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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하심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허위의 장손녀인 허로자 할머니께서 80세의 고령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그동안 정부의 부실한 업무처리로 인해 그 알량한 독립유공보상금조차 지급받지 못했다고 하니 그의 집안에 큰 빚을 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지금부터라도 조국을 위해 온 몸을 던져 싸운 선조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 후손들을 배려하는 풍조가 생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허위는 1854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던 이름 높은 학자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세 분의 형님이 있었으니, 맏형 훈(薰, 호는 방산(舫山))을 비롯하여 둘째형 신(藎, 호는 로주(露州)), 셋째형 겸(蒹, 호는 성산(性山))이 그들이다. 요절한 둘째형을 제외하고 맏형 허훈은 한말의 거유로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였으며, 셋째형 허겸도 만주·시베리아 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그는 이기찬(李起燦), 이은찬(李殷贊), 조동호(趙東鎬)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협공하는 관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자 그는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북도 진천까지 진격했으나,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부대를 자진 해산했다.
그 후 허위는 대신 신기선이 고종황제에게 천거하여 벼슬길로 나가게 된다. 성균관박사, 주차일본공사수원(駐箚日本公使隨員),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 등을 거쳐 1904년에는 오늘날의 대법원장 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이 되어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송사를 처리하여 큰 칭송을 얻었다.
1904년에 접어들자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하게 하는 등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이상천(李相天), 박규병(朴圭秉) 등과 함께 일본을 규탄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그 격문에는 전 국민이 의병으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만행에 대해 정부 관료들은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에서 왕산이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규탄에 나섰던 것이다.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어 8월에는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 국권은 사실상 일제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때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우리 군인들이 항전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의병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왕산은 1907년 9월 강원도와 경기도의 접경지인 연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킨 뒤 적성(積城), 철원, 파주, 안협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는 한편, 각지에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친일매국노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던 중 전국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일본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48개 부대의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조직되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왕산은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이 되었다.
이때 서울 진공작전의 선공을 맡았던 왕산은 300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군하였다. 그러나 왕산의 선발대는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화력과 병력 등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배하고 말았다. 이어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자 왕산이 대리총대장 겸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총지휘를 맡게 되었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서울진공 작전은 좌절되었다.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왕산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항일전을 재개하였다. 그는 조인환(趙仁煥), 권준(權俊) 등의 쟁쟁한 의병장들과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왕산은 군율을 엄하게 정하여 민폐가 없도록 하였고, 군비조달 시에는 군표(軍票)를 발행해, 뒷날 보상해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 결과 주민들은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항일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왕산의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경남관찰사 자리를 제시하며 회유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내부대신으로 임명하겠다고 유혹했으나 왕산이 크게 꾸짖어 쫓아버렸다고 한다. 또한 과거 고종에게 자신을 천거했던 신기선이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왕산은 이를 단호히 물리치고 최후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천명하였다.
1908년 4월 이강년(李康秊), 유인석, 박정빈(朴正彬) 등과 함께 거국적인 의병항전을 호소하는 격문을 전국의 의병부대에 발송했으며, 이어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 이기학(李基學) 등을 서울에 보내 고종의 복위, 외교권의 회복, 통감부 철거 등 30개 조의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고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결사항전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왕산은 이와 같은 원대한 포부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1908년 6월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에 의해 경기도 양평에서 체포되고 만다. 서울로 압송된 왕산은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일제의 한국침략을 당당히 성토함으로써 의병장으로서 절의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아카시는 비록 자기들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심문을 하면 할수록 왕산의 인품과 애국심에 감복하여 그를 국사(國士)로 대우했다고 전해진다.
이 해 10월 21일 오전 10시, 왕산은 서대문 감옥 교수대에 섰다. 서대문 감옥이 지어진 이래 최초의 사형 집행이었다. 왕산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왕산의 봉기는 대지주이자 유학자 가문이었던 허씨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었다. 허위의 맏형이자 종손인 허훈은 3000마지기 땅을 팔아 군자금으로 내놨고, 셋째형 허겸은 허위와 함께 1895년 의병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허위의 사촌인 허혁도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 습격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경력이 있다. 왕산이 희생당한 뒤 그의 집안은 의병장 집안으로 낙인 찍혀 헌병과 밀정의 극심한 감시에 시달렸다.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한 왕산의 셋째형 허겸은 1912년 대대로 살아오던 경북 선산을 뒤로 하고 왕산의 네 아들과 두 딸까지 동반하여 서간도로 망명길에 오른다. 왕산의 사촌형제인 허필과 허혁도 몇 년 지나 그 뒤를 따른다.
그 뒤 허씨 집안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남만주에서 부민단을 이끌며 교민들의 단합과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허위 세대가 의병을 일으켜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면, 다음 세대는 독립군 활동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희생했다.
왕산의 조카인 허형식(許亨植)은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에 북만주에서 활동한 뛰어난 항일 무장투쟁 지도자이다. 본명이 허극(許克)인 그는 만주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이 되었으며 1942년 8월 일본군과의 교전 중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허형식은 빛나는 무장독립투쟁을 했으나 중국공산당에서 활약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보상은 고사하고 그 찬란한 업적을 조명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허위의 아들이자 허형식의 육촌형인 허학은 의병활동을 한 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허형식의 사촌형인 허발과 허규, 육촌인 허국도 항일투쟁 혐의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에 올랐다. 또 허형식의 사촌 누이인 허길의 아들은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육사 이원록이다.
허위의 가문은 의병과 독립군 활동에 온 집안이 나서 희생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불행하게도 이국땅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도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조국이 허위에게 보답한 것이라고는 해방 뒤 그의 독립운동을 기려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길을 왕산로로 명명하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호를 추서한 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