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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續六
성지행(成至行) 묘표(墓表) - 성덕윤(成德潤)
선비란 본래 학문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만으로 자처하지 않으면서 단정 장중 온화 겸손한 덕을 지녀 꾸밈없는 순박한 선비의 기상이 있어야 하고, 또한 일찍이 산림(山林) 사이에서 세상의 물정(物情)을 잊는 것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청고(淸高)하고 개결(介潔)한 지조가 뚜렷하여 은일(隱逸)의 풍치가 있어야 하나니, 그런 이는 오직 나의 조부 매곡공(梅谷公)뿐일 것이다.
공(公)의 성은 성씨(成氏)요 관향이 창녕(昌寧)으로, 휘(諱)는 지행(至行)이요 자(字)는 여경(汝敬)이며 매곡(梅谷)은 그분의 자호(自號)이다. 문정공(文貞公) 휘 수침(守琛)의 5대손이고, 문간공(文簡公) 휘 혼(渾)의 현손(玄孫)이다. 고(考) 휘 희주(熙胄)는 첨정(僉正)인데 공의 벼슬로 하여 대사헌(大司憲)으로 증직(贈職)되었다.
비(妣) 칠원 윤씨(漆原尹氏)와 계비(繼妣)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증(贈) 정부인(貞夫人)이다. 백행(百行) 가운데 오직 효와 우애가 근원이 되는데, 공은 어버이를 섬기되 효(孝)로 하였고 상중(喪中)에 있을 때는 맞이해서는 예(禮)를 다하였으며, 선대(先代)를 받들되 경(敬)을 다하였다.
아우 셋과 누이 둘이 있고 서제(庶弟) 또한 셋이었는데, 중간에 벼슬에 나갔을 때 두 아우와 한 누이가 내[川]를 사이에 두고 궁하게 살았으므로 벼슬에 있으면서 녹봉(祿俸)을 나누어주기를 혹 하루도 잊는 일이 없었다.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쉬게 되자 각각 밥을 지어 먹긴 하였으나 매일 모여 술을 마시거나 시(詩)를 읊었는데, 무성한 화기(和氣)는 강금1)(姜衾)의 즐거움이 있어 사람들은 군말이 없었다.
그리고 서제(庶弟)들이 업(業)을 가질 수 있는 자에게는 생산(生産)에 대비해 나누어주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더불어 숙식(宿食)을 같이하며 어린 자식처럼 여겼다. 공은 학문이 해박(該博)하고 글씨 또한 정밀(精密)하였으며, 여러 번 대소과(大小科)에 나아갔으나 실패하니 운(運)이라 하겠다.
처음에 능 참봉(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중간에 다시 진전 참봉(眞殿參奉)에, 끝에 가서는 기곡단(祈穀壇)을 거쳐 고ㆍ원ㆍ감ㆍ부(庫院監府)를 지내고 영읍(嶺邑)의 수령으로 나아갔다가 두어 해 안되어 파산도(坡山圖) 6첩(疊)을 그리어 서문을 쓰고 시를 지은 다음에 미련없이 돌아와 나무와 꽃을 심고 거문고와 책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뒤에 다시 시강원(侍講院)에 있다가 외직에 나가 산골 고을의 현령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산골 고을 백성들의 순후(醇厚)함을 사랑하였고 백성들은 수령(守令)의 깨끗함을 즐거워하였으므로, 5, 6년 사이에 정사는 공평해지고 송사(訟事)는 줄어드니, 이름하여 ‘태평관부(太平官府)’라 일컬었다.
임기가 차자 노래를 지어 부로(父老)들의 전송(餞送)에 답한 것이 있는데, 거민(居民)들 사이에 지금까지도 전한다. 공의 생각에는 ‘우리 집안에서 음사(蔭仕)를 하는 것은 유현(儒賢)의 제사를 생각해서이고, 벼슬 또한 때로는 가난을 위해서이다’라고 여겨, 의(義)에 있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임명이 있을 때에 곧 명을 받들긴 하지만 벼슬에 나아가 녹(祿)을 구함은 본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사(公事)가 아니면 발길이 공경(公卿)의 문전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산골 고을에서 돌아오자 공은 “내 지금 나이가 찼으니 구업(舊業)을 지키며 여생(餘生)을 마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집 앞 시내 위에 한 초정(草亭)을 지어 이름을 ‘청계(聽溪)’라 하고 날마다 그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아침저녁으로 읊조리니, 주 염계(周濂溪, 주돈이(周敦頤))와 정 이천(程伊川, 정이(程頤))의 의취(意趣)가 있었고, 꽃방석 풀자리에서 홀로 안락한 유취(遺趣)를 얻었다.
아! 시(詩)는 성정(性情)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오히려 백로에게도 기심(機心)이 있음을 혐의하노니 종일 물고기를 노리느라 또한 한가롭지 못하구나[猶嫌白鷺機心在 終日竅魚亦未閑]’라고 하였으니 공께서 사물(事物)과 서로 잊을 곳이 아니던가? ‘새는 날다가 무성한 나무로 돌아가고, 물고기는 뛰면서 깊은 못에 있다[鳥飛歸茂樹 魚躍在深淵]’고 공이 사물을 관찰하며 만족해 한 곳이 아니던가? 세상에 혹 이를 아는 자가 있는가? 아는 자가 없는 것인가?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공은 인품을 평하면서 “성장(成丈)은 장령(掌令)이나 지평(持平)의 소임에 알맞았으나 음사(蔭仕)의 길에서 늙었으니, 우리들의 잘못이다.” 하였고,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공은 시율(詩律)을 논하면서 “성우(成友)의 우아한 격조(格調)는 우리들에게 견줄 바가 아니다.” 하였다.
공께서는 나이 80여 세에도 서(書)와 역(易) 및 주자(朱子)와 정자(程子)의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책들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일과(日課)처럼 읽으며 “기욱(淇澳, ≪시경(詩經)≫의 편(篇) 이름)의 시(詩)를 보면 위 무공(衛武公)이 늙을수록 더욱 몸을 닦았음을 알 수 있는데,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은 늘 ‘남을 해치려고도 아니하고 재물을 탐하려고도 아니하니 어찌 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不忮不求 何用不臧]’와 ‘욕심을 부리면 의(義)에 어찌 강할 수 있겠느냐?[慾焉得强]’는 두 글말을 외우며 “이를 안다면 아마도 사람 구실을 할 것이다.” 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709, 숙종 35)에 시골로 돌아온 뒤로는 한번도 서울에 들어가지 않다가 갑오년(甲午年, 1714, 숙종 40)에 한성 소윤(漢城少尹)에 임명되자 사은(謝恩)하고 돌아왔고, 기해년(己亥年, 1719, 숙종 45) 정월에 나이 80세임으로 해서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으며, 2월에는 나라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이 있어 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므로 이에 사은하고 돌아왔다.
공은 필법(筆法)이 맑고 고풍(古風)스러웠는데, 즐겨 선대의 서첩(書帖)을 보며 언제나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임인년(壬寅年, 1722, 경종 2) 봄에 나 덕윤(德潤)에게 명하여 서첩을 상자에 넣어 두라 하며 “내 늙어 붓과 벼루를 이길 수 없다.” 하였는데, 그해 겨울 11월 22일 계상(溪上)의 집에서 고종(考終)하였다.
공은 경진년(庚辰年, 1640, 인조 18)에 태어났으니 졸(卒)한 나이는 83세이다. 임종(臨終)에 냇물을 떠 오라 명하여 세 모금을 마시고는 “티끌 세상의 장위(腸胃)를 씻은 것 같다.”고 하였으며, 이어 시(詩) 한 구절을 읊었는데, ‘인간에 잠깐 백년의 몸을 의탁하다가 우화(羽化)하여 마침내 인시진(認是眞)으로 돌아가네.
이로부터 초당은 영원히 적막할 것인데, 계상(溪上)에 가득한 화류(花柳)는 누굴 위한 봄이란 말인가?’ 하고, 집안 일에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이 덕윤(德潤)을 돌아보며 “실심(失心)치 말라.”고 하였으니, 뜻하는 바가 있었다. 부인 순천 김씨(順天金氏)는 목사(牧使) 김경항(金慶恒)의 딸이다.
2남 2녀를 낳으니 맏이 성인석(成仁錫)은 일찍 죽고, 다음 성의석(成義錫)은 군수(郡守)이며, 딸 맏이는 첨정(僉正) 윤득신(尹得莘)에게, 다음은 감역(監役) 김상면(金相冕)에게 출가하였다. 계부인(繼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후손 윤세귀(尹世龜)의 딸이다.
1남 3녀를 낳으니 아들은 성예석(成禮錫)이요, 딸은 박선창(朴善昌), 다음은 이휘민(李徽民), 다음은 신성(申)에게 출가하였다. 군수의 아들 성덕윤(成德潤)은 대사간(大司諫)이요, 사위는 이계창(李啓昌)ㆍ송윤손(宋胤孫)ㆍ정희룡(鄭羲龍)ㆍ유환규(柳煥奎)ㆍ진사(進士) 이윤휘(李允徽)이다.
성예석은 공보다 앞서 졸하였고 아들이 없어, 공이 명하여 덕윤의 둘째 아들 흘주(屹柱)를 대곡(大谷)의 고사2)(故事)에 의하여 그 제사를 주재하게 하였으며, 사위는 이형(李瑩)이다. 첨정(僉正)은 2남을 두니 윤창동(尹昌東)ㆍ윤만동(尹萬東)이요, 사위는 이황중(李黃中)이다.
감역(監役)은 2남을 두니 김육(金焴)은 진사(進士)요, 김식(金烒)은 일찍이 죽었다. 박선창(朴善昌)의 아들 박수규(朴壽奎)는 생원(生員)이요, 이휘민의 사위는 조한유(趙漢游)ㆍ김연일(金硏一)이며 아들은 어리다. 신성(申)은 2남을 두니 신경수(申景洙)ㆍ신경락(申景洛)이다.
나 덕윤은 3남을 두니 경주(擎柱)ㆍ흘주(屹柱)ㆍ윤주(崙柱)요, 사위는 조근(趙瑾)ㆍ한광정(韓光定)이다. 이계창(李啓昌)의 사위는 박상제(朴尙濟)ㆍ윤상항(尹尙恒)ㆍ교리(校理) 김상익(金尙翼)이요, 송윤손(宋胤孫)의 아들은 송언휴(宋彦休)요, 사위는 이만보(李晩輔)이다. 나머지는 모두 기록하지 못하여 대략 위와 같이 쓴다.
[각주]
1) 강금(姜衾) :
후한(後漢)의 강굉(姜肱)이 동생인 중해(仲海)ㆍ계강(季江)과 함께 효도로 어머니를 섬겼고 또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항상 침
실에서 한 이불을 덮고 지냈다는 고사.
2) 대곡(大谷)의 고사(故事) :
대곡(大谷)은 성운(成運)의 호(號)인데, 대곡이 무자(無子)하자 그 부인 김씨가 친정 오라버니의 아들 김가기(金可幾)에게 후사(後事)
를 위촉한 일. 여기서는 성덕윤의 중자(仲子)인 성흘주로 성예석의 제사를 주관케 한 것을 말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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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國朝人物考續六 / 蔭仕
成至行 墓表[成德潤]
士固有未嘗以學問上做工夫自居, 而其端莊溫謙之德, 粹然淳儒之氣像, 亦未嘗以山林間忘世情自處, 而其淸高介潔之操, 卓乎隱逸之風致者, 其惟吾王考梅谷公乎! 公成姓, 昌寧人, 諱至行, 字汝敬, 梅谷其自號也。 文貞公守琛五代孫, 文簡公渾玄孫。 考諱熙胄, 僉正, 以公爵贈大司憲。 妣漆原尹氏、繼妣安東權氏, 贈貞夫人。
百行之中, 惟孝友爲源。 公事親孝, 居喪盡禮, 奉先致其敬。 有弟三人、妹二人, 庶弟又三人,
仲遊於宦, 兩弟一妹隔溪窮居, 居官分廩, 未或一日忘。 晩年休退, 分餐而食, 逐日而會, 含杯詠詩, 藹然和氣, 有姜衾之樂, 人無間然。 於庶弟輩猶可作業者, 備生産出分; 不能者, 與同宿食, 念若稚子。
公文博而筆精。 累擧大小科不中, 數也。 夫初除寢郞, 中復眞殿, 終由祈穀壇, 歷庫、院、監、府, 出宰嶺邑, 未數年寫《坡山圖》六疊, 作序題詩, 浩然而歸, 種樹蒔花, 琴書自娛。 後復宮僚, 外拜峽縣。 公愛峽氓之醇厖, 民樂太守之淸淨, 五六年間, 政平訟息, 號稱太平官府。 瓜熟, 作歌酬父老之送餞者, 居民至今傳之。 公意以爲: “吾家蔭祿, 罔非軫儒賢祀事, 仕亦有時乎爲貧。” 義不敢辭, 有除輒黽勉承命, 而干祿非心。 以是非公事, 足不到公卿門。
自峽歸, 公曰: “吾今年滿, 守舊業終老可乎。” 築一草亭於前溪上, 名曰聽溪, 日逍遙於其間, 朝吟晩詠, 自有濂、洛之餘響, 花錦草茵, 獨得安樂之遺趣。 嗚呼! 詩出性情。 “猶嫌白鷺機心在, 終日窺魚亦未閑。” 其非公與物相忘處乎? “鳥飛歸茂樹, 魚躍在深淵。” 其非公觀物自得處乎? 世或有知之者乎? 其無有知之者乎? 明谷崔公錫鼎評人品曰: “成丈宜南臺, 而老蔭路, 吾輩過。” 西坡吳公道一論詩律曰: “成友雅格, 非吾輩比。”
年八十餘, 猶不廢《書》、《易》及朱、程性理諸書, 年年周復, 有若課讀, 曰: “觀於《淇奧》之詩, 可見衛武公老益自修, 烏可自棄?” 公常誦“不忮不求, 何用不臧?”、“慾焉得强”二句語, 曰: “知乎此, 其庶幾乎!”
己丑, 還山後, 一不入城市, 甲午, 謝拜京兆少尹而還。 己亥正月, 以年八十陞通政。 二月, 國有優老典, 又陞嘉善, 拜同知中樞府事, 肅命而歸。
公筆法淸古, 喜看先代書帖, 常留几案。 壬寅春, 命德潤藏諸篋笥曰: “吾老不堪筆硯。” 其年冬十一月二十二日, 考終于溪上宅。 公生於庚辰, 距卒之年八十三。 易簀日, 命取溪流, 三吸曰: “可滌塵世腸胃。” 仍詠一絶曰: “人間暫寄百年身, 乘化終歸認是眞。 從此草堂長寂寞, 滿溪花柳爲誰春?” 無一言及家事, 顧謂德潤曰: “毋失心爲可。” 意蓋有在。
夫人順天金氏, 牧使慶恒之女, 生二男二女: 長仁錫, 早死: 次義錫, 郡守。 女長適僉正尹得莘, 次適監役金相冕。 繼夫人海平尹氏, 月汀後世龜之女, 生一男三女: 男禮錫: 女適朴善昌, 次適李徵民, 次適申𢜫。 郡守男德潤, 大司諫; 女壻李啓昌、宋胤孫、鄭羲龍、柳燠奎、進士李允徽。 禮錫先公逝而無子, 公命以德潤仲子屹柱依大谷故事主其祀, 女壻李瑩。 僉正二男: 昌東, 萬東。 女壻李黃中。 監役二
男: 焴, 進士; 烒, 夭。 善昌男壽奎, 生員。 徽民女壻趙漢游、金硏一, 男幼。 𢜫二男: 景洙, 景洛。 德潤三男: 擎柱, 屹柱, 崙柱。 女壻趙瑾、韓光定。 啓昌女壻朴尙濟: 尹尙恒: 金尙翼, 校理。 胤孫男彦休, 女壻李晩輔。 餘未盡載, 略敍如右云。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