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부활] 작품해설 / 김학수
톨스토이가 <부활>을 쓰기 시작한 것은 1889년, 예순한 살 때였다. 처음에는 ‘코니의 수기’라는 제목이었다. 이 작품을 창작하게 된 동기가 당시의 저명한 변호사 코니에게서 들은 얘기였던 것이다.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한 코니는 톨스토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법률사무소에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 젊은이는 시골 지주인 친척 집에 놀러갔다가 부모를 잃고 그 집에서 자라는 열여섯 살 처녀를 유혹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임신해서 그 집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낳은 아기를 양육원에 맡기고 살 길을 찾았으나, 몸을 팔 정도로 타락하는 데 이른다. 마침내 그녀는 어느 취객의 조머니에서 돈을 훔쳐낸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그곳 배심원 자리에 앉은 것이 그 젊은이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 젊은이, 그는 자기 죄를 깨닫고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다가 그녀와 결혼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코니에게 상의하러 온 것인데, 그는 실제로 그 처녀와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4개월의 형기가 끝나자 그녀는 이내 티푸스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를 깊이 감동시켰다. 톨스토이 자신도 젊었을 때 숙모 집 하녀를 유혹했고, 그 처녀는 나중에 숙모 집에서 쫓겨나 윤락의 길에 떨어진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코니의 허락을 받고 이 얘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 창작에 몰두했다.
이 작품은 1895년 경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일단 완성을 보았다. 이 초고에서는 네흘류도프가 그 젊은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카튜샤와 정식으로 결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초고는 몇 년 동안 쳐박아둔 채로 있었다. 그러다가 1898년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돈이 필요해지자,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완성하여 팔 것을 결심하고 초고를 철저히 개작했다. 정치적, 사회적 테마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제정 러시아에서의 재판, 교회, 행정 등의 불합리를 지적함으로써, 오늘날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복잡하고 거대하고 광범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흔히 독자들은 <부활>하면 카튜샤와 네흘류도프의 사랑 이야기로 알고 읽어가지만, 그 저변에는 기성 질서에 대한 네흘류도프의 과격한 부정, 유형수들의 음울한 에피소드 등이 깔려져 있다. <부활>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코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사건’이다. 또 하나는 재판 제도, 군대, 관료 기구, 나아가서는 국가 그 자체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나머지 하나는 신의 계시다. 즉 첫째는 ‘카튜샤의 정신’이요, 둘째는 ‘네흘류도프의 의식’이요, 셋째는 ‘신의 부분’인 것이다. 흔히 독자들은 카튜샤의 가련한 운명에 눈물을 흘리고, 네흘류도프의 의식에 대해서는 로맨스의 배경 정도로밖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이것은 톨스토이에게는 불친절한 독서 방법이겠으나, 소설의 독자로서 잘못된 독서는 아니다. 왜냐하면 카튜샤의 운명만이 소설로서 빈틈없이 짜여 있고, 또 그것이 소설 전편을 잇는 끄나풀이 되어 있다. 그것은 소설적 흥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카튜샤의 운명, 그녀의 기쁨과 설움은 역사의 그늘 속에서 태어났다가 죽어가는 수많은 무력한 대중의 바로 그것이었다. <부활>에서 카튜샤는 거의 말다운 말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러시아 사회에서 그녀는 지배받고 조종당하는 노동력이다. 때로는 짐승으로 화한 사내들에게 농락당하고, 때로는 네흘류도프 등에게 ‘해석’되는 ‘사물’이다. 카튜샤에게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이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카튜샤를 중심으로 한 사건 전개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카튜샤의 사건을 계기로 그 배후에 있는 사회적 잔인함을 들추어내어 규탄함이 그가 목적한 것이다. 그래서 카튜샤의 상대역으로 네흘류도프가 등장한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작자의 로봇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네흘류도프가 아닌 톨스토이 자신이다. 열광적인 톨스토이 찬미자의 하나인 로맹 롤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물의 성격 가운데서 단 하나 객관적인 진실성이 없는 것은 주인공 네흘류도프의 그것이다. 톨스토이가 자기 자신의 사상을 그를 시켜서 말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는 또 말한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35세 도락가의 육체에 걸맞지 않은 70세의 정신을 가지고 네흘류도프를 창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네흘류도프는 톨스토이가 러시아 사회의 상하(上下)를 모스크바에서 농촌이 이르기까지, 페테르부르크에서 시베리아의 유형지까지 모든 각도에서 샅샅이 점검해 19세기 러시아 문명의 암흑과 기만과 비인도주의를 고발하기 위해 내세운 괴뢰다. 카튜샤의 얘기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뛰어난 예술인데도 거대한 <부활>은 거대하기만 한 채 완벽성과 일관성이 결여된 예술이라고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술 작품으로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에 그 영광의 앞자리를 내주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를 통해서 지금까지 설교자나 고발자로서 말해 온 모든 주장, 또 도덕가나 문명 비평가로서 반대해온 모든 의견을 집약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음식의 목적 및 의의가 쾌락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먹는 것과 참다운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술의 목적이 쾌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참다운 의미도 목적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라는 그의 예술관을 대표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리얼리스트 작가로서 톨스토이의 모습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또한 극히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 대치법, 매우 간결한 필치, 정확하고도 생동하는 서정적 묘사 등으로 일흔 살 노작가의 건재를 증명하고 있다.
<부활>은 발표와 동시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니바>라는 주간지에 연재되었는데, 전국 독자들은 “……하나님, 오래도록 이 소설이 계속되게 해주소서. 우리는 전 러시아에 ,<니바>가 배달되는 금요일 아침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하고 열광했지만, 동시에 제정 러시아 당국은 격노했고 129장 중 삭제 없이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은 25장 뿐이었다. 기도식을 그린 데서 남은 것은 “기도식은 시작되었다”라는 단 한 구절이었다. 러시아에서 완전한 책은 가까스로 1936년에야 햇빛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작자는 이 소설로 1901년 그리스 정교에서 추방까지 당했다. 학생, 노동자들은 분노하여 가두 항의 시위까지 벌였다. 동시에 발표된 영국을 비롯해 그 밖의 나라에서도 이 책은 독자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으나, 질서의 옹호자는 격노했다. <부활>은 도전이라기보다 도발의 서(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