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시 조양각 뜰에 있는 산남의진비>
1.인적사항
o성명 : 정치석(鄭致錫)
o본적 : 경북도 영천군 자양면 용산동 962 번지
o생몰년도 : 1868년 1월 15일생 ~ 1931년 6월 22일 몰
o독립운동계렬 : 의병(산남의진)
o후손 : 증손(曾孫) : 정인식(鄭寅植), 정순식(鄭淳植)
종손(從孫) : 정연체(鄭淵棣) - 생가 조부이신 정치석의사 추서 신청을 함
2.공적사항
<요약개요>
을사늑약이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에 정환직, 정용기, 부자가 중심이 되어 산남의진을 창의할 때 동생 정치우와 함께 영천지역 소모책임자로 활발한 소모활동을 전개하여 의진 결성에 크게 기여하고, 이후 전개된 항일운동에 적극참여하다가 정용기대장이 입암전투에서 전사하고 정환직대
장이 체포, 순절하자 고향에서 은신하며 지하 항일활동을 지원하였다.
<공적내용>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학덕이 높았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관대하여 주위사림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워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1905년 정환직이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와 의논하여 영남지방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관
동으로 진군할 것을 결의하고 정용기로 하여금 창의 할 것을 명하자 곧바로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와 영천
창의소를 마련, 경고문 및 통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부하고 찬획담당자와 지역의 연락 담당 및 지역활동 책임자를 선정하는 등 본격적인 모병활동에 착수했다.
1)이때 정치석는 37세로 동생 정치우 등과 함께 영천지역 소모활동 책임자로 임명되어 적극적인 소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2)1906년 3월 정용기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산남의진이 결성되어 신돌석의병진을 돕기 위해 영해방면
으로 이동 중 경주진위대 신석호의 간계로 정용기대장이 체포되자 중군장 이한구의 지휘 하에 영일,
영덕, 등지에서 항일 활동을 전계하다가 1906년 6월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진을 일단해산하자 고향으
로 돌아와 재차 의거를 위한 준비에 전념했다.
3)1907년 4월 정환직 주선으로 정용기가 석방되어 다시 창의할 때 동생 정치우와 함께 소모활동에 전
념하였으며 영천, 영일, 청송 등지에서 전개된 여러 차례의 항일전투에 참전하였다.
4)1907년 10월 임암전투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정환직이 제2대 대장으로 취임하였고 정치석은 영천
지역 군자금 모금활동에 적극 전개하였다.
5)1907년 12월 11일 정환직대장이 체포되어 총살순국하자 은신하여 항일활동을 지원하다가 1931년 6
월 22일 광복을 보지 못하고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거증자료 목록
1.山南倡義誌 卷下 pp34-3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4집.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pp611
2.山南義陣遺史 산남의진유사간행위원회 1970. pp,257-258, 542
3.영천의 독립운동사 영천항알독립운동선양사업회, 2013, pp,106-108
4.조인호 <산남의진의 조직과 대일항쟁>. <鄕土慶北> 제7집, 경북향토사구협의회, 2009, pp112-115
5.<영일정씨세보> 9권 영일정씨세보청, 1981, p879
6.忠義孝烈記, p334
첫댓글 토골 할배께서 애구지사 대통령표창 추서 받으심을 짐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장성할매 가족에게도 축하드립니다,
토골할배께서 한학에 밝으셔서 추모정에 학당을 차려 훈장으로 후진양성에 힘을 많이 쓰섰다고 한다.
그르니 인구,월연 귀미 등지의 많은 인재를 양성하셨고 우리 아버지께서도 배움을 받으셨다고 한다.
훗날 제자들이 학계를 만들어 계속되다 지금은 열리지 않고있다.
산남의진에 참여하심도 그시대에 유림들이 국가관이 투철해서 많이 참가했으며 그래서 우리마을에서 많은 분이 창의하신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마을은 8촌이내라 물심양면으로 산남의진에 협력을 했으리라 생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