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영화나 무대위의 의상은 단순히 의복만의 의미를 가진것이 아니라
상징적이거나 복선 [伏線]의 뉘앙스를 주기도 합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영화속의 의상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연보라 [軟─, light purple lilac].......
연보라색은 라일락꽃색이라고도 하고, 흔히, 라벤다컬러라고도 합니다.
보라색에 흰색을 더하여 보다 묽은 빛을 내는 색이라고 볼 수 있지요.
보라색은 전부터 황제의 색으로 귀족적임과 우아함을 나타내는 색이었으며
동시에 섬세한 아름다움과 퇴폐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연보라도 그 범주 안에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은은한 감도를 머금은 색으로
여성스럽고 섬세하며 연약하고 묽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패션에서는 아주 유약하고 부드러우며
고상하지만 무언가 퇴폐적이고 도발적인 아름다움의 의상으로 표현됩니다.
보라와 연보라는 그 범주가 매우 모호하나,
빛깔로서 구분되는 보라와 연보라..
우리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고 있지요..
푸르름과 붉음의 전천후.
그 연보라색에 얽힌, 원피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바로, 연보라색을 가진 원피스를 입고 등장하는 여인들..
영화 주홍글씨, 해안선, 소설 2days 4girl의 '여자'들에 관해서 입니다.
영화 주홍글씨에서의 최가희(이은주)는 극중 재즈밴드의 리드보컬로
가질수 없는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에 신음하는 비련의 여인입니다.
도발적이고 퇴폐적인 아름다움..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보이스..
곧,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만 같은 위기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희는
기훈(한석규)의 매혹적인 정부입니다.
가희와 수현의 금지된 사랑..그리고 한쪽만이 남아버린 가희의 사랑..
가희에게 중독되어 있으면서도 수현과의 삶을 놓지 못하는 기훈..
그러한 이면의 감추어진 진실은 뒤로한 채
표면엔 그저 가희는 기훈의 매력적인 정부일 뿐이고 수현은 가련한 본처일 뿐이지요.
금지된 사랑을 하는 대가로 너무 많은 벌을 받고 있는 듯한 가희는,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주홍글씨를 남기게 되고 점점 더 이러한 사랑에 마음이 헤져갑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지탱해가며 고통스러워 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기훈은 직장에서 상을 받게 되고
가희는 자신의 생일이며 그가 상받는 날에 꽃다발을 들고 그를 찾아갑니다.
그때 그녀가 입은 옷이 바로 연보라색 원피스입니다.
힘겨운 사랑을 견디어 내며 점차 야위어진 육신을 감싸고 있는
연보라색쉬폰원피스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흩날리고
그녀의 헤진 마음만큼이나 애처로워 보이지요.
얇은 쉬폰위로 은은하게 베어나오는 보랏빛은 퇴폐적이면서도 유약하고,
부드러우면서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마치, 가희의 짧고 안타까운 삶처럼..
예민한 칼끝위에 위태롭게 서있던 가희가 고통속에서도
너무나도 아름답게 미소짓는 것과 같이,...
연보라색 원피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마지막에 그녀의 대사는 더더욱 그녀를 가엽게 만듭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반지가 있어.
아니 다들 반지를 손에 끼고 태어나는 것 같아.."
“아.... 같이 살고 싶다.. 평생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매일아침 그렇게 기도했는데...”
수현과의 금지된 사랑을 나눈 벌로, 사랑했던 기훈을 잃고
짧은 생애동안 끊임없이 기훈의 부재로 아파해야했던
가희의 주홍글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저 어디 하늘위로 천사가 되어 날아가고 싶어”
그녀는 연보라색 원피스를 걸치고,
그 누구도 영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하늘위로 올라가 천사가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마지막, 기훈은 자신을 형사가 되게끔 욕망을 가지게 했던 그 권총으로
사랑했던 가희를 쏘고
그녀의 손가락에 그와 수현의 결혼반지를 끼워줍니다.
그녀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그들의 사랑의 증표를 말이지요.
두번째 원피스의 주인공은 해안선의 미영(박지아)입니다.
김기덕감독의 영화 해안선의 미영은 너무나도 흔한 여자였습니다.
평범하다 못해 어디서든 그냥 묻혀버릴 듯한 얼굴..
두명에 한명꼴..혹은 열명에 여덟은 하고 있을 법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
어느곳이든 있을 법한 평범한 미영이 파멸의 길로 빠져버리는것을 암시하는
단적인 요소가 바로, 연보라색 원피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의 무지함 그 한가운데 가혹하게도 어떠한 둘레이건 간에
우리는 그 둘레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그것은 그저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지요
미영도, 자신이 택한 금기속에서 그 수렁속에 빠져,
그 대가를 처참하게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자신이 아닌듯..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미영은 군사경계지역에서 금지된 사랑을 나누다
눈앞에서 애인이 간첩으로 오인, 사살되는 끔찍한 사건을 겪습니다.
그 후 그녀는 극중에서 연보라색원피스를 입고 철책선 주위를 돌며
죽은 애인의 이름을 되뇌이게 됩니다.
미쳐버린 미영은 자신의 미소에 아주 미묘한 감정을 심어 놓지요.
그녀가 군인들에게 보여주는 미묘한 웃음과 행동들을 대변하듯
연보라색 쉬폰원피스도 바람에 제갈 길을 잃은 듯 나부낍니다.
군인들은 하나둘씩 자신이 앞에서 애인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를 범하게 됩니다.
그녀가 그렇게 철책선을 도는 동안, 원피스도 낡아가며 제색을 잃어 갑니다.
결국 그녀가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하고..
안전장치도 없이 중절수술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와
지치고 파멸에 이른 자신의 몸을 수조속에 뉘였을땐
그녀의 원피스는 원래의 색을 잃어 어떤 색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철책선의 밤빛에 미묘한 색을 내며 군인들을 유혹했던 그녀의 연보라색 원피스도
시간이 갈수록 낡고 색이 바래어 나중엔 아예 구분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지요.
마치, 파멸에 이르게 된 그녀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세번째 연보라색 원피스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이틀동안 네명의 여자와 섹스하는 방법”속에 등장하는
가오리라는 여배우의 원피스입니다.
플랜트헌터로서의 삶을 즐기는 '나'가 처음으로 오버홀을 맡게 되는 여자로
열일곱살에 데뷔를 하고 출연했던 방송프로듀서와 위험한 교제를 하던 여배우입니다.
가오리는 방송프로듀서의 사랑이 식어가고
자신이 배우로서의 입지도 불분명한 불안한 상황을 못견뎌 하지요.
자신의 존재가치를 시험받게 된 가오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점차 오기와 광기로만 내몰렸던 가오리에게
'나'는 잃어버린 그녀의 존재감을 되찾아 주고 싶어합니다.
충분히 아름답고 충분히 가치있는 존재로서의 가오리를 말이지요.
그런 가오리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나'가 플랜트 헌터로서의 오버홀을 결심하고
망가져버린 그녀에게 깔끔하게 옷을 입고 오라는 주문을 하고,
그녀를 침착하게 기다립니다.
그런 그녀가 '나'를 위해 갈아입고 온 의상이 바로,
연보라색 원피스와 검은가죽재킷입니다.
그녀는 애인으로부터 자신의 가치가 불변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받고 부정하고 있었던 찰나,
다시 그녀가 매력 있고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로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며
자신에게 '나'가 의뢰한 부탁을 들어준다.
가지런히 머리를 묶고 예쁜옷을 차려입고
자신을 기다려준 ‘나’에게 매력적인 미소를 던지며.
바로,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채 말입니다.
우연히도 이 세가지 이야기는 비슷한 시기에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지워지지 않은 연보라색원피스에 대한 편린으로 말이지요.
가희, 미영, 가오리..
이들의 몸을 감싸던 연보라색기운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가희의 원피스가 바람에 흩날리며 살며시 그녀의 몸을 휘감았던 그 모습을..
미영이 원피스를 입고 철책선을 돌며 미묘한 웃음을 흘리던 그 모습을..
가오리가 원피스를 입고 ‘나’의 앞에 섰을 그 마음을 말이지요.
가희의 가질 수 없는 사랑...미영의 파멸..가오리의 가치 확인에 대한 욕구...
이 모든것들을 대변해주고 있는 연보라색 원피스를...
퇴폐적이지만 고상하고 유약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가진,
바로, 연보라색의 옷들을 말입니다...
더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아름다움..
다시 올라갈일만 남은 아름다움..
희미한듯..희미하지 않은듯 미묘한 빛을 발산하는,
새벽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색.
아마도, 그들은 연보라원피스를 입어야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로 흘러가기 위해,
자신의 생을 그리로 몰아넣기 위해 말이지요 ..
첫댓글 영화속 의상 평론이 전문가 수준.....
전문가시구먼...
의상전공이라 의상을 테마로 한번 써보았어요 ^^;; 아직 부끄러운 수준이예요 ㅎㅎ
음......의상과 관련이 있는분으로 생각했더니..역시.....그래도 저렇게 까지 생각하긴 쉽지 않은데...............사고가 남다르네요~~~..나도 보라색을 무지 좋아하는데
난 살색...
난 분홍색...그 다음으로 초록,파랑....
보라색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여인이 기억납니다... 옷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아르헨티나나 남미에서 라벤더 꽃은 자주 볼 수 있더군요...
산티아고 데 칠레에서 찍었던 연보랏빛을 찾아 올릴게요...
인터넷이 느린데다... 찾다가 정전 몇 번 되니 심 빠졌넹... 좀체 변명 안 하고 사는디...
보라색은 저도 광적으로좋아하지요. 하지만 상상속의 보라색과 보는 보라색은 좀 다른것 같아요. 저는 자색을 매우 좋아하지요. 예를 들면, 제비꽃이나 산부추꽃과 같은 색이요 ^^*
시폰(chipon)과 싱글(single)의 섬유조직의 차이를 알아두는게 많은 도움이 될듯...^^...아 걸레쟁이 본색 나온다... 글 참 재미있게,잘 쓰시네요...나비양...아니연보라양...
저두 본색이 나온다나... 참 댓글 이쁘게 잘 쓰신당...
이름 빼 묵었넹...이 형님...
고마와요땡칠이 형님
히 구 형님... ^ㅁ^
싱글은 처음듣는 조직인듯 싶네요 ㅎ 원단조직이나 섬유조직은 저도 잘 모릅니다 ^^* 싱글이 평직을 말하는건가요? 근데 걸레쟁이는 무슨뜻이예요 ? ^^ 알다가도..모르겠는데요 ??
ㅋㅋㅋ...원단파는 사람들을 비하해서 "걸레쟁이"라고...ㅎ...쪽지로 자세히 설명할께요...ㅎ...둘 다 평직 맞아요...^^
음...........냄새가 난다~~~~같은 과! 사람들의 통하는 냄새가~~~~
손은 사용 안했음...
대단했던이 형님의 전설...
와우~~한편의 영화네요...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