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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3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8주)
우리 안에 가라지가 보일 때
창28:10~19; 롬8:12~25; 마13:24~30,36~43
오늘 읽은 창세기의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장면입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후에 그들의 화를 피하여 도망치는 장면이지요. 이 이야기 속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번 넘겨준 축복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세간의 생각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형 에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긴 것에 대해 그냥 넘어갈 기세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권고로 피난길에 올라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약 850Km나 되는 긴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은 길을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어 거기서 하룻밤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야곱의 타향살이 여정은 밤 시간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이 여정을 끝내고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은 32장에 나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20년 동안 형을 피해 있다가 마침내 형을 만나기 위해 고향 가까이 오다가 얍복강에서 어떤 이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고 엉덩이뼈가 상했지만 기어코 그의 축복을 받아내고 새벽에 브니엘을 걸어 나오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야곱의 긴 여정은 밤에서 시작하여 동터오는 새벽으로 끝이 납니다. 야곱의 여정에서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밤과 새벽, 그 사이는 야곱이 걸어야할 내적 여정인 어둔밤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선 긴 여정을 시작하는 그날 밤, 야곱의 심경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둠이 깔리는 시간, 밤은 점점 깊어가고,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리고, 밤 광야의 추위는 옷깃을 헤치고 비집고 들어옵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어 베개를 삼고 잠을 청합니다. 하지만 거칠고 차디찬 땅바닥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늘 어머니의 보호 속에서 천막 안에서만 생활해 온 야곱에게는 모두 낯설고 두렵기만 합니다.
이때 야곱의 심경은,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가득 찼을 것이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아냈지만, 막상 도망자 신세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비참함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하란에 살고 있다는 외삼촌 하나 믿고 길을 떠났지만, 미래에 대한 막막함과 불안함 엄습했을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심정이 쉴새없이 몰려와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그는 어렴풋하게 잠이 들었다가 꿈을 꿉니다. 꿈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땅에서 솟아오른 층계가 하늘 꼭대기까지 닿아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땅 약속과 자손 약속,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남을 속이고 남의 발꿈치나 잡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을 왜 돌아보시고 보살피시는가? 우리는 반문할 수 있습니다. 아마 사람의 잣대로는 이것이 정의롭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께서 이렇게 야곱을 보살펴 주신 것에 우리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야곱처럼 그렇게 완전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늘 욕망과 야망과 상처와 갈등 속에서 살아가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과 약함과 실수로 “내가 바라는 그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야곱의 완전함을 보고서야 그에게 나타나시고, 그때에야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정의로운 하나님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무서운 하나님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그 어떤 인간적인 전제조건과도 결합된 적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 실수를 통해 일을 하십니다.(그렇다고 우리가 일부러 잘못을 저질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살 때, 우리가 애쓰려고 했던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연민을 우리의 불완전한 삶 속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의”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주저앉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고 빨리 당신을 향해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야곱의 이 벧엘 체험에서 “야곱이 머물렀던 자리”와 “야곱이 정말 머물렀던 자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머물렀던 자리”는 비참하고 불안한 자리였습니다. 그것은 도망자의 자리였고, 은연중에 자신의 상처를 상기하게 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돌보심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정말로 머물렀던 자리”는 하늘 꼭대기와 만나는 자리였고,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자리였으며, 하나님의 현존과 약속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삶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또는 비참하고 고통스런 현실, 언뜻 보면 그곳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자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 안에 사람들은 “우리가 정말 머물고 있는 자리”를 보아야 합니다. 삶에 놓여진 짙은 어둠은 비록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 때문에 생겼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은총의 통로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정말로 머물렀던 자리”를 다시 보았습니다. 야곱은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야곱이 급하게 도망가는 와중에, 온갖 인간적 약함과 무력감으로 감싸였던 그 자리에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을 깨달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 주님께서 보호하시고 감싸시는 그 자리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내가 머문 그 자리가 아니라, 내가 “정말로” 머무는 자리입니다. 내가 “정말로” 머무는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비 안에서 나를 보는 자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 애통해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연민에 우리 마음을 여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reality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소위 “가라지 비유”입니다. 밀밭에 함께 자라는 가라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비유는 그 가라지를 일군들이 잠자는 동안 원수가 와서 밀 가운에 뿌리고 갔다고 말합니다.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보니, 가라지도 보였습니다. 일군들은 가라지를 모두 뽑아버리겠다고 했지만, 주인은 추수 때까지 남겨두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선하고 이해할만하고 아름다운 세상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이 성행하고 이해할 수 없고 추악한 일들이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시각각 올라오는 뉴스를 보면, 이 세상은 좋은 밀들만이 자라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가라지가 더욱 돋보이는 세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을까 탄식하기도 하고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분노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이 있기나 한 건가 낙담하거나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마도 오늘 나온 야곱을 보면서도, 어떻게 저런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어떻게 한 민족의 시조가 되지? 라며 의아해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들의 삶 속에서 무수히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힘들어 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습 때문에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을 세상과 밖의 사람들에게서만 보는가요? 나 자신은 어떤가요?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엄청난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내 것이라고 하기 싫어서, 무시하고 눌러놓은 무수히 많은 가라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안에 그것을 보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들어 그것을 남의 것인 양 던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라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분노하면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리려고 하는 매우 정의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라지의 존재에 대해서 낙담하거나 절망하면서 아예 가라지를 보려고 하지 않거나 가라지로 인해 자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태도에 대해서 다 경계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몇 가지 깨달음을 줍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현실은 분명히 과도적인 시기임을 말해줍니다. 여기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하고, 이해할 수 있음과 부조리가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째 이런 일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 로마서의 말씀대로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롬8:20)
그러므로 두 번째, 이 세상에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악을 다 없애려고 하고, ‘이해할 수 없음’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음’으로 바꾸려고 하면, 삶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가라지를 뽑아 버리면 곡식도 함께 뽑히고 맙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자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완벽주의적으로 무결점에 집착한다면, 그 댓가는 무결실 밖에 없습니다. 거기서는 곡식이 자라지 못합니다.
여기서 가라지는 우리에게 불편한 것, 우리의 척도에 맞지 않는 것들을 모조리 밀어 집어넣은 어두운 그림자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가라지 씨가 사람들이 잠자는 밤에 뿌려졌다는 것은 가라지가 바로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의식하고 있는 낮 동안에는 모든 부정적 요소들과 어두운 것들을 거슬러 싸워갈 수 있으나, 밤에는 가라지 씨가 뿌려지는 일이 여전히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셀름 그륀은 이 가라지의 비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완벽한 존재로서 완벽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밭에서는 오직 걱정에 가득 찬 밀들만이 자라게 된다.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자신의 영혼 안에 들어 있는 가라지에만 신경을 쓰고 그것을 뽑아 없애버리는 일에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면서 헤어나오지 못하여, 그들의 삶은 이러한 작업에 의해 상당히 고통을 받는다. 완벽함을 추구한 나머지 다른 일을 위한 마음이나 힘 또는 고생을 짊어질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라지와 화해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밭에서 밀이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와 화해한다는 말은 우리 자신의 어두운 면을 우리가 어떻게 하려고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어두운 부분을 감추고 억압해서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부분을 지금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라지와 화해한다는 것은 나의 수치스럽고 감추고 싶은 것들이 보일 때, 그것들을 그대로 내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깊은 내면에서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하나님 제게 이런 약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제가 어떻게 해보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내어 드립니다. 하나님, 저의 이 어둠을 맡아주십시오.”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우리가 머문 자리가 아니라, 정말 우리가 머문 자리가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비난이나 질책이 아니라,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난이나 질책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이지요.
물론 우리는 가라지를 무성하게 자라도록 뇌두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가라지는 주시해야 하고, 유사시에는 잘라내야 합니다. 그러나 뿌리채 뽑아 버리는 것만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잘못된 것들을 다 없애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우리 영혼은 황폐해질 것이고, 좋은 것도 더 이상 자라지 못할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를 둘 다 자라도록 놔두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심과 평상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가 평가하겠다는 강박관념으로 부터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 모든 판단은 추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아주 중요한 것인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우리의 모든 판단의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비유가 말씀하려고 하는 요지도 이런 말씀일 것입니다. 비록 악이 판을 치고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마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으로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