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아사히계 / 토에이 / 2003.1~2004.1 / TV 시리즈 / 전 50화 / 감독: 타자키 류타 / 출연 : 한다 켄토, 하가 유리아, 미조로기 켄, 이즈미 마사유키, 카토 요시카, 카라하시 미츠루, 무라카미 코헤이
"나에게는 꿈이 없다."고 중얼거리며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있던 주인공 이누이 타쿠미는 미용사를 지망하는 소녀 소노다 마리와 가방이 바뀐 것을 계기로, 마리가 가지고 있던 '파이즈의 벨트'를 둘러싼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한편 죽음에서 되살아난 후 올페녹으로 각성한 키바 유지는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올페녹의 힘으로 죽여버리고 난 뒤 올페녹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스마트브레인사의 유혹을 받는다. 유지는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같은 뜻을 가진 동료들을 모으기 시작하는데...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을 그렸던 '가면라이더 류우키'에 이어, 이 '파이즈'는 다시금 '라이더 대 괴인'이라는 전통적인 구도로 되돌아왔다. 사실 전작 '류우키'에 등장한 몬스터들은 지성이 없는 단순한 괴물들이었고, '아기토'에 등장한 언노운 역시 인간과는 의사가 통하지 않는 존재였음을 생각해보면, 그나마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남아있는 '괴인'을 적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은 약간의 '원점회귀'로 인정해 줄 수도 있겠다.
이 '파이즈'는 인류에서 진화한 신인류 올페녹과 인류 사이의 싸움을 그린 이야기다. 이런 기본 설정만 살펴본다면 역시 인류에서 파생된 변종인 뮤턴트들의 싸움을 그린 'X맨'이나 '이나즈만' 시리즈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같은 뮤턴트끼리의 싸움이 펼쳐지는 이런 작품들과는 달리, 인간이 변이된 생명체인 올페녹들과 인간이 과학의 힘을 빌어 변신한 가면라이더의 대결구도는 비주얼에서부터 이미 확실한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정말로 독특한 것은, 인간측 주인공이자 가면라이더인 타쿠미 이외에, 올페녹 측의 주인공으로서 키바 유지라는 인물을 배치해 놓은 것이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올페녹이 되어버렸으면서, 올페녹의 힘을 이용하려는 스마트브레인의 방침에도 따르려하지 않는 그는 오히려 타쿠미 이상으로 예전 이시노모리 작품의 주인공들과 닮아있는 점이 많다.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변화한 것만이 아니라, 가족과 연인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끝에 스스로 손을 더럽히며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인간임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동료들을 모아 나름대로의 신념과 정의를 관철하고자 한다. 여러 의미에서 그는 전형적인 이시노모리 스타일의 히어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반해 인간 측 주인공 타쿠미는 처음에는 이렇다할 정체성도 가지고 있지 못한 채 제멋대로인 인생을 살고 있었고, 자신에게는 꿈이 없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역시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있는 커다란 비밀이 있었고, 처음에는 여러 가지 입장 차이로 대립하던 유지와는 기묘한 우정을 쌓아나가던 끝에, 결국 유지와 자신은 무엇하나 다를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전형적인 이시노모리 작품의 구도와 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시노모리의 작품 중에는 애초부터 개조인간 대 개조인간, 로봇 대 로봇, 뮤턴트 대 뮤턴트와 같이 기본적으로는 같은 속성을 가진 존재들의 대결을 그린 작품들이 많다. 결국 후반에 이르면 인간 주인공이었던 타쿠미는 올페녹이 되고, 반대로 올페녹 측 주인공이었던 유지는 라이더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두 주인공의 입장의 역전과, 동질성의 추구라는 과정은 기존 이시노모리 작품의 대립구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번 작품의 '올페녹'이라는 존재 역시 기존의 괴인들과는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쿠우가'에서 등장한 그롱기들과 같이 살육을 즐기는 흉폭한 존재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기업이라는 거대조직을 통해 각종 지원을 받는 점에서 예전 시리즈의 '악의 조직'과 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올페녹들이 예전의 '괴인'들과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난폭한 성질에도 불구하고 종족적 동질감과 규율로 통제되고 있던 그롱기나, 철저한 규율로 무장된 조직들의 괴인과는 달리, 어느 정도는 통제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질서하다는 것이다.
이런 설정을 살려, 이 작품에서는 '류우키'에서 그려졌던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를 보다 발전시킨 연출을 볼 수 있다. 처음으로 '올페녹'의 힘을 얻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반응이나, 올페녹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인간들의 모습들, 결국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서 수렁으로 빠져드는 올페녹들, 그리고 비록 올페녹이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들을 이용하려고 하는, 올페녹 이상으로 추악한 인간들의 모습 등, 이 작품은 '류우키' 이상으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을 상쇄하기 위해서인지, '파이즈'에는 몇 가지 가벼운 이야기들이 양념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세탁소 안에서 기묘한 공동생활을 시작한 주인공들의 시트콤적 일상생활이나, 서브 캐릭터들끼리의 안타까운 연애담 등은 독립된 드라마로서도 그럭저럭 볼만하다.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힘을 가지고 있든지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는 추악한 인간들의 어두움과, 그 유일한 해결책인 '꿈'에 대한 추구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앞서 말한 시트콤적 전개를 포함한 각 에피소드들의 완성도가 비교적 높은 것에 비해, 정작 이야기의 메인 스트림은 매우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다분히 작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몇몇 캐릭터들의 행동은 스토리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었고, 시청자들에게 흥미를 유발시켰던 각종 의문점들의 뒷마무리도 결코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런 노선은 단기적인 시청률 확보에는 효과적이지만, 넓은 시각으로 봐서 '좋은 작품'을 만드는데는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고 할 수 있겠다.
작품 외적인 부분을 살펴보자면, 이 작품의 '가면라이더'들은 곤충을 모티브로 하는 '가면라이더'의 기본 이미지는 어느 정도 남겨두었으면서도, 독특한 고글과 라이트업 슈트 등 기계적인 느낌의 디자인이 특징적이다. 또한 시리즈 사상 최초로 인간형 로봇으로 변신하는 오토바이가 등장한 것도 의욕적 시도라고 할 수 있겠으나, TV 특촬의 한계상 로봇의 활약이 제대로 보여지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파이즈'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서, 전작 '류우키'에서 보여준 '아이템' 변신의 개념을 한층 더 강화시킨 '변신 벨트 쟁탈전'을 들 수 있겠다. 전작에서는 카드덱만 있으면 누구나 라이더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이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올페녹 인자와 변신도구 양쪽이 필요하다는 점이 차이다. 그러나 카드덱 자체의 쟁탈전이 거의 없었던 '류우키'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올페녹 인자를 가진 자들끼리의 벨트 쟁탈전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주인공 '파이즈'의 벨트를 빼앗은 괴인들이 '진짜' 파이즈로 변신해서 주인공 일행을 공격하기도 하고, 다른 벨트들 역시 계속해서 주인을 바꿔가며 때로는 희생자를 내기도 한다. 결국 이 작품에서의 '가면라이더'는 그야말로 '도구에 의한 힘'으로 밖에 취급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예전 라이더들이 고민했던 '인간이 아닌 자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올페녹 쪽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정리해보면, 이 작품은 비주얼적으로는 '류우키'에 못잖은 파격이 먼저 눈에 띄지만, 내용적으로는 '인간 아닌 자'들의 비극에 대한 이시노모리적 해석이 전 2작에 비해 보다 뚜렷히 살아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아기토', '류우키'에서 불거진 시나리오상의 문제, 특히 종반부의 처리 부분에 있어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이 작품 자체는 패러렐 월드를 그린 극장판 '파라다이스 로스트'와 함께 양호한 평가를 받았으며, 평성 가면라이더 시리즈는 무사히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