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金東植 (1899 ~ 1989)】 "보합단’ 조직,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과 항일 무장투쟁
1899년 3월 21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월하동(月下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유신(金攸信)이다. 소년기의 학업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고, 청장년기에 국내 항일 무장단체인 ‘보합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과 항일 무장투쟁에 큰 공을 세웠다.
1919년 의주 3·1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1919년 가을 독립운동을 계속하려고 만주로 건너갔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堡)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단기 군사교육을 받고 졸업하였다.
1920년 3월 평북 의주군 비현면(枇峴面)에서 백운기(白雲起)·안효준(安孝俊) 등과 함께 의주군 월화면에서 대조선청년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지린성 콴뎬현(寬甸縣)에서 대한독립단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던 종형제 김평식(金平植)을 만나 독립운동 방법을 상의한 후 국내에 들어가서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사명을 받고, 대조선청년결사대 명의의 경고문과 군자금 영수증 등을 수백 장 휴대하여 귀국하였다. 백운기·안효준 등과 함께 평안북도 의주(義州)·용천(龍川)·철산(鐵山)·선천(宣川) 등의 10여 개 면에서 독립운동 군자금 3,000여 원을 모아 만주의 김평식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1920년 5월 하순 무기를 입수해서 다시 귀국하여 김시황(金時晄, 일명 金仲亮)과 대조선청년결사대의 조직 확대를 논의하고, 의주군 비현면에서 김시황·백운기·박초식(朴初植)·한우종(韓禹鐘)·김도원(金道源)·조원세(趙元世)·박종식(朴宗植) 등과 함께 이전의 대조선청년결사대를 확대 개편하여 대조선독립보합단(통칭 제1차보합단)을 결성하였다. 김시황을 총무부장에 추대하였다. 처음 근거지는 비현면 정산동(停山洞)에 있는 김시황의 집 뒷산에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말 단원 50여 명이 적극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는데, 총 300명·350명·500명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20년 6월 초 근거지를 의주군 고관면(古館面) 동암산(東岩山)으로 옮겼다.
보합단은 2~3명씩 조를 만들어 권총을 휴대하고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고 군자금 일부로는 무기를 구입해서 자체 무장하여 일제 군경과 친일주구배를 만나면 교전해서 독립군 무장 활동도 병행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1920년 5월 9일 여한면사무소 습격과 등사판 등 집기 탈취, 1920년 9월 철산군 서림면(西林面) 일제 경찰관 주재소 순사 처단 응징, 선천군 월화면 면장집 습격과 엽총 및 탄약 탈취, 의주군 미현면 친일파 전 일제 경찰 순사 등 처단, 1920년 10월 2일 선천군 산면(山面) 신풍동(新豊洞) 일제 경찰 수색대와의 교전 등이 있다.
1920년 11월 보합단 총무로서 국내에 남아 철산군 서림면에 은신하여 근거지를 마련하고,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으로 중국에서 권총과 화약 등 무기를 구입하여 보합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국내에서 보합단은 다시 강화된 조직으로 1920년 말까지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고 무기 구입에 사용한 군자금액이 69개 지역에서 83회에 걸쳐 현금 1만 1,800원을 포함하여 어음 등 모두 2만 5,810원에 달했다고 일제는 조사 기록하였다. 1920년 12월 4일 보합단 단원 김도원(金道源)에게 권총 2정과 탄환 200발을 주었고, 그가 서울에서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추격하는 일제 경찰 2명을 사살하고 체포된 이른바 ‘관철동 사건[일명 운니동(雲泥洞) 사건]’이 일어났다. 국내 동포들은 기뻐했지만, 일제 경찰의 보합단 추적은 더욱 강력해졌다. 전략상 국내 은신처에서 콴뎬현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중국에 망명해서 정식 군사교육을 받으려고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천중밍(陳炯明)의 반란으로 졸업하지 못하였다. 1923년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 있는 낙양강무당에 입학하여 중국 군사교육을 받았다. 봉직전쟁(奉直戰爭)이 일어나자 직예군벌의 우페이푸(吳佩孚)의 직속 참모로 차출되었다. 우페이푸에 요청하여 최천호(崔天浩)·채원개(蔡元凱) 등 다수의 한국인 청소년을 강무당과 유년병학교에 입학시켜서 뒷날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