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원 부용지, 주합루 일대
▲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 보물 383호 |
종로가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선 돈화문은 창덕궁의 오랜 정문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
원스런 팔작지붕 2층 건물로 1412년 5월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9년에 다
시 세웠다. 하여 조선의 궁궐 대문 중 가장 늙었으며, 창경궁 홍화문(弘化門)과 함께
2층 문
형태를 지니고 있다.
문 이름인 돈화(敦化)는 중용(中庸)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孔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
에 비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허나 의미가 확장되면서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
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처음에는 문 현판이 없었으나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을 시켜 문 이름을
지어 현판을 걸었으
며, 2층에는 종과 북을 걸어서 정오와 인정(寅正), 파루(罷漏)의 시각을 알려주었다. 정오를
알리고자 북을 치는 것을 오고(午鼓)라 하였고, 인정은 통행금지를 알리고자 28번
종을 치는
것이며, 파루는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고자 33번 종을 때리는 것이다.
돈화문은 1층 가운데 3칸에 문을 내고 그 좌우 2칸을 벽으로 막아 삼문(三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가운데 문은 제왕의 전용 문이고, 좌/우문은 높은 벼슬아치와 왕족들이 이용했던 비싼
문이었으나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창덕궁과 돈화문의 높은 콧대도 푹 낮아져 이제는 입
장료만 내면 누구든지 들어설 수 있다.
돈화문 앞에는 광장 역할을 하는 월대(月臺)가 복원되어 있고, 서쪽에 매표소가 자리해 나그
네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데, 궁궐전각(창덕궁 중심 구역)과 후원을 구분해서
입장권을 팔고 있다. 궁궐전각은 성인(25~64세, 외국인 19~64세)만 입장료 3,000원을 받고 있
으며, 그 외에는 무료이다. 그리고 마지막 주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은 전부 무료이다.
후원 같은 경우 19세 이상은 5,000원을 추가로 내야 되며, 7~18세는 2,500원을 내야 된다. 하
여 후원 관람 기준에서 서울 5대 궁궐 중 입장료가 가장 높다. 심지어 마지막 주 수요일(문화
가 있는 날) 혜택도 적용되지 않는다. 허나 그만한 돈을 내고 둘러볼 가치는 정말 차고도 넘
친다. 그러니 창덕궁에 왔다면
후원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그래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
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
▲ 창덕궁 후원 입구와 함양문(咸陽門) |
돈화문을 들어서면
창덕궁 중심부(궁궐전각 부분)가 펼쳐진다. 여기서 동쪽 길로 들어서 진선
문(進善門)과 인정문(仁政門) 앞, 숙장문(肅章門)을 차례로 지나면 후원 입구가 바리케이드와
매표소를
내밀며 길을 막는다. (돈화문에서 후원 입구까지 도보 6~7분 거리)
이곳은 후원으로 넘어가는 일종의 후원 정문으로 후원관람권을 지닌 사람에게만 문을 열고 있
다. 창덕궁 중심부와 궁궐 바깥에서 후원을 잇는 문은 여럿 있지만 모두 닫혀 오직 이곳만 출
입이 가능하며,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이곳과 봉모당(奉謨堂, 금호문 북쪽)만 열려 있다. (봉
모당은 상황에 따라 닫혀있는 경우도 있음)
후원입구 동쪽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함양문이 있는데, 그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이어주는 문이
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같은 동궐(東闕)
식구로 창덕궁 확장 개념에서 창경궁이 생겨났는데,
나중에 돌담을 둘러 서로의 경계를 그었으며 문을 여러 개 내어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이들 문은 싹 닫혔고, 근래에 함양문만 빗장을 풀어 양쪽을 다시 이
어주고 있다. 허나 창경궁과 창덕궁은 별도의 입장료를 받고 있어 함양문 매표소에서 입장료
를 다시 치루어야 반대쪽 궁궐로
넘어갈 수 있다. (마지막 주 수요일은 양쪽 궁궐 모두 무료
로
해방됨) |
▲ 후원입구에서 후원으로 넘어가는 돌담길 (후원 방향) |
창덕궁은 1405년
태종(太宗)이 경복궁의 이궁<離宮, 별궁(別宮)>으로 세운 것으로 경복궁 다
음 급의 궁궐이다. 경복궁 부재 시절(1592~1868)에는 조선의 중심 궁궐(법궁)로 바쁘게 살았
으며,
창경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 불렸다.
1405년 인정전(仁政殿)과 선정전(宣政殿), 대조전(大造殿), 후원이 지어졌고, 1412년 돈화문
을 마련했으며, 뒷쪽 후원을 62,000평으로 넓혔다. 그리고 1463년 후원을 150,000평으로
늘리
면서 창덕궁 영역은 크게 확장되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47년 인경궁(仁慶宮) 건물을 가져와 중건했으며, 1917년 큰 화재
로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자 고약한 왜정(倭政)이 1920년 교태전(交泰殿)과 강녕전(
康寧殿) 등 경복궁의 많은 건물을 부시고 거기서 나온 목재로 창덕궁 복구에 때웠다.
경복궁과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은 궁궐 뒷쪽 부분에 후원을 두었으나 창덕궁에 비
하면 정말 애교 수준이다. 그에 비해 창덕궁은 15만 평이 넘는 준수한 후원을 두어 오랜
세월
애지중지 가꾸었는데, 후원 성형은 대한제국 시절(1897~1910)까지 꾸준하게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다양한
시대의
흔적이 공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궁궐 후원, 정원 유적을 능
가하는 천하
제일의
궁궐 후원 유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다. |
▲ 후원입구에서 후원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후원 방향) |
후원(後苑)은 창덕궁
궁역(宮域)의 거의 ¾을 차지하고 있다. 남쪽으로 대조전과 인정전 구역
북쪽까지, 동쪽은 창경궁 돌담까지, 북쪽은 성균관대에서 북촌(北村)으로
넘어가는 응봉 남쪽
고개(후원 뒷길)까지, 그리고 서쪽은 가회동(嘉會洞), 계동(桂洞) 지역과 담장을 마주한다.
남북 길이는 최대 800여m, 동서 길이는 최대 600여m에 이르며, 그 안에 300년이 넘은 늙은 나
무를 비롯해 온갖 수목과 화초들이 거대한 밀림을 이룬다. 하여 서울 도심의 소중한 허파 역
할도 도맡는다. 그리고 북악산(백악산) 동쪽 봉우리인 응봉(와룡산)에서 내려온 계곡을 이용
해 연못과 돌다리, 개울을 닦고, 숲과 골짜기가 굽이치는
경치 좋은
곳에는 조촐하게 정자와
건물을 지었다.
이렇듯 자연과 완전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곳이라 건축사 및 조경사적 측면에서도 특급 가
치를 지니고 있으며, 신선 세계가 정말로 있다면 창덕궁 후원과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그만
큼 잘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의 공식 명칭은 창덕궁 후원으로 금원(禁苑), 북원(北苑)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다. 그리
고 한때 비원(秘苑)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 이름은 대한제국 때 처음 등장해 왜정 때
대표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허나 왜정이 이곳 후원을 고의적으로 엿먹이고자
황궁의 비밀
정원
이란 뜻에 비원이란 명칭을 썼다는 의견이 크게 대두되어 1990년대 이후 원래 이름인 '후원'
으로 돌아왔으며, 비원이란 이름 2자는 크게 잊혀졌다.
창덕궁은 사적 122호로 지정되었는데, 인정전과 돈화문, 인정문,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선
원전, 금천교, 부용정, 낙선재, 주합루, 연경당은 별도로 국보(인정전)나 보물의 지위를 누리
고 있다. 또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향나무와 다래나무, 뽕나무, 회화나무군도 전하고
있어
고색과 자연의 향기가 가히 홍수를 이루니 그야말로 몸과 눈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오래간만에 찾은 이번 창덕궁 나들이는 중심부와 후원 공개 구역을 싹 둘러보았는데, 이들을
모두 다루는 것은 솔직히 무모하다. 그래서 본글에서는 후원 식구 중 부용정과 주합루 구역,
애련정
구역만
다루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 창덕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일대 (율곡로99 ☎
02-3668-2300)
* 창덕궁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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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원입구에서 후원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후원입구 방향)
▲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영화당 (부용지 구역) |
후원입구에서 표 검사를
받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창덕궁만의 특별한 매력이자 비
싼 유료의 공간인 후원으로 들어섰다.
후원으로 인도하는 고갯길은 양쪽으로 돌담(동쪽 돌담은 창경궁 경계 돌담)이 둘러져 있는데,
돌담 너머로 나무들이 앞다투어 고개를 내밀며 사람들 구경에 여념들이 없다. 고개 한복판에
이르면 돌담은 사라지고 짙은 숲길이 펼쳐져 후원에 대한 첫
이미지와 기대감을 크게 높여준
다. 마치 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나 선녀 누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듯한 그 고갯
길을 넘으면 영화당과 함께 부용지 구역이 마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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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지를 바라보고 있는 영화당(映花堂) |
창덕궁 후원에서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부용지(芙蓉池) 구역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과 영화당, 춘당대, 주합루, 어수문, 서향각, 희우정 등을 지니고 있다. 이중 영화당과 부용
지 동/남/북쪽, 부용정(내부 접근 불가), 춘당대만 자유 공간이고, 나머지는 모두 금지구역이
다.
영화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二翼工) 팔작지붕 집이다. 2중으로 닦여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부용지와 춘당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지어졌으나
현재
건물은 1692년에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특별하게 툇마루를 지니고 있는데, 툇마루에 걸터앉거나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누리
는 부용지와 후원 숲바람 맛이 아주 진국이다. (툇마루에 앉는 것은 가능하나 안으로 들어가
는 것은 절대로 안됨)
정조(正祖) 이전까지는 제왕이 왕족,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거나 활쏘기로 몸을 풀던 곳이었으
나 그 이후로는 문과와 무과 등의 과거시험 장소로 자주 쓰였다. 영화당 동쪽으로 너른 공터
가 있어 이를 춘당대(春塘臺)라 했는데, 춘당대는 원래 창경궁 춘당지(春塘池)까지 이르러 지
금보다 더 넓었다. (창경궁 구역은 별도의 공간으로 떨어져 나감)
이곳에서 과거시험이 열릴 때는 제왕이 친히 나와 살폈다고 하며, 여기서 치루는 과거시험을
춘당대시(春塘臺試)라 불렀다. |
▲ 영화당 앞에 푸르게 솟은 느티나무
150~200살 정도로 여겨지는 큰 나무로 영화당과 춘당대가 그의 그늘을
두고두고 누린다. (느티나무 너머로 보이는 공간이 춘당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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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에서 바라본 영화당 |
▲ 속살을 드러낸 영화당 내부 |
▲ 부용정(芙蓉亭) - 보물 1,763호 |
부용지의 상큼한 딸기
같은 부용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집이
다. 마치 '丁'과 '亞'를 합쳐놓은 듯한 독특한 형태로 연못에 두 다리를 담구고 있어 멀리서
보면 물 위에 떠있는 정자처럼 보인다.
부용정은 1707년에 세워진 것으로 처음 이름은 택수재(澤水齋)였다. 1792년에 중수를 하면서
부용정으로 이름이 갈렸는데, 부용정 현판 글씨는 1903년 후원의
감독직을 맡았던 동농 김가
진(東農 金嘉鎭)이 썼으며, 왜정 때 지붕이 변형된 것을 2012년 9월, 동궐도(東闕圖)를 참조
하여 원래 모습으로 손질했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으로 사용했던 주합루와 그 앞에 있는 부용정을 즐겨찾기하며 꽤 애지
중지했다. 1795년 그의 모후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을 기념해 왕족과 신하들을 이
곳으로 불러 회갑 연회를 벌였고, 종종 신하들과 낚시와 뱃놀이, 술모임, 독서 모임 등을 즐
겼다.
특히 신하들에게 즉석 시문(詩文) 짓기를 시켰는데, 주어진 시간에 시를 짓지 못하면 부용지
에 있는 동그란 섬으로 깜짝 귀양을 보냈다. 부용지에는 뱃놀이용 조각배를 늘 띄워놓았으며,
벌칙을 받은 사람은 그 배를 직접 저어서 섬을 오가야 했는데, 정조와 신하들은 그 모습을 보
며
크게 껄껄대고 웃었다고 전한다.
또한 어느 날, 부용정에서 신하들과 술모임을 하고자 내관을 시켜 술상과 악기를 준비하게 했
는데, 그 준비가 끝나자 마침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제비가 새끼에게 줄 먹이를 물고 나타났
다. 허나 정자에 사람들이 있어 들어오지 못하고 주변만 빙빙 돌았는데, 이를 가엾게 여긴 정
조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부용정에 올 때마다 제비 둥지의 안부를 물었다는 훈훈한
미담이 부용지 연못 바람을 타며 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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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정의 앞 모습 |
▲ 부용지 |
부용정을 품은 부용지는
1634년에 조성되었다. 처음 이름은 용지(龍池)로 인조(仁祖)가 이곳
에 연못을 닦고 조각배를 띄워서 팔자 좋게 뱃놀이를 즐겼는데, 그 풍류는 조선 말까지 이어
졌다. 숙종~정조 시절에 큰 연못을 뜻하는 태액지(太液池)로 이름이 갈렸으며, 정조 때 현재
모습으로 손질되었는데, 부용정을 중수하면서 부용지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연못의 크기는 동서 34.5m, 남북 29.4m, 수심 1.5m, 면적 300평(1,000㎡) 규모로 네모난 모습
이다. 섬 한복판에는 동그란 섬을 띄워놓아 창덕궁 속의 작은 섬을 그려냈는데, 이는 '천원지
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이다)'을 상징한다.
연꽃을 뜻하는 부용지란 이름 그대로 예전에는 연꽃이 많이 뿌리를 내렸으나 지금은 별로 없
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동쪽에 영화당, 남쪽에 부용정, 북쪽에 주합루와 어수문, 서향각, 희
우정, 서쪽에는 사정기비각이 자리해 부용지 구역을 이룬다. 그리고 못 서쪽에는 우물을 두어
연못의 수분을 꾸준히 채워준다.
부용지 서쪽 부분(사정기비각 주변)과 부용정 너머 구역은 금지구역으로 묶여있으며, 연못에
떠있는 작은 섬 또한 조각배가 없으니 넘어갈 재량이 없다. 하여 이들은 그림의 떡처럼 대해
야 서로가 좋다. |
▲ 동쪽에서 바라본 부용지의 상큼한 모습
▲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과 물을
쏟아내는 용머리 |
부용지 서쪽에는
1칸짜리 팔작지붕 건물이 작은 문을 거느리며 부용지를 굽어보고 있다. 그는
금지구역이라 접근이 통제되어 있고, 그에 대한 안내문도 없어서 지나치기가 쉬운데, 그는 사
정기비(四井記碑)를 조용히 품고 있는 사정기비각이다.
1460년 세조(世祖)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조카인 오산군<烏山君, 임영대군(臨赢大君)
의 아들>과 영순군<永順君,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아들>을 시켜 부용지 일대에서 샘물을 찾게
했다. 그래서 4개의 샘을 발견했는데, 그들을 우물로 손질하고 각각 '옥정(玉井)','마니(摩尼
)','유리(流璃)','파려(玻瓈)'란 이름을 붙였다.
이후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우물 2개가 사라졌고, 남은 2개도 크게 망가진 상태였다. 그래
서 숙종은 1690년 이들 우물을 수리하고 이곳에 있던 우물의 내력을 적은 비석을 세워 4개의
비석을 기록했다는 뜻의 사정기비라 하였다. 그리고 그 비석을 보호하고자 비각을 씌웠다.
비각 북쪽에는 용머리조각이 있어 북악산(백악산)이 베푼 물을 쉼없이 부용지로 쏟아내고 있
다. 용머리 양쪽으로 네모난 돌이 있으며,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李花紋)이 새겨
져 있어 순종 시절에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
▲ 부용지 우물 |
사정기비각 북쪽에 돌로 잘 다져진 공간이 있다. 그 한복판에 우물이 꽁꽁 봉인된 채, 조용히
누워있는데, 그는 세조 때 발견된 우물로 1690년에 현재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부용지를 채울 수분과 주합루 등 부용지 구역 사람들의 식수 및 식사, 연회에 필요한 물을 책
임지던 우물이었으나 이제는 뒷전으로 물러나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비록 무
늬만 우물이나 우물을 채워주던 물줄기가 옆으로 나와 용머리를 통해 부용지로 쏟아진다. |
▲ 주합루(宙合樓) - 보물 1,769호 |
부용지
북쪽에는 석축이 여러 주름으로 닦여진 높은 언덕이 있는데, 그 정상에 팔작지붕 2층
규모의 주합루가 지붕을 펄럭이며 부용지를 바라보고 있다.
주합루는 정조가 1776년에 세운 것으로 건물 이름인 주합(宙合)은 '관자(管子)'에서 따온 것
인데. '우주와 합일(合一)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기도 함) 정조의 즐
겨찾기 장소이자 그의 야심이 고스란히 깃든 곳으로 그러다 보니 궁궐의 중심 건물이 아님에
도 특별하게 2층 누각 형태로 지어졌다. 하여 창덕궁 후원에서 유일한 2층 집이며, 동시에 조
선 궁궐 후원의 유일한 2층 건물이라 그 가치는
실로 크다.
정조는 이곳을 규장각(奎章閣)으로 삼아 왕실 도서관 및 학문 연구 공간으로 활용했는데, 역
대 제왕들의 글과 그림, 왕실 보물을 1층에 넣어두고, 2층은 학문 연구실로 삼았다. 그래서
1층은 어제각(御製閣)이라 했고, 주합루는 주로 2층을 일컬었다.
1781년 인정전 서쪽에 규장각을 새로 지으면서 학문 연구 기능은 그곳으로 넘어갔으며, 이후
로는 왕실 도서관 및 창고의 역할을 주로 하게 되었다.
고종(高宗) 시절 경복궁과 덕수궁(경운궁)을 더 애지중지하면서 자연히 뒷전으로 밀려났으며,
왜군이 1905년 러일전쟁 승전과 경부선 부설 기념 잔치를 이곳에서 열었다. 순종(純宗) 때는
여기서 이토히로부미 등을 접견하고 관료들과 연회를 벌였으며, 왜정 때는 왕실과 왜정의 연
회장으로 쓰이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주합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로 1,2층 가장자리 칸에는 툇마루를 두었으며, 실내
공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바깥에 창문과 문은 따로 두지 않았으며,
기둥은 1층과 2층
이 하나로 이어지는 이른바 통주(通柱)로
되어 있다.
1층의 중앙 바닥은 대청마루로 꾸며졌고, 양쪽에 온돌방을 설치했으며, 2층은 전부 마루이다.
그리고 건물 동/서/북쪽에는 벽돌과 사고석의 담장을 쌓았으나 어수문이 있는 남쪽에는 독특
하게 취병(翠屛)을 엮어서 세웠다. |
▲ 주합루 어수문(魚水門) |
주합루 남쪽에 자리한 어수문은 그의
정문이다. 문 이름인 '어수(魚水)'는 정조가 붙인 것으
로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격언처럼 통치자는 늘 백성을 생각하고, 임금과 신
하의 관계도 가까워야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앞에는 3개의 계단이 있는데 고품격이 느껴지는 가운데 계단은 제왕 전용으로 그 위에 있
는 어수문 또한 제왕 전용이다. 그리고 계단만 덩그러니 있는 좌/우 계단은 신하들과 그 이하
사람들이 이용하던 것으로 그 계단을 올라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낮은 문을 지나야 된다
. 이렇게 문과 계단에도 제왕과 신하의 차이를 백두산만큼이나 두었으니 이는 왕권 강화와 개
혁정치를 꿈꾸던 정조의 야망이 담긴 것이라 하겠다.
문 좌우로는 대나무로 엮은 담장인 취병이 둘러져 있는데, 이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것을 근래
복원해서 채워 넣었다.
주합루는 애석하게도 금지구역으로 묶여있어 감히 발을 들일 수가 없다. 하여 어수문 돌계단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된다. 하지만 예전에는 주합루까지 접근이 가능했었다. 주합루가 금
지된
곳이 되면서 그에 딸린 서향각(書香閣)과 희우정(喜雨亭), 천석정(千石亭)도 덩달아 금
지 공간이 되었으며, 여기서 애련지 구역으로 넘어가는 북쪽 길과 창덕궁 중심부로 이어지는
서쪽 길 또한 모두 잠겼다.
비록 창덕궁 후원이 예전에 비해 많은 부분이 해방되었고, 상황에 따라 자유관람도 가능해졌
지만 문화유산과 자연보호 등의 이유로 신선원전(新璿源殿) 구역과 후원의 상당수가 굳게 잠
겨져 있다. 또한 날씨와 상황에 따라 금지 공간은 늘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속세에 해방
된듯 하면서도
아닌듯한 창덕궁 후원의 현실이다. |
▲ 주합루 동쪽 꽃계단과 담장
자연 경사를 이용해 돌로 꽃계단<화계(花階)>을 닦고 갖은 화초를 심어서
화사하게 꾸몄다. 이는 조선 궁궐의 대표적인 정원 양식이다. |
주합루 서쪽에 보이는 서향각은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주합루에 보관된 서
적과 그림, 어진(御眞) 등을 말리던 곳으로 아무래도 어두운 공간에 들어있다 보니 습기와 곰
팡이의 좋은 먹이가 될 수 있다. 하여 이들을 종종 이곳으로 꺼내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1911
년 왜정이 이곳을 양잠소(養蠶所)로 만들면서 한때 누에를 치는 곳으로 살아가기도 했다.
서향각 뒷쪽에는 팔작지붕 2칸 집인 희우정이 있다. 이곳은 제왕의 독서 공간으로 1645년 초
당(草堂)으로 지어졌는데, 원래 이름은 취향정(醉香亭)이었다. 1690년 가뭄이 극성이라 여기
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우연인지 기우제의 효과인지 며칠 뒤 많은 비가 내리면서 가뭄이 흔쾌
히 해소되었다. 하여 이를 기리고자 건물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비에 기뻐했다는 뜻에 희우정
으로 이름을 갈았다.
주합루 동쪽 언덕에는 'ㄱ' 모습의 천석정이 있는데, 이곳은 순조의 아들은 효명세자(孝明世
子)가 공부를 하던 곳이다. 안에는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 현판이 걸려있어 천석정 대신 제
월광풍관이라 불리기도 했다.
주합루 주변에는 이들 외에도 봉모당(奉謨堂)과 2층 규모의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도 있었지만 봉모당은 규장각을 따라 창덕궁 중심부로 옮겨졌으며, 나머지는 사라졌다. |
▲ 부용지 인근에 있는 잘생긴 수석
상석(床石) 비슷한 견고한 돌덩어리 위에 자연석이 불끈 솟은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이들은 부용지 수식용으로 대한제국 이후에
달아놓은 것들이다.
▲ 영화당 옆 춘당대 (남쪽 방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