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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가나카 경(M74)
(Dīghanakha 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독수리봉 산에 있는 수까라카따라는 동굴에 머무셨다.
2.그때 디가나카 유행승(*1)이 세존을 뵈러 갔다.(*2)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디가나카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3)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악기웻사나여,(*4) '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그것이 그대의 견해로구나.
'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 견해는 적어도 그대가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고따마 존자시여, 제가 이 견해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1)디가나카 유행승은 사리뿟따 존자의 여동생의 아들이었다. 주석서에 의하면 그는 단견론자(斷見論者)였다고 한다.(MA.ⅲ.203)
(*2)“디가나카 유행승은 왜 세존을 뵈러 갔는가? 사리뿟따 존자가 출가한 지 보름이 되었을 때 디가나카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내 외숙부가 다른 교단에 출가했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문 고따마의 곁으로 출가한 지 보름이 되었다. 그의 소식도 듣지 못했고, 훌륭한 교법(sāsana)인지 그것을 알아야겠다.’라는 생각에 세존을 뵙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MA.ⅲ.203)
(*3)“‘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모든 재생(upapattiyo)과 더불어 모든 재생연결(paṭisandhiyo)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것으로 나는 단견을 주장하는 사람(ucchda-vāda)이다.’라는 것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그의 의도는 우선 제쳐두고 그의 말에서 결점을 드러내시면서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대의 견해는 적어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신다.
그러나 디가나카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자기의 견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인정할 수 없는 자기의 견해는 변함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 ‘아무것, 모든 것(sabbaṃ)’ 속에 자기의 견해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말에 모순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보호하려 하지만 자기의 견해를 인정할 수 없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결국 단견(uccheda-diṭṭhi)에 대한 단멸(uccheda)을 긍정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MA.ⅲ.204)
(*4) 악기웻사나(Aggivessana)는 웨살리의 종족의 이름인 듯하다.
3. "악기웻사나여, 지금 이 세상에는 '그것은 마찬가지일 뿐이다. 그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일 뿐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런 견해를 버리지 않고 또 다른 견해를 취착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5) 악기웻사나여, 지금 이 세상에는 '그것은 마찬가지일 뿐이다. 그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일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런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를 취착하지 않는 자들은 훨씬 적다.“
(*5)“그런 견해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견해를 버리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말이다.” (MA.ⅲ.204)
4. "악기웻사나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나는 일체를 인정한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악기웻사나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악기웻사나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악기웻사나여, 여기서 '나는 일체를 인정한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의 견해는 욕망에 가깝고 족쇄에 가깝고 환락에 가깝고 집착에 가깝고 취착에 가깝다.
악기웻사나여,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의 그런 견해는 욕망 없음에 가깝고 족쇄 없음에 가깝고, 환락 없음에 가깝고 집착 없음에 가깝고 취착 없음에 가깝다.“
5. 이렇게 말씀하시자 디가나카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의 견해를 추켜세워 주시는군요.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의 견해를 아주 추켜세워 주시는군요."
"악기웻사나여, 여기서 사문·바라문들은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는데, 그들이 인정하는 그런 견해는 욕망에 가깝고 족쇄에 가깝고, 환락에 가깝고 집착에 가깝고 취착에 가깝고,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그런 견해는 욕망 없음에 가깝고 족쇄 없음에 가깝고, 환락 없음에 가깝고 집착 없음에 가깝고 취착 없음에 가깝다.“
6. "악기웻사나여, 여기 '나는 일체를 인정한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 바라문들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한다.
‘나는 일체를 인정한다.’라는 이런 견해를 가졌는데, 내가 이것을 완강하게 고수하고 고집하여 주장하기를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쓸모가 없다.'라고 한다면 내게는 다른 두 사람과 불화가 생길 것이다. 즉 '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과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과 불화가 생길 것이다.
불화가 있으면 논쟁이 생기고 논쟁이 있으면 다툼이 있고 다툼이 있으면 곤혹스러움이 있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불화와 논쟁과 다툼과 곤혹스러움을 자신에게서 잘 관찰해 보고서
그런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를 취착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이런 견해들은 버리고 이와 같이 이런 견해들을 배제하게 된다.“
7. "악기웻사나여, 여기 '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한다.
'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견해를 가졌는데, 내가 이것을 완강하게 고수하고 고집하여 주장하기를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쓸모가 없다.'라고 한다면
내게는 다른 두 사람과 불화가 생길 것이다,
즉 '나는 일체를 인정한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과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과 불화가 생길 것이다. 불화가 있으면 논쟁이 생기고 논쟁이 있으면 다툼이 있고 다툼이 있으면 곤혹스러움이 있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불화와 논쟁과 다툼과 곤혹스러움을 자신에게서 잘 관찰해 보고서
그런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를 취착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이런 견해들을 버리고 이와 같이 이런 견해들을 배제하게 된다."
8. "악기웻사나여, 여기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한다.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견해를 가졌는데,
내가 이것을 완강하게 고수하고 고집하여 주장하기를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쓸모가 없다.'라고 한다면, 내게는 다른 두 사람과 불화가 생길 것이다.
즉 '나는 일체를 인정한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과 불화가 생길 것이다.
불화가 있으면 논쟁이 생기고 논쟁이 있으면 다툼이 있고 다툼이 있으면 곤혹스러움이 있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불화와 논쟁과 다툼과 곤혹스러움을 자신에게서 잘 관찰하고서
그런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를 취착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이런 견해들을 버리고 이와 같이 이런 견해들을 배제하게 된다.“
9. "악기웻사나여,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성장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분리되고 분해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것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쇠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 몸에 대해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쇠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하는 자는
몸에 대한 욕망과 몸에 대한 애정과 몸에 복종함(*6)을 버린다.“
(*6)“‘몸에 대한 욕망(kāya-chanda)’은 몸에 대한 갈애이고, ‘몸에 대한 애정(kāya-sneha)’은 몸에 대한 갈애를 동반한 애정이고, ‘몸에 복종함(kāy-anvayatā)’이란 몸에 순종하는 오염원(kilesa)을 말한다.” (MA.ⅲ.207)
10. "악기웻사나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악기웻사나여, 사람이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그때는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지 않고 오직 즐거운 느낌만을 느낀다.
악기웻사나여,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그때는 즐거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느끼지 않고 오직 괴로운 느낌만을 느낀다.
악기웻사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
그때는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을 느끼지 않고 오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을 느낀다.“
11. "악기웻사나여, 즐거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 따라 일어난 것이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인 것이고 빛바래기 마련인 것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것이다.
악기웻사나여, 괴로운 느낌도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 따라 일어난 것이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인 것이고 빛바래기 마련인 것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것이다.
악기웻사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 따라 일어난 것이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인 것이고 빛바래기 마련인 것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것이다.“
12. "악기웻사나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즐거운 느낌도 염오하고, 괴로운 느낌도 염오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염오한다.
염오하기 때문에 탐욕이 빛바랜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첨부 참조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3. "악기웻사나여,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한 비구는 누구를 편들지도 않고 누구와 논쟁하지도 않는다.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말을 집착하지 않고 사용할 뿐이다." (*7)
(*7) 부처님께서는 『디가 니까야』 제1권 「뽓따빠다 경」(D9) §53에서도
“찟따여, 이런 것들은 세상의 일반적인 표현(loka-samañña)이며, 세상의 언어(loka-nirutti)이며, 세상의 인습적 표현(loka-vohāra)이며, 세상의 개념(loka-paññatti)이다. 여래는 이런 것을 통해서 집착하지 않고 사용할 뿐이다(voharati aparāmasaṃ).”(D9 §53)라고 말씀하신다.
14. 그때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의 뒤에서 세존께 부채질을 해드리면서 서 있었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존께서는 참으로 이런 법들을 최상의 지혜로 알아서 제거하는 것을 말씀하시는구나.
세존께서는 참으로 이런 법들을 최상의 지혜로 알아서 제거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구나.'(*8)
사리뿟따 존자가 이처럼 숙고하였을 때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에서 마음이 해탈했다.(*9)
(*8) “‘최상의 지혜로 알아서 제거하는 것을 말씀하시는구나(abhiññā-pahānamāha).’라고 했다. 영속[常見,sassata] 등 각 법들에서 영속을 최상의 지혜로 알아서 영속을 버림을 말씀하셨고, 단멸[斷見, uccheda]이나 일부 영속(ekacca-sassata)을 최상의 지혜로 알아서 단멸이나 일부 영속을 버림을 말씀하셨다. 물질을 최상의 지혜로 알아 물질을 버림을 말씀하신 것 등으로 [오온을 버림을 말씀하신 것으로]알아야 한다.”(MA.ⅲ.208)
(*9)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에서 마음이 해탈했다.’라고 했다.
취착 없이 소멸함으로 인해 소멸한 번뇌들에서 마음이 취착하지 않고 해탈했다는 말이다. 마치 남에게 제공한 밥을 먹고 배고픔을 물리치듯이, 사리뿟따존자는 세존께서 조카에게 설하신 법문의 지혜에 들어가, 위빳사나를 증장시켜 아라한과를 얻어 제자들이 얻는 바라밀의 지혜의 정수리가 되었고, 디가나카는 예류과를 얻어서 귀의하게 되었다.”(MA.ⅲ.209)
15. 그리고 디가나카 유행승에게 '무엇이든 생기기 마련인 것은 모두 멸하기 마련인 것이다.'라는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이 생겼다.
그래서 디가나카 유행승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체득했고,
법을 간파했고, 의심을 건넜고, 혼란을 제거했고, 무외(無畏)를 얻었고,
스승의 교법에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16.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 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디가나카 경(M74)이 끝났다.
출처:
https://cafe.daum.net/vipassanacenter/MhEB/254
대림 스님 옮김, 『맛지마니까야 제3권』, 109~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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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염오하기 때문에*1 탐욕이 빛바랜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에*2 대한 “뱀의 비유 경(M22, 대림 스님 옮김, 『맛지마 니까야 제1권』, 556~557쪽”의 주해는 다음과 같다. 일부 용어 수정.
*주1: ‘염오하다’의 원어는 ‘nibbindati’인데, 이것의 명사형인 nibbidā는 여러 곳에서 ‘염오’로 번역된다. 주석서(MA.ⅱ.114)는 “여기서 nibbidā는 [道의] 출현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를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상윳따니까야 주석서』 등 다른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염오를 설명한다.
“‘염오’란 염오의 지혜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 즉 [10가지 위빳사나의 지혜 가운데] ④두려움의 지혜 ⑤허물의 지혜 ⑦벗어나려는 지혜 ⑨ 형성 평온의 지혜를 말한다.”(SA.ⅱ.53) (「의지처 경」(S12:23) §4에 대한 주석)
*주2: “‘탐욕이 빛바랜다(virāga).’라는 것은 도(magga)를 말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통해서 ‘해탈한다.(vimuccati)’는 것은 과(phala)를 말한 것이다. ‘해탈할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는 것은 반조(paccavekkhaṇā)를 말한 것이다.” (MA.ⅱ.115)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