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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관념으로 본 조선의 미래」
<성서조선>을 창간할 무렵 김교신은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4월부터 함흥영생여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성서조선> 창간호 맨 마지막에 수록된 '한양의 딸들아!'라는 글은 1927년 2월 17일, 함흥영생여학교로 부임하기 직전에 탈고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짧은 에세이는 <성서조선> 창간호에 수록된 글 중에서도 가장 이채롭다. 다른 글들이 모두 성서 연구를 표방한 데 비해 이 글은 조선의 여성에게서 조선의 희망을 발견했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정조 문제를 기독교 신앙과 관련지어 논의하고 있다. 이 글에 드러난 김교신의 목소리는 다소 감상적이다.
나에게 한 가지 자랑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마음의 지극히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조선의 모든 외형을 보고 낙심저두치 아니치 못할 때에 그것이 나의 심장에서 새로운 파동을 주어 나의 머리는 쳐들어지고 나의 눈에는 희망의 광채가 방사된 때가 몇 번이었던가!
김교신, '한양의 딸들아!', <성서조선> 1927. 7.
김교신의 한 가지 자랑,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던 희망. 그것은 조선의 여성이 지니고 있던 정조 관념이었다. 김교신이 여성의 정조를 말하는 데서 이처럼 감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교신을 낳은 지 두 해만에 남편을 잃고 평생을 교신과 교량 두 아들을 홀로 키우며 살아온 어머니였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으랴! 김교신에게 조선적 여성의 원형으로 어머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김교신은 7년 만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조선을 망케 한 것은 그 남성들이었다. 남성 자신이 멸망하여 다시 소망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조선의 여성은 세계에 비할 데 없으리라. 조선의 희망은 과연 그 특유한 조선적 여성의 장점에 있으리라.
김교신, '한양의 딸들아!', <성서조선> 1927.7.
김교신이 보기에 현재의 조선의 모습은 낙심할 것 뿐이었다. 특히 조선의 남성들에게서 소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조선이 갱생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조선적 여성에게서였다.
이 글은 김교신이 함흥영생여학교 교원으로 부임하게 된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함흥영생여학교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 소속이었던 맥레 선교사의 부인 서덜랜드(한국명 마의대) 여사가 1903년에 설립한 학교로, 1930년대의 천재 시인 백석이 잠시 근무했고, 소설가 임옥인이 졸업한 학교이기도 하다. 함흥 시절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기막힌 연애시를 쓰기도 했다.1930년대의 백석이 김교신을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성서조선>의 또 다른 주요 동인이었던 함석헌을 알았음에 분명하다. 오산학교 출신이었던 함석헌은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던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산학교 교원으로 있었는데 평북 정주 출신인 백석이 오산학교를 졸업한 것은 1929년이었다. 임옥인은 김교신이 함흥 시절 학생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넘게 지나 1974년 <나라사랑> 17집 김교신 선생 특집호에 임옥인은 김교신 선생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내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김교신이 함흥영생여학교를 일 년만에 그만두고 양정학교로 옮긴 사연을 전해준다.
다시 김교신의 글로 돌아가자. 김교신이 조선의 여성에게 희망을 가졌을 때 그가 본 '특유한 조선적 여성의 장점'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가 일본 문화를 경험하면서, 그리고 성서를 알게 되면서, 조선 여성의 장점으로 보게 된 것은 정조(貞操)를 잘 지킨다는 것이었다. 정조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1) 여자의 곧은 절개, (2) 이성 관계에서 순결을 지키는 일로 새기고 있다.
조선의 여성이 정조를 잘 지키는 데서 조선의 희망을 보았다는 말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불편할 수도 있다. 뒤집어 보면 조선의 가부장제가 여성의 성을 규율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 정조 관념이 지금도 유효할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정조 관념을 규범적 가치로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그 규범이 작동하는 방식이 이전과 같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사전적 설명에서도 보듯이 정조 관념 자체에 남녀의 비대칭성이 내재해 있다는 점이다. 또 민족의 미래를 위해 여성이 정조를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은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문제는 복잡한 윤리적 물음을 안고 있어서 여기서 다 다루기는 어렵다.
'한양의 딸들아'에서 김교신은 정조 관념을 성서의 맥락으로 옮겨 그 의미를 가장 멀리까지 확장한다. 그에게 있어 정조 관념은 '인생을 일관하는 근본원리'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민족의 여호와 신앙과도 이어지는 '우주의 법칙'이었다. 이런 관념의 확장은 무리가 없는 것일까? 유교 전통의 정조 관념을 기독교 교회론과 신론에서 나타나는 관념으로 치환하는 것은 타당할까?
아마도 이 경우 작은 차이보다 큰 유사성에 일단 주목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조선에 기독교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유교적 관념과 성서의 가르침 사이의 유사성이 큰 영향을 주었음직하다. 한학을 공부하고 유교적 수신에 힘쓰다 이십 대가 되어서 기독교로 개종한 김교신의 경우 유교적 관념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기초적인 틀이 되었을 것이다.
정조 관념을 둘러싼 문제는 또 있다. 근대적 삶의 양식이 들어오기 시작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전통적 정조 관념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기 어려웠다. 김교신의 글 후반부에서 이러한 당시의 사정이 드러난다. 1920년대 후반 식민지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경성에는 각종 오락장이 생겨났는데 당시에도 여학생들의 풍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소문을 전하면서 김교신은 조선의 딸들에게 어느 길을 갈 것인지 묻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1920년대 소설에서도 전통적 의미의 정조 관념은 도전 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 관념은 당시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근대적 주체성의 형식들과 복잡하게 얽혀들어 있었다. 김교신과 동년배였던 당시 작가(거의 모두가 남성이지만)들에게 있어서도 정조 문제는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었으니,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 <감자>, 나도향의 <물레방아>, <뽕>, 현진건의 <정조와 약가> 등이 그것이다.
당시 소설에서 정조 문제가 관심사가 된 것은 개인(특히 여성)이 성적 주체로서 성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갖기 시작한 사정과 관련된다. 이런 근대적 개인, 특히 근대적 여성의 출현이 전통적 정조 관념과 충돌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위 소설들에서 전통적 정조 관념에 도전한 여성인물들은 모두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거나 꼭 비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여성의 성적 욕망이 표출될 수 있는 자리를 찾는 데 실패한다.
김교신은 당시의 풍조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선대의 조선 부녀와 현대의 조선 여성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정조 관념에 있어 선대의 조선 부녀를 따르라는 것이 김교신의 뜻이었겠지만 이런 생각이 유교적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옛사람의 시대착오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런 양자택일적 물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보아야 한다. 김교신은 조선의 희망을 조선적 여성에서 찾았다. 이는 일본 문화를 오래 관찰하면서 얻은 것이기도 했고, 성서 연구를 통해 '조선적 기독교'를 모색하면서 얻은 것이기도 했다. 요컨대 김교신에게 정조 관념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 기독교 신앙의 정수로 다시 자리 잡아야 할 규범적 가치였던 것이다. 그는 전통적 정조 관념을 우주적 법칙으로 확장함으로써 조선 민족의 갱생을 부르짖은 개혁가였다.
전통적 정조 관념이 조선 기독교의 신앙에 어떻게 섞여들었는지, 그것이 식민지 조선에서 규범적으로 작동함으로써 민족의 미래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김교신의 도덕 개혁의 방향, 또는 담론 전략이다. 즉 전통적 가부장제의 윤리인 정조 관념을 가지고 오되 이를 성서의 맥락에 다시 배치함으로써 가부장제의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목소리로부터 일정하게 벗어나면서 새로운 기독교 윤리를 주창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도덕 개혁의 목소리가 김교신의, 그리고 <성서조선>의 '조선적 기독교' 기획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볼 수 있을지, <성서조선>을 찬찬히 따라가 보자.
김교신의 <성서조선> 창간사
<성서조선> 창간호가 간행된 것은 1927년 7월의 일이다. 표지와 간기에 쇼와(昭和) 2년이라고 연도 표시가 되어 있다. 표지 안쪽 면에는 시편 23편 전문이 실려있다.
창간호에는 '창간사'를 비롯해서, '인류의 구원은 어디로부터(송두용)', '크리스천이란 누구를 말함인가(정상훈)', '여호와 신의 성격에 대한 일고찰(양인성)', '여호와 다스린다(정상훈)', '영혼에 관한 지식의 고금(김교신)', '먼저 그 의를 구하라(함석헌)', '신과 신앙(송두용)', '아브라함의 신앙(류석동)', '한양의 딸들아(김교신)' 등 동인들의 글이 실렸다.
창간사는 김교신과 류석동이 쓴 짧은 두 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글 모두 약간 들떠 있다. 조선인 6인이 스기나미(杉竝, 도쿄부 서쪽 지역)촌에서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였고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나 <성서조선>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을 여인에 비유해서 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줄 가장 귀한 선물은 성서밖에 없기에 제목을 '성서조선'이라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은 두 동인의 글에 '조선인'이라는 차별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김교신의 창간사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하루 아침에 명성이 세상에 자자함을 깨어 본 바이런은 행복스러운 자였다. 하지만 하루 저녁에 '아무리 해도 조선인이로구나!'라고 연락선 갑판을 발구른 자는 둔한 자였다.
<성서조선> 창간사, 1927. 7.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말로 더 유명해진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과, 조선인임을 자각하고 연락선 갑판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대조하고 있는 이 문장의 무게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도쿄고등사범대학에서 수학한 식민지 지식인 김교신에게 있어서 '조선인'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제국의 타자로서 자기 발견이라 할 만한 것으로 <성서조선>은 이러한 자기 발견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가 연락선 갑판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을 때 그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을 떠올려야 한다. 조선에서 만세가 일어나기 전 겨울, 그러니까 1918년 12월 무렵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 이인화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도쿄에서 서울로 오게 되는데 이 여로에서 중요한 서사 장치가 되는 것이 '관부연락선'이다.
'연락선 갑판을 발구른 자'의 심정은 '관부연락선'이 지니는 시대적 상징성을 경유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도쿄 유학생들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야 했는데, 이 여정은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에게서 보듯이 식민지인이라는 차별적 정체성을 경험하는 과정이었다.
<만세전>의 이인화는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에 오르는데, 여기에서부터 서울로 오는 내내 감시와 차별의 시선에 부딪히게 된다. 관부연락선에 오르자마자 목욕탕에 들어간 이인화가 일본인들이 하는 말을 엿들으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헐값에 팔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현실을 알게 되고 울분을 느끼지만 이 울분은 정당한 분노로 표출되지 못한다. 곧이어 조선식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감시자의 목소리를 듣고 쫓기듯 목욕탕을 빠져나오면서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휩싸이게 된다.
<만세전>이 <묘지>라는 제목으로 발표되다 잡지의 폐간으로 중단된 것이 1922년이었고, 다시 <시대일보>에 연재되어 마무리되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1924년이었으니, <성서조선>의 동인들도 이 작품을 읽었음직하다. <만세전>의 작가 염상섭은 1897년생으로 김교신보다는 네 살, 송두용보다는 일곱 살이 더 많았고, 교토부립중학을 거쳐 게이오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니 <성서조선>의 동인들과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겠지만,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성서조선> 창간사에 잘 드러나 있다. (함석헌은 염상섭에게 배웠을 수도 있다. 1920년 게이오 대학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염상섭은 창간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다가 이 무렵 오산학교 교사로 일 년 정도 근무한 적이 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를 다닌 것이 1921년부터 23년까지였으니 그 기간이 일부 겹칠 수 있다. 후에 함석헌이 쓴 자전적 글에 오산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염상섭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김교신이 ‘아무리 해도 조선인’이라고 말하였을 때 이는 억눌리고 배제된 자의 고통스러운 자기 표명이었다. 이 억눌린 자의 정체성이, 그리고 이를 먼저 깨달은 자의 목소리가 <성서조선> 지면 곳곳에 울려퍼지고 있다.
이 억압과 배제는 실질적인 것이었다. <성서조선> 동인들의 전도 여행에 사복, 정복 경찰들이 동행한다거나, <성서조선> 편집본이 나오면 총독부 경찰국 도서과에 제출하여 검열을 받아야 했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성서조선>이 내세운 ‘조선산 기독교’의 의미는 복합적이겠지만 그 첫 자리에 이 억눌린 자의 정체성과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해방의 파토스가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다음 문장에서 김교신은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성을 자각하게 된 사정을 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 조선적 특수성은 사해동포로서의 자기 발견이라는 보편지향성과 팽팽한 긴장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학창에 있어 학욕에 탐취貪醉하였을 때에 종종 자긍하였다. 「학문에 국경이 없다」고. 장엄한 회당 내에서 열화 같은 설교를 경청할 때에 나는 감사하기가 비일비재이었다. 「사해가 형제동포라」고 단순히 신수信受하고. 강호성江戶城의 내외에 양심에 충忠하고 국國을 애愛함에 절切한 소수자가 제2국민의 훈도薰陶에 망식몰두忘食沒頭함을 목도할 때에 나余의 계획은 원대遠大에 지至하려 함이 유有하였다. 「옳은 일을 하는 데야 누가 시비是非하랴?」고. 과연 학적學的 야심에는 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애적愛的 충동에는 사해가 흉중胸中의 것이었다. 이상의 수현遂現에 지至하야는 전도가 다만 양양할 뿐이었다. 때에 들리는 일성은 무엇인고? 「아무리 한대도 너는 조선인일다!」
<성서조선> 창간사, 1927. 7.
3.1운동 전후 조선인 유학생들의 정체성은 혼란스러웠다. 도쿄에 있을 때 그들은 근대의 보편 지식을 가진 근대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도쿄는 근대 도시였고, 근대 학문은 보편성 추구를 목적으로 하였기에, 도쿄에서 그들은 보편적 근대인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으로 돌아오는 연락선에서 그들은 막연한 근대인으로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리 해도 조선인일 수밖에 없다. 연락선 갑판에서 발을 굴러봐야, 보편 학문에 몰두하거나 보편 종교에 심취해 봐야 자신은 조선인일 수밖에 없다는 이 뼈저린 자각, 이 차별과 배제로 인한 고통이 <성서조선>의 첫 문장을 이루고 있다.
이 분열된 정체성은 당시 도쿄 유학생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를 어느 쪽으로 해소해 갈 것인가는 각자에게 맡겨진 실존적 과제였을 것인데 김교신은 조선인이라는 억압된 정체성의 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성서'와 '조선'을 일치시키는 길로 나아갔다.
아! 어찌 이보다 더 무량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는 구句가 달리 있으랴. 이를 하解하여 만사휴요, 이를 해하여 만사성이로다. 우리는 감히 조선을 사랑한다고 대언치 못하나 조선과 자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겨우 '무엇'을 지득함이 있는 줄 믿노라. 그 지만遲晩함이야 남의 웃음을 대하리오만.
<성서조선> 창간호, 1927. 7.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표나게 내세운 <성서조선>이 구성하고자 한 신앙의 주체는 어떤 이들이었을까? 이 물음은 <성서조선>이 표방한 조선 기독교의 성격을 묻는 물음이기도 하다. 김교신의 창간사 마지막 부분은 '조선혼을 지닌 조선사람'을 부르고 있다. '소위 기성신자', '기독보다 외인을 예배하는 자',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는 <성서조선>이 찾는 조선인은 아니었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신자보다도 조선혼을 소지한 조선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의 초부 일인을 위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대하야 상면하라. 상론하라. 동지를 일세기 후에 기한들 누구를 탄할손가.
<성서조선> 창간호, 1927. 7
한편 삼안(三眼)이라는 필명으로 실린 류석동의 창간사에서도 '조선인이라는 낙인'이라는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심장육편에 '조선인'이라는 낙인이 꽉 박혀 있는 우리는 어찌하면 좋을까. 참혹한 운명에 전율하여 자살을 할까. 그렇지 아니하면 운명에 전부를 맡겨버리는 숙명론자가 될까. 아니 아니 우리의 조선에 대한 사랑은 자살하며 숙명론자가 되기에는 너무 강하며 너무 열렬하다.'
자살을 하거나 숙명론자가 되기에 조선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열렬하였던 그들은 <성서조선>을 펴내기로 한다. <성서조선> 창간이 조선인이라는 특수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 특수성에 대한 자각은 기독교가 보편 종교이고 성서가 보편적 진리라고 데서 오는 보편 지향과 팽팽한 긴장을 이루고 있었다. 김교신과 류석동이 그랬듯이, 모든 사람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살아가고 있기에, 기독교의 구원도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것일 터이고, 보편적 진리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구현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성서조선>이 주창한 조선 기독교의 의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