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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5;16-26.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에 생각하는 성령의 열매의 의미. 2024. 5. 19.
1. 오늘은 2024년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며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성령이 임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이유가 무엇일까?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자들의 삶 가운데 열매를 맺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열매와 가지는 뿌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뿌리에 달려 있습니다.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가지가 무성한 가지가 되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게 됩니다. 그러니까? 뿌리에 중심이 있습니다.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가지와 열매의 무성함이 좌우 됩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30배, 60배와 100배의 무성한 열매는 뿌리와 떨어질 수 없습니다. 마7;16-20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러분,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그렇지 못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물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삶을 통해서 그 열매들이 어떠하냐? 주어진 것과 결과와 가지고 있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드러나는 표현과 행동과 사고하는 것으로 그 나무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매로 그 나무를 압니다. 그런데 본문 갈5;22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The fruit of Spirit), 열매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열매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의 열매, 자녀와 육체의 열매가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요15: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세상에 보내신 궁극적인 목적 중에 하나가 삶 가운데 열매를 맺기 위함이었습니다.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맺을 수 없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 3가지를 말씀합니다.
1-1. 성령을 쫒아 행하라. 5;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표현은 성령 안에서 걸어가라(Walk in the Spirit)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쫒아 행하고 걸어가라는 표현이 무슨 말씀일까요? 과거에 성령체험을 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체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과거의 성령 체험이 오늘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과거의 능력이 계속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받았던, 그래서 누렸던 은혜가 오늘도 강건하게 세워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능력이 되는 성령을 따라 살고, 성령 안에서 걸어가야 합니다. 매 순간과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 안에서 성령을 따라 걸어가는 삶이 성령의 삶입니다. 그래야 오순절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오순절 성령과 이전의 성령의 임재의 차이가 무엇인가? 오순절에 성령께서 처음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요14;16-17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많은 사람들은 내가 예수를 믿었을 때 물론 성령이 내 속에 들어왔지만, 그러나 내가 다시 넘어지면 성령이 나를 떠나시지는 않을까? 물론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과 사사들에게 임했던 성령이 떠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영원토록 있게 하시리니. 한 번 들어온 성령은 잘못의 유무에 따라 성령이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근심하시고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편해 하십니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5;16.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들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성령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왜요?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예수를 믿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지만 그렇다고 육체의 욕심이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욕심을 변화시켜 성령의 생각으로 바꿔 주신 것도 아닙니다. 욕심과 옛 성품을 그냥 두신 채로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이 부어져도 여전히 허물 가운데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갈등의 시작입니다.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더 심각한 갈등을 합니다. 그래서 거슬림과 대적함을 말씀하는데 바로 이것이 갈등(conflict)입니다. 그러나 이 갈등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새로운 창조이고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며 열매의 씨앗입니다. 여러분, 고민과 갈등을 해야지요. 이 고민과 이 갈등을 겪지 않고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전에는 잘못에 대하여 신앙과 마음에 아무런 갈등이 없었는데,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조그만 잘못을 해도 민감하게 갈등과 고민으로 싸웁니다. 왜 그럴까요?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고민과 갈등을 넘어서 육체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을 좇아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되면 자유의 삶이 이루어지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움이 지켜질 수 있습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복으로 다가 옵니다. 용서를 하면, 용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처음의 세 마디 표현 중에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이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과 믿음의 열매가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성령을 쫓아 행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 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하면 오히려 말씀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성취하며 소망의 열매를 이루어 간다는 거지요.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의 20세기 대 부흥사 무디가 있습니다. 어떻게 대 부흥사가 되었을까요? 무디는 늘 성령을 쫓아 행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간구 했습니다. 이것이 무디 목사님을 능력 있는 삶의 비밀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과 소욕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뿌리에서 가지로,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1-3. 육체의 일입니다. 19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그런데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 하나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육체라는 헬라어는 사르크스 (sarx)입니다. 로마서를 비롯한 성경 여러 곳에서 육신과 육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영어 성경은 flesh입니다. 신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신체를 뜻하는 말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소마(soma)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몸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body로 구별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르크스, 육체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을 뜻합니다. 죄로 기우는 경향성입니다. 의도와 숨겨진 생각과 경향성과 나쁜 끼라고 표현이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에 치명적인 손상이 왔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지배를 받게 된 인간에게 실제적인 문제가 바로 16, 17에 나오는 육체의 욕심과 육체의 소욕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이 육체가 우리 속에서 자꾸 무엇인가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로 하여금 미치도록 보고 싶게 만들고, 먹고 싶게 만들고, 갖고 싶게 만들고 행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더 중요한 말이 바로 육체의 일입니다. 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저지르게 되는 허물입니다. 이 허물들의 목록이 19-21까지 소개되는데, 육체의 일은 크게 네 범주로 구분합니다. 성적인 허물과 종교적인 허물과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허물과 무절제한 허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체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은 육체의 욕망의 그늘 아래 욕망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허물을 가까이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무엇으로요?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여러분, 육체의 소욕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욕망과 경향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성령으로 채워나가면 육체의 소욕은 줄어들지만 육체의 소욕으로 70%를 채우면 나머지는 성령으로 채워져 가야할 공간이 그 만큼 작아집니다. 그러면 육체의 소욕으로 19-21절에 나오는 15가지에 빠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육체가 타락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신앙인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은 우리와 멀어지게 됩니다. 육체의 일은 그 뿌리가 세상에 기초를 두는 것이고, 거기서 가지는 영향을 받고, 결국은 아무 열매가 없는 무성한가지나, 말라 버린 가지가 됩니다.
2. 오직 성령의 열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만들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자라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만드는 것(making)과 자라는 것(growing)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자란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커 가는 것이고, 만든다는 것은 당사자의 의도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성령을 좇아 행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맺게 해주시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열매라 하지 아니하고 육체의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육체의 일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맺게 하심으로 자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옮겨 심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적 삶은 성령의 열매로 인한 변화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세 그룹으로 나눕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야 할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있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어야 할 열매인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이 있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야 할 열매인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무엇일까요?
2-1. 사랑, 희락, 화평 이 세 가지 열매는 하나님에 대한 자세입니다. 홍수 때 가장 흔한 것이 물인데 홍수 때 가장 귀한 것 또한 물입니다. 오늘날 사랑의 홍수 속에서 모든 주제가 사랑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에 굶주려 있지 않습니까? 성령의 첫 번째 열매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 아카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이로 인하여 우리가 주의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마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다윗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점진적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성품이 색깔만큼이나 화려하고 다양합니다. 기 나름의 성향을 품고 살아갑니다. 미미한 차이부터 완전히 다른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어떤 관계든지 늘 서로에게 오해가 생기고 실망을 안겨줍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줘야 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아름다운 관계가 지속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로 태어났으며 무한경쟁의 상황에 던져졌습니다. 이것을 대치 상태로 끌고 갈 것이냐 아니면 다양성을 계발하여 더욱 화려한 삶을 누릴 것이냐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인데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희락(joy), 희락은 기쁨인데, 이 기쁨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기쁨은 외부 환경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빌 4:10-12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기뻐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아닙니다. 희락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얻는 기쁨과 믿음으로 얻는 기쁨이 희락입니다.
화평(peace), 허물이 있는 사람에게는 화평이 없습니다. 화평은 돈이나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할 때 반드시 기차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인데, 그만큼 적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평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질 때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을 때 받는 선물입니다.
2-2. 두 번째 성령의 열매는 사회적 덕목,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먼저는 오래 참음(patience)입니다. 인내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치에 다다르면 폭발합니다. patience는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오래 참아야 하는가? 상대방이 나와 같은 깨달음이나 감정을 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하려면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끝까지 참아 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오래참음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기까지 참고, 죽기까지 참는 것입니다.
자비(kindness), 친절함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이 상황을 외면했지만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율법사가 대답하기를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과 자기 자랑하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으로 여기면서 수고하는 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자비는 자신을 향하여 무례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까지 친절을 베푸는 태도입니다. 마 12:7 나는 인애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친절함입니다.
양선(goodness). 착한 행실로 나타난 사랑입니다. 양선은 자비보다는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향의 열매입니다. 기다리는 선이 아니라 찾아가서 베푸는 선입니다.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서 베푸는 선입니다. 갈 6:9-10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patience와 자비와 양선은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2-3. 자기 자신을 향한 태도인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충성(faithfulness)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하여 변함없이 일관성 있는 성실한 태도입니다. 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소명을 받았고 그 소명대로 충성을 했는데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온유(gentleness).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부드러운 태도인데 유약함과 나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야 하는 특성입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는 온유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려는 태도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태도는 온유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온유는 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힘과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조절된 능력입니다. 온유함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십자가가 온유를 나타냅니다. 열두 영 더 되는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반전을 이룰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더 위대한 일을 위해서 감수하는 것 이것이 온유입니다. 힘은 있으되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온유입니다.
절제(self-control).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절제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 성령으로 쫓아 살면. 성령의 열매가 자동으로 맺혀집니다. 삶의 현장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사모하고 성령의 열매들 풀성하게 맺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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