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분량이 많으면 줄여서 할 것임.
가볼곳
1. 산청 시천면 내대리
https://blog.naver.com/yamu1023/221996352542
https://blog.naver.com/yamu1023/221535594751
2. 하동 옥종 고성산
https://blog.naver.com/yamu1023/222565041243
https://blog.naver.com/yamu1023/221396976207
3. 진주성, 진주평안광장(보리한의원)
http://1894family.or.kr/bbs/board.php?bo_table=gallery02&wr_id=107
4. 천도교고성교구, 묵암신용구묘소
*** 위 네 곳 중 2~3곳을 선택하면 될 듯.
**추가하여
경남 동부 중부
양산 적멸굴, 내원사
울산 여시바윗골
의령 신반, 함양 안의 등
** 진주 서쪽으로
사천 하동 남해지역,
전남 광양 순천 여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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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경남에 동학, 천도교가 들어온 유래는?
∎답: 수운 최제우 대신사, 1862.12.29. 흥해 매산리(포항)에서 접주 임명 때, 16명의 접주가 지금 전해지고 있는데 , 고성의 성한서. 울산 서군효 등이 임명됨. 동학이 경남에 들어온 것은 1861~1862년 사이. 수운 순도 뒤에서 동학은 약화되었고 1880년 대이후 활발해짐.
-1892년(임진년)에 백락도(진주군삼장면당산리사람) 접주가 “전북 장수군에 있는 유해용으로부터 도를 받고 돌아와 포덕에 종사, 진주를 중심으로 점차 퍼져”
∎문: 1894년(갑오년) 당시 경남지역에서 동학의 활동은?
∎답: 동학혁명은 3월 기포와 9월 기포 둘로 나뉨
-3월기포, 전라도 고부기포 소식을 듣고 백락도 접주가 동학도인을 규합하여 기포함. 진주영장 박희방에게 체포되어 4월 16일경 산청 덕산장터에서 참형됨
-손은석 등 동학도인들이 백낙도 접주 처형을 항의, 4월24~25일 진주에서 농성을 하여 진주지역에서의 동학 활동은 비교적 자유로와짐. 이때 진주의 영남우병사 민준호는 동학에 우호적이었음.
*** 산
청 시천면 내대리 동학기포지에 2015년 10월 기념탑 세움
*** 해마다 봄, 지금은 5월11일 동학혁명 기념일에 산청동학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음
∎문: 동학혁명 9월 기포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답: 9월 기포. 이때 각지에서 일어난 동학의 두목은
진주; 손은석 박재하 백주응 김용기 김상정, 곤양; 김성룡, 사천; 윤치수, 함안; 이재형, 단성; 임말룡, 하동; 여장협, 남해; 정용태, 안의:? 등
- 9월기포는 호남 동학과 협력.
- 영호대접주 김인배 대접주는 1만여 명 동학군을 모아 9월 1일 섬진강을 건너 하동접주 여장협의 동학군과 합류하여 9월 5일 하동읍 점령. 11일에는 남해를, 13일에는 사천을, 15일에는 곤양 점거.
- 진주 동학군은 9월 8일, 경상우병사 민준호의 묵인 아래 각지의 이임(里任)에게 항일전을 위한 동원령을 내리고 평거 광탄진(너우니)에서 일본군을 물리치자는 결의대회. 이때 ‘충경대도소’ 이름으로 결의문을 냄. 충경, 충청도-경상도 동학이란 뜻.
- 9월 18일(양 10월 16일), 손은석과 김인배가 이끄는 천여 동학군이 진주성을 점령
***진주성에 붉은 바
탕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 쓴 대형 깃발을 내걸다.
***진주대도소를 평안광장 보리한의원자리 진주관아에 설치.
∎문; 하동 고성산에서 일본군과 동학군이 전투를 벌였다는 데 그 경과는?
∎답: 동학군이 진주성을 무혈입성한 것을 확인하고, 일본군은 2백여 명의 군대를, 당시 정부에서는 지석영을 진주 일대로 파견. 10월 10일 동학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하동군 진교면 안심리 뒷산인 금오산 줄기의 봉우리 시루봉에서 시작되었고, 같은 날인 진주 남강 쪽 상평에서도 전투
- 그리고 10월 14일(양 11월 11일) 하동 옥종면 고성산 일대, 일본군과 동학군 전투가 벌어짐. 4∼5천에 이르는 동학군과 일본군의 결전. 이 전투에서 전사한 동학군은 5~6백명(백곡지). / 일본기록에는 185명, 천도교기록은 3백여명, 오하기문(황현)에는 4백여명
*** <참고>그 외 함안의 이재형 접주는 의령 창녕 영산 밀양 등지의 동학도인들을 기포시켜 의령군 신반리에 주둔, 이어 북진하려다가 관군과 접전(관군이 불을 놓았음) 전사자 수천 명을 내었다고 함.
∎문; 동학혁명 후 동학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는데, 동학혁명 이후 경남지역 천도교 상황은?
∎답; 동학혁명 실패 후, 1905년 동학은 천도교로 이름을 바꿈. 진주지역에도 손은석 등은 일진회에 가입, 이들 친일세력을 제거하려고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꿈. .
1906년 12월 진주대교구 설치. 진주 비봉동(계동일대). 경남지역 통괄. 1914년 당시 진주군대교구는 진주군교구, 울산군교구, 합천군교구, 함양군교구, 마산부전교실, 사천군교구, 고성군교구, 통영군교구로 8개 지역을 관할.
∎문;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주도했는데, 진주지역 상황은?
∎답; 천도교 3.1운동은 1910년부터.
-1910년 8월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자, 의암 손병희선생은 십년 내에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다짐. 1912년부터 지도자 양성. 1912년 4월 서울 우이동에서 제1회 연성수련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준비. 1914년 3월 25일까지 3년 동안 7차에 걸쳐 전국의 두목들을 차례로 독공 수련시켜, 총 483명이 참여.
- 서부경남에서는 1회에 전희순, 5회에 김상정, 7회에 김학두가 참가
- 1918년 12월 1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천도교대교당 건축기공식, 천도교에서는 이를 기회로 3·1운동 자금을 특별모금. 당시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에서도 특별모금에 응함.
- 고성의 황태익, 교인들에게 중앙대교당 건립과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자금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여 자신이 논밭을 다 팔고, 교인들로 하여금 돈이 될 만한 물건은 팔아서 헌납하게 함. 진주 등 서부경남도 마찬가지, 기록은 남아있지 않음.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49일 기도 실시: 1919년 1월 5일~ 2월22일까지
-대표기도처 9곳;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 경상도 지역의 경우 천도교경주교구에 대표기도처. 즉, 경상도 지역의 독립운동을 위해 진주 신용구, 언양 곽해진, 영천 이종원, 경주 박인환
- 신용구 선생을 통해 진주지역의 독립선언서 배포. 1919년 3월 진주지역에 배포된 독립선언서 외 교유문, 격문 등은 천도교진주대교구의 등사기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추정.
- <천도교진양교구>: “1919년의 3.1운동 당시 진주대교구는 관내 대두목들이 서울 봉황각에서 연성수련을 하고 돌아와 손병희 의암성사의 지시로 교구에 비치해 두었던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등사 배포하고 각 군과 면의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기록은 《일반성향토사(2009)》에도 그대로 전재되어 있다.
** <참고> 진주3.1운동배포경로(기존의 의견); 1.진주 일대에 주로 전달된 선언서는 김재화, 박진환, 심두섭등이 고종의 ‘인산’에 참가했다가 입수한 것, 2. 정촌면과 문산, 반성 일대에 배포된 선언서는 산청군 단성면에 거주하는 이병홍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은 강재순이 이종언과 함께 인쇄하여 배포. 3. 사천의 천도교인 장태영이 손병희로부터 직접 받아 진주의 친족 장덕익에게 전달.
∎문; 3.1운동 이후의 경남 지역 천도교 상황은?
∎답; “민족종교 3·1 독립선언의 손병희 교주의 후광의 탓인지 전국적으로 천도교의 신자가 늘었다. 진주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현재 80세 안팎의 진주유지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한 대부분 천도교소년회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_ 경상대교수를 역임한 리명길
진주소년회; 3.1운동 이후 진주의 소년운동은 독립운동의 하나로 시작되었고, 진주천도교에 뿌리를 두고 1920년 8월 시작. 진주소년회를 이끈 주역은 고경인, 강영호, 강민호, 박춘성 등. 진주소년회는 우리나라 소년운동, 어린이날 제정의 효시.
<참고> 천도교소년회 박춘성(1906~1945)의 행적을 통해서도 진주소년회 활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박춘성은 진주 본성동 49번지에서 났고, 진주 공립보통학교 22회 졸업생이다. 천도교소년회에 가입하였고, 18세 때인 1924년 금융조합근무 중 군자금으로 모으라는 전달을 받고 6천 원을 인출 도주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산다. 이후 일본을 건너가 고려청년회 일본총국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고문도 당했고 39살의 젊은 나이로 일본에서 순국한다.
∎문; 소년운동 뿐만 아니라 진주신간회 활동도 천도교에서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답; 신간회 운동 전에 황태익 선생을 알아야. 그리고 박태홍 선생을 통해 신간회를 알아야
1. 황태익(訥菴 黃泰益, 1877-1953)은 3.1운동 당시 창원, 고성의 만세시위를 주도.
-1920년 3월 황태익은 진주 옥봉에서 경남결사대 조직. 천도교 경남청년회장 김의진(1894~1941)을 비롯한 임태준, 노성화, 황호익 노응범 강재순 강대규 등과 조선총독 부산 방문 때 암살계획을 세움. 노광천의 밀고 황태익 등 8명 체포됨. 진주감옥에 수감된 결사대원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황태익은 1922년 3월 천도교종법원포덕사를 지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 추서.
박태홍(愚菴 朴台洪, 1892-1944). 1913년 천도교에 입교. 1914년 7월 진주군 진주면의 전교사. 1919년 진주에서 3·1운동에 참가. 천도교 청년 교리 강연부를 설립과 1920년 4월 천도교 진주 청년회 조직.
-천도교인 강달영과 6·10만세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사전에 일제에게 탐지되어 당일에 거사를 일으키지는 못함. 1926년 6월말 일경에 체포되어 1928년 2월 13일 징역 1년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
-출옥 후 신간회 진주지회 집행위원장.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10월 3일 53세로 환원.
-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 해방 이후에도 경남지역 천도교인은 꾸준히 늘었고, 특히 남해 사천 고성 지역에는 지금도 많은 천도교인들이 있음.
*** 예전에 비해 사회활동은 줄었지만, 새로운 기운을 모으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