잘라가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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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지금와 생각해도 비목의 배경은 이같은 전쟁의 여운과 강원도 산골의 아름다운 자연이 모태가 되었음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비목은 전쟁의 잔해를 아버지로 하고 북한강 상류 백암산 주변의 남다른 정취를 어머니로 해서 태어난 한 세대의 시대적 산물이자 우리네 전쟁사를 일깨워주는 하나의 상징물이라고 해도 과히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백암산이나 북한강 일대의 산야가 6.25 당시 대단한 격전지였음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특히 금성천변의 확트인 개활지를 경계로 해서 이쪽의 백암산과 대성산 저켠의 김일성 고지나 오성산이 딱 버티고 있는 지형적 조건으로 보나 혹은 파로호의 구만리 발전소를 쟁취하려는 피아간의 군사적 전략으로 보나 그야말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 격전지가 아닐 수 없는 숙명적 여건을 지녔던 산하가 바로 오늘도 소쩍새 울어예는 이곳 북한강변 백암산 줄기 줄기 이름모를 능선들이었던 것이다.
국군은 죽어서 말하는가
막사 주변의 빈터에 조금만 삽질을 하면 여기저기서 뼈가 나오고 해골이 나왔으며 땔감을 위해서 톱질을 하면 간간이 톱날이 망가지며 파편이 나왔다. 순찰삼아 돌아보는 계곡이며 능선에는 군데군데 썩어빠진 화이버며 탄띠조각이며 녹슬은 철모 등이 나딩굴고 있었다. 실로 몇개 사단의 하고 많은 젊음이 죽어갔다는 기막힌 격전의 현장을 똑똑히 목도한 셈이었다.
그후 어느날 나는 그 격전의 능선에서 개머리판은 거의 썩어가고 총열만 생생한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왔다. 그러고는 깨끗이 손진하여 옆에 두곤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해서 가없는 공상을 이어가기도 했다.
전쟁 당시 M1 소총이 아닌 카빈의 주인공이면 물론 소대장에 계급은 소위렸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나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로 산화한 것이 아니겠는가.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에서처럼 먼 고향의 아내는? 아니 그리운 초동친구, 애틋한 연인, 인자하신 학발양친, 그리고 고향에, 학력에, 사랑의 설계, 인생의 꿈은...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바람따라 구름따라 포연에 실려 무산되고 말았다.
처음 비목을 발표할 때는 그 가사의 생경성과 그 사춘기적 무드의 치기가 부끄러워서 한일무라는 가명을 썼었는데 여기 일무라는 이름은 바로 이때 응결된 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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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왕년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어느날 초가을의 따스한 석양이 산록의 빠알간 단풍의 물결에 부서지고 찌르르르 산간의 정적이 고막에 환청을 일으키던 어느 한적한 해질녘, 나는 어느 잡초 우거진 산모롱이를 돌아 양지바른 산모롱이를 지나며 문득 흙에 깔린 돌무더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필경 사람의 손길이 간 듯한 흔적으로 보나 푸르칙칙한 이끼로 세월의 녹이 쌓이고 팻말인 듯 나딩구는 썩은 나무등걸 등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결코 절로 쌓인 돌이 아니라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런 육군소위의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많던 젊은 장교의 마지막 증언장이었음에 틀림없다.
산목련의 사연은 어딜 가고
그후 세월의 밀물은 2년 가까이 정들었던 그 능선 그 계곳에서 나를 밀어내고 속절없이 도회적인 세속에 부평초처럼 표류하게 했지만 나의 뇌리, 나의 정서의 텃밭에는 늘 그곳의 정감 그곳의 환영이 걷힐 날이 없었다.
그러더 어느 시절, 그러니까 내가 당시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면서 우리 가곡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쏟던 의분의 시절(얼굴, 기다리는 마음 같은 노래도 이즈음에 제작되었음), 그때 나는 방송일로 자주 만나는 작곡가 장일남으로부터 신작가곡을 위한 가사 몇편을 의뢰받았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내 머리속을 스치고간 영상이 다름아닌 그 첩첩산골의 이끼덮인 돌무덤과 그 옆을 지켜섰던 새하얀 산목련이었다. 나는 이내 화약냄새가 쓸고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의 이름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주인공따라 순절한 연인으로 상정하고 사실적인 어휘들을 문맥대로 엮어봤다.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이렇게 해서 비목은 탄생되고 널리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여기 가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비목의 첫귀절인 '초연이 쓸고간 깊은계곡 양지녘'에서 그 첫 단어인 '초연'은 화약연기를 뜻하는 초연이며, 한때는 비목이라는 말 자체가 사전에 없는 말이고 해서 패목의 잘못일 것이라는 어느 국어학자의 토막글까지 있었던 처지고 보면, 언젠가 비목의 노래하던 원로급 소프라노가 '궁로루산'이 어데 있느냑고 묻던 무딘 센스는 차라리 애교있는 오해가 아닐 수 없었다고 하겠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비무장지대 인근은 그야말로 날짐승 길짐승들의 낙원이다. 한번은 대원들과 함께 순찰길에서 궁노루 즉 사향노루 한마리를 잡아왔다. 정말 향기가 대단했다. 길거리에 끌고다니는 새까만 새끼염소만한 궁노루 한마리를 잡았는데 온통 내무반 전체가 향기로 진동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았다. 그 숫놈인 사향노루를 잡고난 날부터는 그 홀로 남은 짝인 암놈이 매일밤을 울어대는 것이었다. 글로 전하자니 그렇지 실로 그 당시의 가슴을 저미는 감회와 회한이란 필설로 대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덩치나 좀 큰 짐승이 울면 또 모르되 이것은 똑 발바리 애완용 같은 가녀로운 체구에 목멘 듯 캥캥거리며 그토록 애타게 울어대니 정말 며칠밤을 그 잔인했던 살상의 회한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더구나 수정처럼 맑은 산간계곡에 소복한 내 누님 같은 새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면 그놈도 울고 나도 울고, 잘새도 날아나며 온 산천이 오열했다. 그러니 어디 서럽게 누운 비목인들 무심하며 불원천리 임의 무덤가에 피어주는 정절의 화신 산목련인들 통곡하지 않겠는가. 이 가사의 뒤안길에는 바로 이같은 단장의 비감이 서려 있는 것이다.
포연 속에 간 젊음
사사로이 비목 얘기를 해가는 동안 어느덧 녹음의 6월, 비탄의 6월, 현충의 달, 비목의 달은 이만큼 다가서고 있다. 북치고 장고치기 좋아하는 우리들인지라 보나마나 6월의 문이 열리면 올해도 바나도의 산하는 온통 비목의 물결로 여울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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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 울어예는 외로운 골짜기의 이름없는 외로운 골짜기의 이름없는 비목의 서러움을 모르는 사람, 고향땅 파도소리가 서러워 차라리 산화한 낭군의 무덤가에 외로운 망부석이 된 백목련의 통한을 외면하는 사람, 짙푸른 6월의 산하에 비통이 흐르고 아직도 전장의 폐허속에는 젊음을 불사른 하많은 백골들이 긴밤을 오열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 겉으로는 호국영령을 외쳐대면서도 속으로는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가련한 사람.
아니 국립묘지의 묘비를 얼싸안고 통곡하는 혈육의 정을 모르는 비정한 사람, 숱한 전장의 고혼들이 지켜낸 착하디 착한 이웃들을 사복처럼 학대하는 모질디 모진 사람 ...... 제발 그대만은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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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이 글이 언제 어디에 실린 글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비목'의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뿐아니라, 글이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서 복사해서 파일에 모아두었다가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