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일은 순종하였는데 결과는 다니엘 3장 풀무불에 던져지고, 다니엘 6장 사자굴에 던져집니다. 결국 다니엘서는 단순히 믿는 사람이 잘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 2장의 꿈에 근거해서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높이는데 금신상을 세웁니다. 다니엘 2장의 꿈을 보면 순금은 느부갓네살 왕을 상징합니다. 비록 영원하지는 않지만, 쇠보다는 놋이, 놋보다는 은이, 은보다는 금이 더 귀하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미도 이 사살에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주지만 사람들은 그 꿈을 자신의 욕망 성취의 수단으로 삼아 버립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은근히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야망을 그럴듯하게 미화하고 꾸미고 있지는 않습니까?
느부겟네살 왕이 높이가 거의 30미터에 달하는 금으로 된 신상을 세웁니다. 1절의 규빗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로 “암마”입니다. 60암마는 대략 27미터 가량 됩니다. 그렇다면 이 신상은 높이 17미터, 폭이 2.7미터 정도 된 매우 길쭉한 기둥 같은 신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신상을 세웠을까요? 다니엘 2장과 3장은 동일하게 신상을 말씀하고 있는데, 신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교만입니다. 신상의 특징 중에 대표적인 것은 높이 세웁니다. 높이 세워야 멀리 있는 사람도 볼 수 있고, 신상 역시 멀리 있는 땅도 내다볼 수 있습니다. 결국 바라보는 이 모든 땅의 주인, 즉 다시리는 신이 자신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다니엘 4:27절을 보면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라고 말씀합니다. 왕이 교만하지 않은 증거는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입니다. 이것이 왕이 가져야 하는 겸손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풀부물에 던져진 원인은 이들이 일약 중요한 위치에 부각된 것에 갈대아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됩니다. 8절에“참소하다”로 번역된 표현을 직역하면 “그들의 조각들을 먹어버리다”입니다. 참소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조각을 내가 먹어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것을 시기하고 분내하며, 그가 가져야 할 것을 내가 대신 차지하고 먹어 치웁니다.
다니엘 3:24~28절을 보면 풀무불의 네 사람의 상황을 말씀합니다. 특별히 네 번째 사람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았습니다(25절). “신들의 아들”아람어로 “바르 엘라힌”과 비슷한 히브리말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인 “브네 엘로힘”을 들 수 있습니다. 창세기 6:2, 욥 1:6절 등에서 이 표현은 천상의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시립해 있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결국 “신들의 아들”은 일반사람과는 구별되는 어떤 다른 모습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니엘 3장에서 “맹렬히 타는 풀무불”이라는 표현이 7번 사용되고, “평소보다 7배 뜨겁게”(19절)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를 생생하게 증거합니다. 또한 왕의 명령의 지엄함, 그가 가진 권력의 절대성, 그의 단호하고 확고한 처벌 의지, 서둘러 신속히 집행된 처벌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실인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경우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은 너무나 잔인한, 끔찍함 그 자체입니다. 로마 정부의 단호함과 절대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신속히 집행된 처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