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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회’에 대하여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이름은 ‘기하성’이다. 기하성은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줄인 말이다. 우리나라의 감리교회는 ‘기독교대한감리회’라는 교단명칭을 가지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나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장로교단들의 명칭이다. 성결교단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라는 공식 명칭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개신교회 교단들은 ‘기독교대한’ 또는 ‘대한예수교’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뒤에 장로회니 감리회니 성결교회 등의 이름을 붙여서 구별한다.
그러니까 우리 교단의 명칭이 ‘기독교대한’으로 시작하는 것은 다른 교단의 명칭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 교단의 특징은 그 다음에 오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회’다. 이 말은 영어 Assembly of God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는 교단명칭을 Assemblies of God처럼 복수형태로 사용한다.
참고:
우리나라 '하나님의 성회' 교단의 초창기(1932~1949) 역사에 대하여
순복음총회신학교 조교수인 이창승 박사는
매우 구체적인 사료를 검토하면서 자세하게 소개했다:
http://jesusgate.tistory.com/125
‘하나님의 성회’라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성경에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이 9회 나온다(디모데전서 3:15 등).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단명칭을 사용하는 곳이 있다. 그들은 안상홍 증인회라 부르는 단체다. 그 교단의 정식 명칭은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다. 정통교단들은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우리 교단의 이름 ‘하나님의 성회’는 히브리서 12장 22절부터 24절까지에 나오는 교회의 위상에 대한 언급에서 나온다. 이 본문은 신약교회가 현재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훨씬 좋은 위치에 있다고 히브리서는 일깨워준다.
신약의 교회는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에 있다. 그리고 무너져버린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에 와 있다. 그리고 천만천사와 의인들과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이렇게 교회의 위상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와 있다고 히브리서는 강조한다.
그런데 그 교회에 대한 설명 중에 특이한 표현이 나온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이 그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장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다. 그리고 이 ‘모임’이라는 단어는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총회’라고 번역되었다. 왜 그럴까?
장자들의 모임에서 모임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네귀리스다. 파네귀리스(pane:gyris)는 ‘모든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 총회’를 의미한다. 장자들의 모임은 장자들의 총회다. 그리고 이 단어는 영어로 옮길 때 Assembly가 된다.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가 Assembly of God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 총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래 어셈블리는 ‘하나님의 성회’라기보다는 ‘장자들의 성회(총회)’라는 표현에서 기인한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회라는 이름이 나왔다. 하나님의 성회는 하나님의 교회와 같은 의미이며, 이 말은 다시 ‘장자들의 모임’ 또는 ‘장자들의 총회’, 또는 ‘장자들의 성회’와도 같은 의미다.
하나님의 성회는 영어로 Assembly of God이기 때문에 A.G.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A.G.는 All the Gospel로도 설명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 교단의 로고에도 반영되었다. 그 말은 ‘순복음’의 영어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성회는 오순절계열의 교단이다. 20세기 성령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교단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회 교단은 성령의 은사와 신유 같은 것을 강조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기하성 목회자인 조용기 목사는 오중복음의 키워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재림과 부활. 오순절 성령운동은 한 세기를 지나오면서 전 세계 교회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회라는 말이 본래 ‘장자들의 총회나 모임’이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나는 신학교에서도 그 이후에도 장자들의 총회라는 말에 대하여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교단의 명칭이 성경 히브리서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목사고시 예상문제로 준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교회는 장자들의 총회다. 하나님의 성회는 장자들의 성회다. 성경에서 ‘장자’(the firstborn)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장자라고 모세를 통하여 파라오에게 말씀하셨다(출 4:22). 파라오의 장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그들은 죽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들이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자신의 장자라로 부르셨나?
장자는 기업을 이어받을 사람이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받으려고 그렇게 애를 쓴 이유는 그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았기 때문이다(엡 1:18). 에서는 하나님의 기업을 우습게 여겼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을 때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야곱과 에서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장자는 기업을 이을 사람이다. 하나님의 장자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들로서 무슨 기업을 받았는가?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빛나는 제사장 나라로 살 기업을 받았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성막과 율법을 주셨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몸에 새긴 할례 받은 민족이 되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은 장자의 나라로 언약을 맺은 것을 기념하는 성막과 율법을 가진 민족이 되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열방이 복을 받게 하실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장자들은 열국을 인도하여 하나님께 안내하는 제사장들이 될 것이며, 그 열국을 모아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파라오에게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선포하시면서 그 백성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시 2:7~8).
하나님이 그 장자들에게 열방을 유업으로 주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아담에게 복을 주신 말씀과 동일하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 생육번성충만한 곳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 그려진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자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것이며, 그 기업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물려받을 미래의 세상을 노래했다. 그 세상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가득할 것이다. 그 세상은 광야에 백합화가 만발하고, 사막에는 길이, 광야에는 냇물이 흘러 생명으로 충만한 땅이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장자들이 물려받을 세상이다.
하나님의 장자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자신들이 있는 메마른 땅을 비옥한 생태평원으로 바꾸게 할 것이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그 일을 시범적으로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나님의 일은 창조의 일이다. 창조의 일은 언제나 공허하고 혼돈한 땅을 질서와 생명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메마른 땅을 일구어 곡식으로 가득하게 하는 농부와 같다. 성경이 하나님을 포도원의 농부로 비유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자들이 물려받을 기업도 미래에는 완성될 것이지만, 그 전까지는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가꾸고 새롭게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본래 하시던 일이며, 또한 자기 아들들에게 하게 하시려고 미리 정하신 일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지으심을 받은 목적은 하나님이 전에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선한 일을 하게 하심이라고 설명했다. 그 선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들이다. 하나님의 장자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다. 하나님의 기업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져 새롭게 되는 세상이다. 그 세상은 하나님이 완성하실 나라이면서 동시에 그 백성이 가꾸고 관리하여 충만하게 할 기업이다.
시편 기자는 자기에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이 아름다운 곳에 있으며, 그 기업이 실로 아름답다고 노래했다(시 16:6).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기업을 받아서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그 밭을 잘 가꿀 것이다. 그 밭은 세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자들은 이 세상을 더 빛나고 더 안전하고 더 풍성한 땅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장자들의 총회가 어떻게 그 기업을 관리하고 가꿀 때 세상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뀔 수 있을까? 하나님은 소돔성에 대한 심판을 내리시려고 길을 떠나실 때 아브라함을 먼저 만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 대한 약속이며 그 약속이 성취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세기 18:18~19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은 그와 그의 권속이 여호와의 도를 지킬 때 이루어진다.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킨다는 말은 곧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다. 의와 공도를 행한다는 말은 바르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말이다.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기업이다. 그런 나라가 강대한 나라가 되고 그 나라를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장자들이 물려받을 기업은 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백성들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온 세상이 번영하고 풍요롭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들려주는 기업에 대한 희망은 언제나 이 땅에 더 나은 세상이 열리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도 우리를 이 세상에서 떠나는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이 세상에 복이 되라고 부름 받은 거룩한 나라요 택함을 입은 백성이요, 구별된 왕 같은 제사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회가 가르치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재림 이후의 세상에 대한 희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의도와 꿈은 우리에게 천상의 세계로 데려가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에게 천상에 그려진 설계도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것이 성막이며 그것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다. 하늘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설계도이며, 그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와 비전이 땅에서 실현된다는 뜻이다. 그런 세상이 하나님 나라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하늘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완전하게 실현되는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하늘에 있는 모델하우스가 이 땅에 건설되는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이와 반대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이 땅의 삶은 모델하우스와 같이 허상이며 진짜 세계가 저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구원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기업과 반대가 되는 생각이다.
기독교회의 거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 생각에서 출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독교인이 왜 배타적이 되는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길이 오직 한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어디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은 오직 하나 오직 예수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종교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종교와 함께 하는 것을 타협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장자들의 기업이 하늘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의 구현에 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 하늘의 뜻이 공평과 정의가 펼쳐지는 세상이며 상생과 협력으로 번영하는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을 열어가는 사람들은 어디에 초점을 둘까? 그들은 결코 누구를 배척하거나 정죄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은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죽음을 보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2022년 가을에 일어난 10.29 참사를 보면서 온 국민이 얼마나 마음에 심한 트라우마를 겪는지 체험했다. 그런데 만약에 지구의 인구에서 많은 수가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본다면 그 충격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것을 구원이라고 힘주어 가르쳤다. 그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럼 우리가 힘들게 예수님을 믿고 인내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되묻는 사람이 있다. 그는 왜 그런 질문을 할까? 그가 생각하는 구원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의인을 별도로 구원하여 천국으로 데려가시고 악인을 갈라내어 지옥불에 던지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과 의도가 그런 것이라고 믿기에 신앙생활의 목적도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장자의 기업은 사후에 누릴 영화로 이해된다. 그런 사람에게 이 땅에서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과 믿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런 폐쇄적인 생각을 고집한다면 장자들의 기업은 사르밧에 사는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내가 속한 교단인 하나님의 성회는 우리 교단의 이름이 장자들의 성회(총회)임을 기억하고 장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이 무엇인지, 그 기업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끝>.
참고:
이번 주일 설교 제목 - 하나님의 성회
설교안 전문:
https://cafe.daum.net/Wellspring/W8ej/9
설교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