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2023년의 낭만
이영관 기자
입력 2023.08.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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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은 없었다. 여름휴가로 다녀온 여수 얘기다. 세 시간짜리 기차에 몸을 실은 이유는 오직 ‘낭만’ 때문. 어둑한 바다를 보며 노래 ‘여수 밤바다’를 듣는 상상을 줄곧 해왔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수많은 ‘낭만포차’에선 아이돌 그룹 노래가 큰 소리로 흘러나왔다. 말라비틀어진 갓김치를 먹다가, 노상으로 향했다. 낭만포차 1번·24번·80번…숫자를 세는 것도 포기할 즈음, 인적이 없는 둑방에 다다랐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조명 없는 곳에서 ‘여수 밤바다’를 들었다. 청승에 가까웠다.
이른바 ‘낭만파’가 기댈 곳 없는 시대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이 팍팍해진 것 이상으로, 생활과 정신이 황량해지고 있다. 위축된 문학 시장만 봐도 그렇다. 100만부 팔려야 대접받았다는 시절이 있는데, 지금은 스타 작가들도 10만부 판매를 넘기기 어렵다. 대다수에겐 초판 2000부가 팔리는 일이 기적이다. ‘소설’이란 단어를 서점보다는 “소설 쓰네”라는 정치인의 발언으로 접하는 이가 더 많지 않을까.
물론 ‘낭만’이란 이름의 유행은 있다. 얼마 전 갔던 을지로의 한 LP바가 떠오른다. 가게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켜고 가게 곳곳을 찍기 시작했다. 촬영 세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달에만 세 번째 LP바”라는 이가 있어, 이유를 물어보니 대답은 간단했다. “유행이잖아요”. 그날도 소셜미디어에 ‘#LP바’ ‘#감성’과 같은 해시태그가 달린 글이 여럿 올라왔을 터다. ‘낭만국밥’ ‘낭만치킨’처럼 전혀 호응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상호명도 ‘낭만’이 붙으면 용서된다. 팍팍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낭만파’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가끔은 애먼 데서 낭만을 찾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요즘 ‘비 때문에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을 읽어낸 것일까. 최근 유튜브에서 1990년대 ‘K 직장인’의 출근길에 관한 영상을 추천받아 한참을 웃었다. 비 때문에 회사와 연락이 끊긴 상황, 물이 가슴까지 차올라도 일단 걸어서 출근을 해야 했던 것이다. 마치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상황인데, 웃고 있거나 스티로폼으로 뗏목을 만들어 출근하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1990년대생인 기자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마 ‘다 같이 고생하네’와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닐까 싶다. 현실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나름의 낭만과 웃음을 찾았던 것이다.
폭염, 폭우에 이어 태풍까지 찾아온 올여름은 ‘낭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많은 이가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는데 낭만이라니. 그러나 현실을 낭만적으로 보는 일은 사치스러운 게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장의 힘든 상황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견딜 수 있게 해주니 말이다. 태풍 ‘카눈’이 오기로 예정된 전날인 9일, “태풍 전 막차 탄다”며 한강이나 카페를 가는 이들이 주변에 많았다. 다가올 태풍을 걱정하면서도, 그날의 낭만에서 며칠을 견딜 힘을 얻으려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해보니 여수에서 봤던 보름달도 참 환했다.
이영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