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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식(現在意識)과 전의식(前意識) >
현재의식(現在意識)과 전의식(前意識)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나오는 말이다.
정신은 크게 현재의식(現在意識, present-conscious)과
전의식(前意識, pre-conscious)으로 구분한다.
현재의식은 표층의식, 표면의식과 같은 말이며,
전의식은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들을 불교 유식학(唯識學)에 견주어 보려고 한다.
프로이드도 그렇지만 특히 그의 제자 칼 융(1875~1961)의 경우,
불교에 심취했으며, 그는 유식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실제 융의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은 이 유식학(아뢰야식)에서
힌트를 얻은 바가 크다고 한다.
그리하여 융은 붓다를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천재로 인정했으며,
그의 가르침이 지니고 있는 혁명적인 측면을 강조해 말했다.
“붓다는 인류 전체의 영적인 개척자이자, 깨우친 자이고,
스승이며, 구원자이다.”라고 하며 선(禪)사상을 찬양했다.
그리고 위에서처럼 표면의식(현재의식)과 잠재의식(전의식)으로
구분할 경우, 현재의식은 유식학의 6식(六識)과 비슷한 개념이고,
잠재의식은 유식학의 제7식 말나식(末那識)과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은 현재의식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항상 활성화돼 있는 정신 상태이다.
신체의 자동화된 자율신경부분들과 생명유지를 위한 기관들의
자동화 부분, 나아가 생존을 위해 자동화된 기재들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 몸의 자율신경계의 움직임이 모두 무의식이 활동하는 영역에 해당한다.
현재의식은 평상시의 의식적인 사고를 말한다.
우리가 TV를 보거나 신문을 읽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를 느끼고 생각하는 것,
또 달다, 아프다, 가렵다, 뜨겁다, 차갑다 등을 신체 각 부위 ―
즉,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를 통해
지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현재의식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생각부터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사기 전에 우리는 이해득실을 따진다.
또 어떤 장소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그곳을 지날 때 주의를 기울인다.
이처럼 인간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한 다음 행동한다.
심리학에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을
현재의식 혹은 표층의식이라고 한다.
이는 이성적으로 자신을 조절하는 정신영역이다.
이 부분은 유식학(唯識學)의 제6식(六識)인 의식(意識)에 해당한다.
한편 인간에게는 잊은 듯, 한 추억이나 억압된 욕구,
고정관념 등이 쌓여 있는 잠재의식이라는 정신영역이 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끌릴 때가 있다.
이것은 잠재의식 속의 업식(業識)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재의식의 존재를 알고 우리의 행동이나 사고를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식은 인간의 마음속에 불과 10%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고,
나머지 90%는 잠재의식이라고 한다.
우리들이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들의 행동 대부분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힘이 바로 잠재의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길을 걸을 때 현재의식이 오른쪽 발을 보고 앞으로 나가라.
왼쪽 발에게 앞으로 나가라고 일일이 명령하지 않아도
평소 습관대로 무의식적으로 손발이 움직이며 걸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잠재의식의 작용이다.
현재의식은 단기 기억과 관련이 있으며,
잠재의식은 장기 기억(영구 기억)과 관련이 있다.
현재의식인 단기 기억은 유식학에서는 제6식인 의식(意識)에
해당한다 할 수 있고, 장기 기억 중에 고정관념 같은 것은
제7식 말나식(末那識)이라 할 수 있으며,
더 깊은 잠재의식은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돼 있다고 하겠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은 잠재의식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잠재의식에 인상 지어진 것(업식)이
그대로 현실 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현재의식으로 우리가 항상 쓰고 자각하는 마음이고,
잠재의식은 현재의식이 주는 생각, 마음상태, 감정, 말씨 등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업식으로)보존했다가 현실화하는 작용을 한다.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에 저장된다고 해서 아뢰야식을 장식(藏識)이라 한다.
그리고 전의식은 현재는 의식에 어떤 내용이 없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의식으로 떠오르는 내용들이 있는 의식의 저장소다.
즉각적으로 접근하거나 의식화하기는 어렵지만
충분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면 의식 수준으로
저장한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마음의 영역이란 말이다.
또 마약에 중독된 자는 불현 듯 마약을 찾게 되는 것을 업식의 작용이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은 멀쩡하게 일하다가도
갑자기 담배를 찾게 되는 것도 업식의 작용이다.
대개 이런 중독성은 유식학에서는 제7식인 말나식의 영역으로 본다.
전의식과 무의식은 둘 다 무의식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전의식의 내용은 쉽게 의식에 접근할 수 있고,
단지 일시적으로만 무의식적이다. 즉, 전의식(前意識)은
어떤 시점에서 의식돼 있지는 않으나 비교적 쉽게 의식화되는 것,
정신분석학 용어로, 억압당하고 있는 무의식(잠재의식)의
내용이 다소라도 기억이나 의식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무의식과 구별해 전의식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점심 식사는 무엇을 드셨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점심식사의 내용이 의식에 없었지만
곧 생각나는 것은 전의식에 있다가 곧 의식화됐기 때문이다.
담배를 잊고 있다가 마주 앉은 사람이 담배를 끄어내면
나도 덩달아 피우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유식학의 제7 말나식의 작용과 같다.
전의식의 내용은 무의식에 있던 본능욕구나 기억들이
1차 검열을 통과하고 전의식으로 나온 것들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실착행위(失錯行爲), 꿈 등에 보이는 사례는
이와 같은 전의식의 존재를 명시한다고 말한다.
전의식의 내용을 구성하는 또 다른 것은
외부세계(external world)에서 들어온 지각 경험들이다.
예컨대, 자동차 운전의 경우를 보면, 초보자와 노련한 운전자가 다르다.
초보자는 신호등, 브레이크 밟기 등의 조작에 일일이 신경을 쓰고
의식하면서 운전을 한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일 여유도 없고,
친구가 인사를 해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노련한 운전자는 라디오를 듣거나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자동적으로 운전조작을 한다. 옆 차의 운전자, 신호등, 방어운전 등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도 운전할 수 있다.
도로 표지판을 눈여겨보지 않고도 길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전의식의 기능이다. 대부분의 습관이나 기술들이
전의식의 조절 하에 있다. 그래서 비유해서,
유식학에서의 제7식 말나식이 전의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식인 생각으로부터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아등바등하면서
생각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매우 짧아
판단을 그르쳐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을뿐더러
성급한 성격은 이기적인 경향이 강해 주변 사람들과 융화하기 힘들다.
이때 이기적인 경향을 유식학에서는 제7식 말나식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바로 4번뇌인 아치(我痴)ㆍ아견(我見)ㆍ
아만(我慢)ㆍ아애(我愛)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식학의 제7삭 말나식이
4번뇌인 아치ㆍ아견ㆍ아만ㆍ아애를 품고 있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을 수행하라는 것이며,
수행의 정도에 따라 현재의식의 수준도 달라진다.
즉, 많은 훈련을 통해 신체의 자율신경도
현재의식으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행위가 미래의 잠재의식이 된다.
육체는 단지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마음에 부조화가 생기면 그 반영으로서,
육체의 부조화인 ‘병(病)’이 발생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총체적인 의식은
대략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영원불멸(永遠不滅)하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무애자재(無礙自在)하며,
대자대비(大慈大悲)하다”는 등의
원천이 되는 ‘본성(本性)’이라는 마음이 있다.
불교에서는 다른 말로
본래면목(本來面目) 혹은 불성(佛性)이라고도 한다.
둘째는 현재의 의식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라는 마음이 있다.
유식학에서 제8식 아뢰야식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지금 의식하고 감지하는,
통상 인간이 “느낀다, 감지한다”는 등의 현재의식(現在意識-정신분석학)’이라는 마음이 있다.
불교의 ‘현행식(現行識-유식학)과 매우 닮았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산하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모든 분별심이 현재의식이다.
한편 이 현재의식이 부조화의 씨를 가장 먼저 만든다.
이 만들어진 병적인 부조화의 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잠재의식 속에 축적된다.
유식학으로는 장식(藏識-아뢰야식)에 저장된다.
다시 말하면 잠재의식 속에 병, 불행, 고난 등의
부조화가 일어날 수 있는 씨앗을 현행식이 심어놓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씨앗이 발아해서 병, 불행, 고난 등의 열매가 맺히면,
사람의 육체에는 병이 오고, 삶에는 불행과 고난이 오는 것이다.
‘지금’이라는 현실은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아니다.
‘지금’이라는 현실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지금의 행위의 씨가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니 업인(業因) 등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절대권능인 본성(불교의 경우 불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인간에게 벌을 준다든가 병, 불행, 고난 등을 주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예수께서도 “지은대로 받느니라”하셨다.
자신이 지은대로 거두는 것이지,
자신이 짓지 않은 병, 불행, 고난 등은 결코 오지 않는다.
여기서 예수의 “지은대로”라는 말씀은
자신의 잠재의식과 현재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 잠재의식, 현재의식이란 인간의 참모습,
참마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성인들께서는 말씀하셨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해 아뢰야식에 저장된 불행의 씨앗,
부정적인 악성(惡性)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그런 해탈의 경지에 이른 마음을 참마음, 불성이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참모습, 참마음, 해탈의 경지에서는 없는
그런 것들에 현혹돼 살고 있으므로 병, 불행, 고난 등을 자초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런 것들도 다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없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공(空)하다는 것이다.
성인의 빛은 일월(日月)과 같다고 했다.
해나 달이 누구에게나, 설사 악하게 보이는 사람에조차도
차별을 두지 않고 그 빛을 골고루 비춰 준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은 결코 인간을 괴롭고 불행하게 하는 일이 없다.
이 본성을 불교에서는 본래면목 혹은 불성이라 한다.
그런데 불행의 원인을 찾아 들어가 보면 상당 부분이
잠재의식과 현재의식 속의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죄의식,
혹은 업인(業因)이라는 것이 차지하고 있다. 이것들이 불행을 낳는 것이다.
소위 ‘죄의식’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체 중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양심(良心)이라는 것이다.
이 양심의 선의(善意)의 발로가 바로 죄의식이다.
또 그것으로 선과 악을 구별 짓기도 한다.
하지만 ‘양심’이라고 하는 이 마음도 현재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에 불과하며, 어느 특정의 한 가지에 국한할 경우에는
옳을 수도 있지만, 전체라는 개념에서 볼 때는,
바로 이것(양심)이 위험한 함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양심선언’이라는 것을 했지만
뜻하지 않게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이 많아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양심선언이라는 것을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양심선언을 할 짓을 아예 하지 말았어야 한다.
잘못을 저질러놓고, 지금에 와서 드러내 어쩌겠다는 것인가.
자신이 나름대로 규정해서 지키려고 하는 조그만 양심과 선을 위해,
그보다 더 큰 악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당사자 스스로는 양심과 선이라는 미명을 내세워,
자신의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에 젖은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미망(迷妄)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른다.
약(藥)이 조금만 지나쳐도 독(毒)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치라 하겠다.
이렇듯 스스로가 만들어 심어 놓은 ‘죄의식’이라는 것도,
양심이라는 미망이 상대적으로 만들어 놓은,
큰 함정 중의 하나일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죄의식, 양심이라는 것도 일종의 번뇌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지나친 후회도 번뇌로 본다.
그런 후회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저지르진 잘못을 지금에 와서 후회만 하지 말고,
지금 이 시점에서 잘하고 앞으로 참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함부로 ‘양심선언’이니 해서 이미 지나간 것을 끄집어내어 드러냄으로 해서
그 화가가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자기는 후련할지 모르겠으나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참회를 하되, 앞을 더 잘 해라고 한다.
‘양심선언’과 참회는 다른다. 참회는 자기 혼자 부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고, ‘양심선언’은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자신은 전혀 그러한 적이 없다고 항변하는 이들도,
그네들이 잠재의식을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잠재의식이라는 것은 현재 자신이 느끼는 모든 의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생각해 보면 현재에 한 것이라는 게
이미 흘러 지나간 그림자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지나가 없어져 버린
과거의 불평, 불만, 갈등 등을 붙잡고, 자신뿐만 아니라
그 일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즉, 부조화된 현재의식의 잠재화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병, 불행, 고난 등의 원인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불교로 말한다면,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말나식과 업식(業識)에 지배돼 스스로 갈등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부조화의 주된 행위의 제공은 잠재의식이 하며,
이 잠재의식은 현재의식의 누적이다. 따라서 선량한 현재의식으로
선업(善業)을 저장하면 병을 비롯한 불행, 고난 등은 멀어질 수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육체의 병 또는 건강하지 못함 등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편 또는 구실로 삼고자 하는 잠재의식이 존재하는 한,
결코 호전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수행 정진을 통해서 업장(業障)을 소멸해야 근본적인 치유가 된다.
이와 같이 프로이드나 융에 의해 19ㆍ20세기에 개척된 정신분석학이
지금부터 2천여 년 전 불교 유식학에서 세밀하게 논의됐었다는 것이
실로 놀라울 뿐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