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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풍경. 왼쪽으로 고가구 위에 놓인 돌 그림은 자연석에 그림을 그려 넣은 ‘돌에 관한 명상’. 그 위쪽으로 보이는 그림은 ‘그대 안의 풍경’, 바닥에 내려놓은 2개의 그림은 가장 최근의 작품인 ‘삶 은 어딘가 다른 곳에(작은 10호 그림)’와 ‘식물학’이다.
“내가 들어가는 공간은 인테리어고 뭐고 다 무너져요. 어디든 다 작업실이 돼버리니까.” 그가 인테리어에 신경 쓰고 살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그녀는 하루 8시간씩 그 림에 몰두하는 전업 작가로 유명하다. 한 평론가의 말대로 단순 업무가 아닌 한 생명을 잉태하듯 창작의 산고가 따르는 작업을 매일 8시간씩이나 반복한다는 건 보통 사람의 내공으로는 불가능하다 싶다. 그러니 그림 구상을 위한 고민들과 작업 외의 다른 것들은 신경을 쓸 여력도 시간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사는 집과 작업실을 통합해서 공간에 신경 쓰고 사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돌뿐 아니라 안경, 도자기, 앤티크 소품이나 시계 등에 그린 설치 작품들이 꽤 많은 데 움직이는 동선마다 그 입체 작품과 평면 작품이 유기적으로 어울리는 그런 공간요. 가구나 방석, 의자까지 다 내 작품으로 만든다면, 작은 미술관처럼 보이는 집이 나오겠 죠.”
따뜻한 시선을 가진 세심한 관찰자 왕성한 작품 활동과 대중적인 인기, 화단의 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 작가답게 그녀는 50을 갓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개인전을 25회나 열었다. 6월 27 일부터는 서울 삼청동의 리씨갤러리에서 스페인 작가 에마뇰 마료단, 국내 작가 오원배와 함께 3인전을 열 계획. 기존 황주리를 대표하는 작품이 컬러풀한 색감의 그림들이었 다면 이번 개인전에서는 그간 많이 공개하지 않은 흑백 그림들을 보여줄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애착이 크고 많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은 흑백 그림이에요. 컬러 그림은 아는 사람이 많은데, 난 흑백 그림의 감상 포인트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나 에게 선택권을 준다면 주저 없이 흑백 그림을 고르죠. 흑백 그림은 화장하지 않은 삶의 모습, 맨얼굴 같은 느낌이에요.” 컬러 그림이 예쁘게 포장된 편지라면 흑백 그림 은 외로움이 묻어나는 일기라는 것. 요즘 집들처럼 모던하고 큼직한 공간에는 흑백 그림이 더 잘 어울린다고. 실제로 미국인들이나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멋쟁이들은 흑백 그 림을 더 많이 찾는다고 한다. 2 현관 입구에 놓인 고가구와 돌 그림들, 그리고 최덕교 작가의 브론즈 새장이 운치 있게 어울린다. 위쪽의 그림은 ‘식물학’. 황주리의 그림은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억지웃음을 만들어내거나 과장된 상황을 만들지 않고, 그냥 느긋하게 감상하고 편안하게 기분 좋아지는 그런 그림. 작가의 다양한 상상력과 세심한 관찰력은 특유의 입체적이고 화려한 필체로 캔버스에 옮겨진다. 그녀 역시 요즈음 자신의 작품들이 행복해 보인다고 인정한다. “20 대, 30대 때 그렸던 그림들을 보면 발칙하고 불온해요. 그 시대의 사회적 절망이 그림에 표출돼 있는 거죠. 그러고 보면 모든 사람이 자기 나이대에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는 가 봐요. 다시 하려고 해도 도저히 안 되는 것들이 있어요.” 20대 때의 그림은 정서가 굉장히 어둡고 강렬하고 순화가 안 된 느낌인데, 그때 그림을 다시 그려 보고 싶어도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 반면 요즘 작품은 치유의 역할을 하는 그 림들이다. 작가는 생각이 많다. 그림뿐 아니라 작가가 쓴 3권의 수필에 쓰인 글들을 봐도 작가가 얼마나 섬세한 시선을 가진 관찰자인지 알 수 있다. 그림의 제목들도 역시나 하나같이 예민한 더듬이를 드러낸다. ‘추억제’ ‘이상의 시를 명제로 한 것들’ ‘식물학’ ‘그대 안의 풍경’ 같은 시적인 제목들. 제목을 구상하는 방법을 묻자 “내 안에 내재하고 있 던 어떤 것을 볼 때 글도 되고 그림도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처럼 삶을 함축하는 짧은 문장들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것. 타고난 관찰자의 시선을 지닌 작가는 같이 지내는 순종 불독의 표정, 카페의 연인들과 아기를 안은 엄마의 사소한 일상을 매일매일 날렵한 제목의 그림에 담는다. 유독 따뜻한 시선을 가진 관찰자이기에 그 녀의 그림 역시 그렇게나 행복한 표정들인가 보다. 4 유독 그림을 좋아하는 황주리 작가의 어머니는 그간 모아온 그림 컬렉션을 죄다 그림 창고에 두었지만 몇몇 조각 작품들은 여전히 집 안에 세팅해두었다. 브론즈 작품은 강희덕 작품. |
기획 : 안지선ㅣ포토그래퍼 : 김성용 ㅣ여성중앙ㅣpatzzi 김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