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끝 약사암
가을이다.
건조한 바람 끝을 따라 들어선 산사의 좁은 길에 햇볕이 밝다.
빛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하나뿐인 길을 기억하고
바람은 그 따뜻한 온기를 바라 깎아지른 절벽 밑을 맴도는 하루다.
가느다란 명주실 닮은 인연은 절벽 위 아득히 놓인 다리를 건너는가?
절벽 끝 범종이 울지도 못하고 밤에 홀로 산을 지킨다.
그런 밤에는 달도 산정 끝에 매달려 차마 넘지 못하고 그저 머뭇거린다.
오늘 밤엔, 가을이 한 뼘 더 깊어지겠다.
무심코 스치는 과거의 생각이 절벽 끝에 매달린 약사암 단청 아래 스민다.
다리를 건너 내게 찾아온 인연 중의 하나가 발목을 다쳐 기뚱거리는 밤이다.
아까부터 멀리서 지켜보던 돌탑의 그림자가 고승의 이마를 덮고
작고 나약한 산짐승의 울음이 아득히 깊은 골짜기에 파묻히는 밤은 더 깊으리.
한 발짝 물러선 마음이 너른 마당을 쓸데없이 배회하고 있다.
현월봉 꼭대기 좁은 문을 위태롭게 지나온 바람이 마른 내 옷깃을 스친다.
어디선가 홀로 서 있던 나의 님이 날 못 잊어 흐느끼고 있는가?
알지도 못하는 불경 소리가 벌벽 끝 약사암 풍경에 매달려 흔들이고 있다.
오늘 밤에는, 가을 깊어 이내 올 겨울을 예고하는데
잠시 잠깐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민 별빛이 반짝이고 있다. 아스라이 먼 곳에서
오늘 밤 나는 절벽 끝 어디쯤 서 있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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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