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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마을
엄 흥 섭
1
산! 산! 산! 산밑에 우뚝 솟은 별장. 별장 앞에 달〔月〕 잠긴 호수.
호수를 막은 높은 방축. 방축 밑에 조금 떨어져 꾸물거리는 게딱지 같은 조그마한 마을. 밭과 논 사이를 뚫어 달빛 싣고 굽이굽이 흐르는 맑은 시내. 시꺼먼 거인같이 큰 솔밭이 꽉 들어찬 나지막한 산을 하이얗게 테두리한 S자형 의 신작로.
무섭게도 고요한 이 마을의 어렴풋한 정서는 꿈에 보는 활동사진 같았다.
일곱 별이 까막까막 졸고 있다. 벌레 소리 멀리서 그쳤다. 고요한 순간은 계속되었다.
해소가 일어나기 전의 엄숙한 바다처럼 죽은 듯한 이 마을엔 별안간에 큰 사건이 생겼다. 우뚝 솟은 별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사나운 불길이 일어났다.
불길은 호숫물올 새빨간 핏빛처럼 이글이글 끓이며 산더미라도 태워 삼킬 것처럼 무서운 아가리를 벌리었다.
“불이야! 불이야!”
별장지기 영감이 마을로 뛰어다니며 목이 찢어지도록 고함을 쳐도 사람 하나 뛰어나오지 않았다.
워낙 밤이 깊었으니까 잠이 곤히 들어서 그럴 듯도 하거니와 홍염 속에 총소리 같은 기왓장 튀는 소리를 듣고서도 내다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의 계획적 방화나 아닌가 하여 세상 사람에게 의심받을 일이나 아닐까.
사나운 불길은 조금도 용서 없었다.
삼십 평 기지의 아름드리 기둥과 덩실한 이층 난간은 두 시간 동안도 못 되어 참담하게도 불속에 꺼꾸러져 재가 되었다.
2
불속에 타버린 별장은 백만장자 최병식의 향락장이었다.
남선에도 색향으로 이름난 진주에다 제삼주택을 두고 거기에서 십 리쯤 떨어진 아담스런 산간에다 지어 놓은 것이 이 별장이었다.
최병식의 향락사업은 기생첩 학생첩을 얻어 주택을 넷씩 다섯씩 두는 것과 별장을 여기저기 세우는 것뿐만은 물론 아니었었다.
꽃과 새와 나비의 봄에는 제일주택인 서울과 제이주택인 평양 사이에서 거들거리고 여름은 전혀 석왕사나 원산에서 피서를 하고 가을이면 금강산의 폭포와 단풍을 맛보다가 차차 찬바람이 불면 훨씬 남쪽인 따뜻한 온천을 찾아오는 게, 근래 그의 연중행사의 중요 목차인 것을 세상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그는 이제 오십이 둘을 넘은 인생의 만년에 이르렀으면서도 전용의를 네댓씩 두어 불로초 불사약을 애써 구하였다. 갖은 보약과 갖은 선약은 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 그럼인지 삼사십의 장년처럼 젊어 보이었다. 게 따라서 그의 곁엔 언제든지 계집이 따랐다. 계집이 떠나서는 견딜 수 없는 색마를 만들고도 남았다.
그의 가는 곳마다 그의 앉는 곳마다 계집은 따랐다. 향락과 환락은 따라다녔다.
세계 일주는 못 했어도 일본을 거쳐 미국까지는 갖다 왔고 만주를 지나 북경 상해 방면도 휘둘러왔으니 이만하면 넉넉한 대장부요 훌륭한 명사라고 그는 스스로 만족하여 왔다.
그의 오십주년 생일 축하연이 서울서 벌어졌을 때 그는 지방 명기로 평양의 R라는 기생과 진주의 H라는 기생을 지휘 주어 등대시켰다. R와 H는 최의 안경 속에 기어들게 되어 그는 먼저 R를, 다음에 H를 첩으로 맞았다. H를 셋째 첩으로 맞이한 지 석 달이 지난 작년 봄 어느 날 밤 최와 H를 실은 자동차가 달 밝은 남강 언덕을 천천히 드라이브 할 때 별안간 괴상한 사나이가 나타나서 자동차를 위협하고 최와 H에게 가해하려 하였다. 괴상한 사나이는 복면을 하고 한 손에 날카로운 단도를 들었다.
최는 현금을 탈탈 털어 벌벌 떨며 내어주었으나 괴상한 사나이는 돈뭉치로 최와 H의 얼굴을 때렸을 따름이다. 그때에 저편에서 자동차가 달려오게 되어 괴상한 사나이는 번개같이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었다.
H만은 그 괴상한 사나이가 누구였던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으나 그는 죽어도 입을 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H는 밤마다 복면한 괴상한 사나이가 칼을 들고 나타나 “이년아! 이놈아! 응……” 하고 사랑을 저주하는 꿈을 꾸었다.
그의 고통은 컸다. 그의 극도로 공포에 휩싸인 감정은 기어이 밤으로 잠을 못 자게 하였다.
원래 감정적인 H는 신경이 점점 쇠약하여졌다. 그는 기어이 극도 신경쇠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최는 전용의의 시키는 대로 산수 맑은 곳에다 별장을 짓고서 H를 정양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진주와의 사이에 자동차 교통이 편리한 것과 자기의 산판이 있다는 것과 멀리 지리산이 바라다보이는 한가하고 아담스런 경치와 남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제법 맑고 넓은 시내가 그의 늙어가는 마음에 들게 되어 진주에서 십 리가 될락말락한 P라는 마을에 별장을 짓기에 착수하였었다.
3
날마다 수백 명의 노동자는 별장터를 중심으로 모여들어서 일들을 하였다.
최의 계획은 컸다. 별장 앞에는 반드시 호수가 있어야 하고 호수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고 섬 위에다가는 팔각초당을 날아갈 듯이 짓고 그 전후좌우로는 향나무 단풍나무 다박솔 들을 심고 괴상야릇한 돌덩이를 진열해야 한다는 그의 동양화적 취미는 수백 명의 노동자를 시켜 일변 방축을 쌓고 흐르는 시냇물을 끊어 방축 안에 잡아넣기로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과는 아무 관계 없는 별장과 방축이건만 애써 나무를 깎고 터를 다지고 정성들여 땅을 파고 방축을 쌓았다.
최가 별장을 짓는 데 대하여 모든 사람들은 아무 불평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복 많은 사람이니까…… 백만장자이니까…… 으레히 그러려니…… 하는 미적지근한 감격이 가슴에 물결쳤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다 방축을 쌓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방축 밑에 자기 마을이 있는 이 동리 사람들이었다.
만일 홍수가 져서 방축이 터지는 날이면 삼십여 호의 이 마을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방축 쌓는 데 품팔면 다리를 분지른다…….”
이런 선언을 하고 팔을 걷고 나선 사나이가 있으니 그는 본래 질이 우락부락하고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으레히 자기가 장을 서는 고서방이었다.
고서방은 사오 년 전에 어디서 이 마을로 떠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머리를 깎고 대판에 가서 공장 일꾼 노릇도 해보았고 하관이나 부산에서 지게품팔이도 해본 사나이 였다.
그는 작년 초봄부터 갑자기 무엇을 결심한 듯이 이 마을에 처박히어 진주 밖에는 더 멀리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작년 첫여름에 최부호의 자동차에 폭행했다는 혐의 경찰의 손에 체포된 열두 사람 중의 하나가 되어 석 달 만에야 증거 불충분으로 방면된 일도 있었다.
고서방은 거리로 뛰어다니며 힘차게 외쳤다.
“사람들아! 한 부자의 별장을 짓기 위하여 우리 이백여 명의 생명이 위태한 짓들을 하고 말 텐가!?”
그의 외치는 힘은 기어이 품팔이터에서 이 마을 사람들을 빼앗아 오고야 말았다. 그러나 최부호는 순사를 시켜 십 리나 떨어진 다른 마을의 사람들과 읍 사람들을 불러다가 더한층 굉장히 일을 시작하였다.
고서방은 생각던 끝에 자기 마을의 사활문제를 등에 지고 여러 친구를 모아 군청으로 뭉치어 갔다. 그래서 군수 앞에서 여러 가지 조건을 들어 방축을 못 쌓게 하여 달라는 간절한 진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은 실패하고 말았다. 고서방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암! 그렇지! 별수가 무엇 있나! 흥! 보자! 끝을 보자!”
4
아주 여름이 되었다. 산과 들에 녹음이 우거졌다.
높이 넘고 길이 백여 간이 훨씬 넘는 굉장한 방축은 새벽부터 저녁때까지의 수백 명 노동자의 백날이 넘는 힘으로야 겨우 쌓이고 말았다.
그러나 별장 건축은 아직도 끝을 못 마쳤다.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방축 안엔 날마다 날마다 물줄기가 모여들었다.
물이 차차 깊어 간 뒤에 최는 남강에 매어 두었던 그의 보트를 가져다 띄웠다.
그는 물속에 고기를 잡아넣고 아침저녁 이면 배를 타고 앉아서 고기새끼와 장난을 하는 것이 유일한 소일이었다.
날마다 자동차가 별장 앞까지 오고 가고 가고 오고 야단을 부렸다.
고서방을 비롯한 이 마을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아침저녁을 맞았다.
내일을 바라고 오늘을 사는 이 마을 사람들의 실낱끝 같은 ‘삶’의 애착은 날마다 날마다 산으로 들로 지게를 지워 내쫓았다.
뜨거운 햇빛에 그들의 얼굴과 살은 몹시도 탔다.
그들은 살려고 살려고 몹시 헤매어도 게딱지 같은 오막살이를 면치 못하며 보리밥 된장덩이로도 배를 못 채운다.
저녁노을이 사라지고 별들이 번득번득 날 때라야 피곤에 시달린 다리들을 끌고 오막살이로 찾아든다.
극장 활동사진 음악 무도 강연회 전람회가 이 마을 사람들과는 멀리 떨어진 딴세상에 있다.
자동차 전차 기선이며 라디오 전신 전화 오색전등의 아기자기한 현대문명은 이 마을 사람들과는 아무 관계없는 딴세상에만 있다.
담배 연기에 어린 침침한 등잔불을 둘러싸고 화투나 투전으론 노름을 하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큰 위안거리였다.
그들에게는 달과 솔과 새와 꽃을 그린 울긋불긋한 화투짝이 유일한 회화다. 모여 앉아 장에 갔다 온 이야기, 나무 팔다 뺨맞았다는 억울한 이야기, 세상살이 한탄이 유일한 강연회다. 상사뒤여 산타령 아리랑 타령이 가끔 흥을 돋우는 그들의 음악이다.
충렬전, 추월색, 춘향전이 그들에겐 밥과 같은 예술의 전부다.
강렬한 음향, 화려한 색채의 나열, 직선과 곡선, 곡선과 직선의 표현과 그림 같은 도회 정서가 이 마을의 상투쟁이들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5
여름의 햇볕은 쨍쨍 쪼였다. 조금씩 흐르던 시냇물도 이제는 바닥에 째작째작 말랐다. 별장 앞 호수는 날마다 뜨거운 볕에 끓었다. 죄없는 고기 새끼들이 하이얀 배때기를 하늘로 쳐들고 여기저기 떠 있고 길가의 나무와 풀들은 끓는 물에 삶아 낸 것처럼 시들시들 생기를 잃었다.
가뭄은 심하였다. 한 달 전에 비맛을 본 못자리판은 바싹 볶아 대어 성냥알을 대기만 하여도 타버릴 것 같았다.
구름이 한 점만 한구석에서 떠돌고 바람 끝이 조금만 나뭇잎을 흔들어도 이 마을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하늘은 한 달을 넘도록 비를 안 주어 죄없는 이 백성을 절망과 불안 속으로 잡아넣고 말았다.
최부호도 비를 은근히 기다렸다. 수만 정보의 대지주인 그는 별장 앞 호수에 물이 가득히 고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백도가 넘는 지독한 더위가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는 어느 날 저녁 때였다. 하늘은 갑자기 시꺼먼 장막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윽고 대추알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얼마가 못 되어 창대 같은 빗줄기가 죽죽 내리쏟아졌다.
비는 그날 밤에도 꼭 그대로 쏟아졌다. 번개가 번쩍번쩍 뇌성이 우르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한껏 긴장된 위험한 공기 속에도 이 마을 사람들은 논꼬를 보느라고잠 한숨을 못 이루었다.
비는 그 이튿날 저녁때까지도 쉬지 않고 쏟아졌다. 북덕 황톳물은 시내가 좁게 차며 밀며 홀러갔다. 비는 쉬지 않고 퍼부었다. 방축의 물은 자꾸 붇기 시작하였다.
사홀 동안을 쉴새없이 퍼붓던 비는 나홀째 밤에는 더욱 심했다. 창대 같은 빗줄기 캄캄한 깊은 밤중― 천병만마가 내달리는 것 같은 물 흐르는 소리― 번쩍이는 번개― 우르르 하다가는 어느 구석에서 따악 하는 강렬한 분위기―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자연의 폭위, 그 속에 이 마을 사람들은 쥐죽은 듯이 엎디었었다.
비는 새벽에 닭이 울 때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방축이 터지지나 않을까?” 고서방은 모기 빈대 벼룩이 우글우글 갈자리방에서 벌떡 일어나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무엇을 생각한 것처럼 캄캄한 골목으로 빗줄기를 두드려맞으며 달음질쳤다.
이윽고 그는 허둥지둥 뛰어 돌아오며 고함질렀다.
“사람들아! 일어나라! 방축이 터지겠다―”
빗소리에 섞인 그의 고함은 어렴풋이 이 마을에 물결쳤다.
그는 구장네 집에 가서 징을 들고 나와 웅― 웅― 울렸다.
남녀노소 이백여 명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두드려맞으며 캄캄한 골목에서 솥단지 농짝 보퉁이 들을 져내었다. 빗줄기는 여전히 이 어둠 속을 내리 퍼부었다.
“사람들아, 어서 가자! 산으로 산으로. 어름어름하다가는 물속에 파묻힌다…….”
고서방이 이백여 명을 데리고 뒷산으로 피난했을 때는 벌써 방축 위로 황톳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별장 앞 호수가 방축을 자꾸 넘으며 농짝 같은 시냇물은 방천을 헐고 논두렁을 부수고 이 마을을 향하여 사자 같은 아가리를 벌리는 것을 그들은 희미한 새벽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물이 넘어 흙을 깎아내리는 방축은 한가운데가 터억 하면서 갈라지고야 말았다. 그 순간이다. 산덩이 같은 물결은 게딱지 같은 집들을 한숨에 네 개나 쓰러뜨리었다.
“아이고, 어떡하나! 집이 떠나가네…… 아…… 이……고…….” 여인네들은 모두 복장을 치며 울었다. 아이들도 모두 따라 울었다. 비는 자꾸 퍼부었다.
번개가 연방 번득이고 뇌성이 하늘을 쪼개는 것 같았다.
탁류는 조금도 사정 없었다.
새벽이 훨씬 밝았을 때에야 떠내려간 집이며 쓰러진 집이며 탁류가 방 안까지 스쳐간 집이며 울타리가 부서져서 떠내려간 것이며 못자리판과 뾰속거리던 밭곡식의 훑어 씻어간 것들의 참담한 광경이 고서방을 비롯한 젊은 친구들의 가슴에다 불을 붙였다.
이 마을 사람들이 더한층 놀란 것은 갈자리 밑에 품팔아 번 돈 사십 전을 가지러 갔던 어떤 늙은 할머니가 미처 나오기도 전에 방축이 터져서 탁류 속에 무참히도 흘러내려갔다는 것이다.
숲속 높은 별장은 털끝도 까딱없었다. 덩그렇게 위엄을 빼고 흘러간 마을의 참경을 비웃는 것 같았다.
6
씨푸르르하던 날씨가 사흘이 지난 뒤에야 확 터졌다. 최부호는 홀러간 이 마을 사람들에게 대하여 털끝만한 동정도 없었다.
방축이 터지고 난 뒤에 그는 어른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뚱뚱보 별장지기영감이 별장을 지키고 있었다. 흘러간 집터와 쓰러진 집터에다 말뚝을 치고 거적으로 하늘을 가린 이 마을 사람들은 속절없는 새거지가 되었다. 떼거지가 되었다. 여인네들은 어린것들을 앞세우고 바가지를 들고 나섰다.
사나이들은 모기에게 지독히 뜯기고 나서 그래도 새벽부터 먼 마을로 품팔러 다녔다.
탁류 속에 떠내려간 못자리판과 방축, 논두렁, 밭두렁, 방천이 무너져서 흙속에 파묻혀 버린 못자리판들은 흉년을 똑똑히 말하고도 남았다.
고서방은 여러 가지로 생각던 끝에 친구 몇몇을 데리고 규슈(九州)에라도 가서 석탄이라도 파볼까 했다. 그리하여 주재소에 여행허가를 원해 보았으나 냉정한 태도로 거절당했다.
여편네들은 십 리나 되는 읍으로 일거리를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일거리는 없었다. 그들은 산비탈과 밭두렁에서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기었다.
사나이들은 먼 마을로 초벌 김매기와 보리타작을 하러 다니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목숨만 살아 내려왔다.
7
터졌던 방축이 감쪽같이 다시 쌓이고 호수에 새파란 하늘이 거꾸로 비쳤을 때는 벌써 추석을 앞둔 가을이었다.
높직한 별장에서는 날마다 거문고 가야금이, 가늘고 높은 계집의 목소리 속에 섞여 이 마을 공기를 흔들었다.
잿빛 안개가 자욱이 끼고 풀 끝에 이슬이 아롱아롱하는 아침 고서방은 콩밭 모퉁이에서 곰방대를 빨다가 한 포기에 열 개도 못 연 콩 포기에서 시선을 피하였다. 그의 시선은 다시 패기 시작한 나락논으로 옮기었다.
“흥! 흉년이다. 방축이 터져…… 마을이 떠내려가고…… 제― 길헐 이놈의 것…….” 고서방은 본능적으로 주먹 이 쥐어졌다.
그리고 밤마다 사랑방에 젊은 친구들과 모여서 이야기하던 모든 것들을 한번 되풀이하였다. 그는 갑자기 일종의 쾌감과 승리감을 느끼면서 한번 더 부르짖었다.
“그렇다! 내게는 큰 힘이 있다. 우리에겐 큰 힘이 있다…….”
추석날이 왔다.
최부호의 추석놀이는 별장 낙성식 겸 굉장히 벌어졌다.
자동차가 아침부터 이 별장까지 몇 번이나 오고 갔는지는 신작로에 일어난 먼지만 보고도 넉넉히 헤아릴 수 있었다.
별장 마당에 만국기가 펄렁거리고 장구 소리 노래 소리 굉장히 났을 때엔 아이들은 모두 몰려가서 구경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 되어 다시 쫓기어왔다.
‘추석’ ‘명절!’ 이상야릇한' 이 명사가 가진 봉건적 관습은 고서방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의 땀에 전 삼베 등거리와 꾹꾹 찌르는 흙잠방이를 벗기고 새로 빤 무명 중의 적삼을 입히었다.
컬컬한 탁배기 한 잔에 짭짤한 명태쪽을 씹는 맛이란 오락과 향락에 주린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둘도 없는 위안거리였다.
점심때가 훨씬 지난 뒤부터 별장의 유흥은 훨씬 가경으로 들어갔다.
호리호리한 계집의 날씬날씬한 허리를 기름진 양돼지 같은 사나이들이 얼싸안고 벌름벌름 춤추는 꼴은 이 마을의 여인들을 한껏 놀라게 하고도 남았다.
환락의 붉은 노을을 보낸 별장은 다시 은빛 같은 보름달을 맞았다.
고서방과 젊은 사람들은 오늘이야말로 마음이 이상하게도 흥분되었다.
자동차가 또 왔다―한 참에 네 대가 꼬리를 물고 소리소리 높이 지르며 별장 앞에다 여러 계집과 양복 입은 사나이들을 토했다.
달빛 잠긴 호수에 보트놀이가 시작되었다. 고서방과 젊은 사람들은 주막으로 밀렸다. 주막의 탁배기는 이 사람들을 더욱 흥분하게 하였다. 한잔 술에 껍데기만 취한 이 사람들은 징, 꽹매기, 북, 장구를 울려 온 마을을 요란스럽게 했다.
“쿵매캥 쿵매캥 쿵쿵 쿵매캥” 이런 느린 가락에서 “캥매 캥매 캥매캐갱 캥매 캥매 캥매 캐갱” 이런 자진가락으로 옮겼을 때는 아이들 늙은이 여인네들이 모두 몰려나왔었다. 젊은 사람들은 어깨와 어깨와 팔과 팔과 다리와 다리가 한데 뭉치며 뛰며 춤추며 상사뒤여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서방이 앞잡이 서서 노래를 한마디 먹이고 나면 백여 명 뭉치는 상사뒤여를 연해 불렀다.
어깨와 어깨를 겨누어라 상―사―뒤― 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자 상―사―뒤―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자 상―사―뒤―여
열두 달 하루도 안 놀아야 상―사―뒤―여
보리밥 좁쌀죽 못 면하네 상―사―뒤―여
상사뒤여 뭉치는 온 마을을 한 바퀴 둘러서 방축 위로 올라섰다.
달 비친 별장 난간에는 술과 계집에 취한 많은 사나이들이 노래와 옷음을 요란스럽게 토하며 가야금과 장구를 괴롭게 울렸다.
상사뒤여 뭉치는 방축 위를 거쳐서 별장을 안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고서방의 앞잡이 노래가 더한층 힘차고 높았을 때는 상사뒤여 소리도 더한층 높았다.
웬숫놈 별장이 생겨나서 상―사―뒤―여
우리네 마을이 홀러갔네 상―사―뒤―여
웬숫놈 별장은 누가 지었나 상―사―뒤―여
우리네 피땀이 몽쳐서 됐지 상―사―뒤―여
계집의 한편 무릎을 베고 눈을 지그시 감고서 기름진 뱃가죽을 슬슬 만지던 최부호는 갑자기 가까워 온 상사뒤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장구 소리도 끊어지고 취해 쓰러졌던 사나이들과 계집들도 제정신이 돌았는지 슬슬 일어나 안쓰러운 표정으로 상사뒤여패를 주목해 보기 식작한다. 그러나 최는 조금도 겁낼 게 없다는 듯이,
“이게 무슨 짓들이야! 무례한 못된 놈들 같으니.”
하고 벌떡 일어서서 내려다보며 고함쳤다.
상사뒤여패는 더 힘찬 노래를 높이 부르며 별장 난간 앞으로 밀리어 갔다.
우리네 피땀을 빨아다가 상―사―뒤―여
느들만 언제나 잘사나 보자 상―사―뒤―여
방축이 터져서 흉년이 돼두 상―사―뒤―여
느그만 배부르면 그만이지 상―사―뒤― 여
(『흘러간 마을』, 백수사, 1948/ 《조선지광》(1930.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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