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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가톨릭문화원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축일:8월8일(8월11일,8월2일)
사보트의 빌라뎃 농가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르페브르이다. 그는 1525년에 파리의 쌩 바르브 대학에 갔으며, 여기서 프란치스꼬 하비에르와 같이 살면서, 성 이냐시오 로욜라를 만났다. 이들 세 사람은 매우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베드로는 1534년에 서품되어, 예수회가 첫발을 내디딘 8월 15일에 몽마르뜨에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1537년, 그는 이냐시오와 디에고 라이네스와 함께 로마로 갔고, 얼마동안은 그곳의 대학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바오로 3세에 의하여 보름스와 라티스본 의회에 파견되었는데, 이 의회는 독일 내의 종교적 혼란을 진정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베드로는 이 지방의 성직자와 교회의 상황에 크게 실망하고, 최선의 치료약은 프로테스탄트와의 토의가 아니라 가톨릭 내의 개혁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끊임없이 설교하였고,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법에 따른 묵상을 지도하여 독일과 프랑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성공 사례 중의 하나는 베드로 가니시오와 프란치스꼬 보르지아를 예수회에 입회시킨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교황에 의하여 트렌트 공의회의 신학자로 위촉되었으나, 공의회를 준비하던 중에 로마에서 운명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당신의 길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오 주님, 당신의 길을 저에게 보여 주시고, -복자 베드로 파브르
초연함을 구하는 기도 나의 주님, 당신의 시선, 당신의 섭리, 당신의 일깨워주심, 당신을 보고, 듣고, 맛보고, 음미하고, 만지고, 이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 청하고, -복자 베드로 파브르
파브르 - 이니고의 첫번째 동료 렉스 패이 SJ (예수회)
이냐시오(이니고)는 로욜라성에서의 완전한 회심을 체험한 이후 처음에는 스페인의 알칼라에서, 그 다음으로는 파리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그곳에서 몇몇 친구들을 하느님께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이끌었다. 이들 동료들은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인내롭게 견디었지만 아무도 그와 오랫동안 남아 있지는 않았다. '이니고의 첫번째 동료'라는 제목은 베드로 파브르(불어로는 ‘삐에르 파브르’라고 알려진)를 지칭함인데, 1529년 파리에서 이냐시오를 알게 되어, 1546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들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그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 파브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는 운 좋게도 파브르와 그의 메시지에 관하여 생의 마지막 4년간 간직했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기록은 우리에게 그가 어떻게 공부했으며 사도로서의 사목활동등, 그의 소중한 삶을 상세히 전할뿐 아니라, 특별히 그의 내적인 체험, 다시 말해 그의 삶 안에서의 하느님의 활동과 그의 응답이 어떠하였는지, 그가 어떻게 기도하고 식별했으며 모든 것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찾았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1. 그의 생애 '내가 열두 살 무렵 성령께서는 우리 주님이신 하느님을 섬기라는 충동을 내 안에 불러일으키셨다... 나는 들판으로 나갔으며... 기쁨과 순수에의 열망으로 가득 차서 주님이신 하느님께 끝까지 정결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1525년 10월에 파브르는 철학과 신학에 대한 공부를 더 하기 위하여 파리로 갔다. 그는 성 바바라 대학에서 기숙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첫번째로 그와 같은 방을쓰게 된 사람은 다름아닌, 스페인출신의 동갑나기였으며, 성직에 대한 열망을 품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로부터 4년 후에는 1527년 파리에 온, 그들 보다 열 다섯살 위인 이냐시오가 같은 방의 세번째 학생으로 합류하게 된다. 파브르는 개인적으로 그의 학업을 도와주는 임무를 맡았으며, 반대로, 이냐시오는 특별히 다음의 세 분야에서 인격과 영성을 성장시키는 도움을 파브르에게 주었다. - 그의 성소: 그는 수도자, 성직자, 변호사, 또는 교사중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파브르는 한참 후에 이렇게 회상한다: '그들은 같은 방에서 책상도 돈지갑도 함께 나누어 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나의 영적인 스승이 되었으며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을 인식하여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결국엔 우리들의 오늘을 이끌고 있는 삶을 채택하기로 의기를 투합하면서 하나를 이루었다. - 현재와 장래의 예수회원들 중에서 나는 참 보잘것없는 존재이다.’ 1533년 6월 어머니를 여읜 파브르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6개월간 머무르면서 1528년에 사제로 수품된 친구인 끌로드 제이를 만난다. 1534년 1월 파리로 돌아온 파브르는 이냐시오의 지도 아래 영신수련을 받는다. 그는 5월 30일에 사제로 수품을 받고 7월 22일 첫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소신을 밝힌다. '나는 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길만한 가치도 없고, 그분의 선택을 받기에도 참으로 보잘것없지만, 사제의 직분은 위대한 소명이기에 내 몸과 영혼을 다하는 혼신의 노력으로 언제나 그 소명에 응답할 것입니다.' 그간 이냐시오는 다섯 명의 동료를 더 얻게 되었다. 네 명은 스페인 출신으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제임스 라이네즈, 알퐁소 살메론, 니꼴라스 보바디야이며 한 명은 포루투갈 출신의 시몬 로드리게즈이다. 1534년 8월까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제외한 모두는 이냐시오와 영신수련을 마쳤으며, 복음에 입각한 기본적인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8월 15일 몽 마르뜨르의 작은 경당에서 그들 중의 유일한 사제였던 파브르가 집전하는 미사를 드리며, 예수님을 따라 청빈과 순결의 삶을 살것을 서원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터키의 회교도들을 개종시키기로 서약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로마로 가서 교황을 위해 봉사하기로 한다. 그 당시엔 예수회에 관하여 생각지도 못했지만, 일곱명에 의한 공동서약은 예수회가 생기는 초기 역사에 중요한 발단이 되었다. 이냐시오가 오랜 병으로 고생하자 의사와 동료들은 스페인의 고향으로 돌아가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또한 동료들의 가족을 방문해줄 것을 권유했다. 이냐시오는 파브르에게 동료들에 대한 책임을 맡긴다. 1535년과 36년 동안 이들은 공부를 계속하고 베니스에서 이냐시오를 만나 성지(예루살렘)로 향하는 배를 타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가 책임을 맡고 있는 동안 파브르는 끌로드 제이와 다른 두 명의 프랑스 학생에게 영신수련을 지도했다. 그들은 1524년에 수품된 파샤스 브뢰트와 쟝 꼬뒤르인데 이들 세 명도 모임에 합류한다. 1536년 11월, 이들 아홉 명은 파리를 떠나 베니스에서 1년 넘게 머물던 이냐시오와 마침내 다시 만나게 된다. 그곳에 있는 동안, 몇몇 병원에서 청소와 환자를 돌보는 일,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에 봉사한다. 1537년 부활절에 성지(예루살렘)로 가도 좋다는 교황의 승낙을 얻어 베니스 주변에 흩어져 배를 기다렸으나 그 해엔 터키와의 전쟁으로 배가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을 아주 기쁘게 환영해 맞이한 교황 바오로 3세를 알현하기에 이른다. 파브르는 '우리는 매우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며, 그것은 그때도 그랬듯이 우리들 수도회 전체의 초석이 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교황이 우리를 받아들여 우리의 제안에 만족할 것을 바라고 계셨던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2. 그의 사도적 활동 이태리에서: 팔마를 떠나기전 파브르는 그들의 영적 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한 지침을 남겼는데 이것은 특별히 '자기성찰, 고해, 묵상, 기도, 자선'에 관한 것이었다. 초기 예수회를 위한 또 다른 귀한 수확은 훌륭한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여덟 중에 한 사람은 안토니오 크리미날리였는데, 그는 이후에 인도에 와서 지금의 동부 작은 마을인 타밀나두, 당시 베탈라이에서 1549년 예수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된다. 독일에서: '제가 편지로 알려드린 바 있는 사람들, 제가 영신수련을 주었거나 또 늘 제 영적인 자녀였던 바로 그 사람들 중에서 한명이 아닌 제가 알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거나 자신들이 지녔던 열정을 잃었습니다' (주: 종교개혁을 통해서 가톨릭 교회에서 이탈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거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을 잃게 되었다는 의미) 파브르의 영적 사업은 독일 가톨릭 쇄신의 첫번째 물결이었다. 스페인에서: '나는 관습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 지방이나 왕국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존경받는 주요천사, 대천사, 그리고 성인들께 내 자신을 의탁하기로...' 그는 도시와 지방을 두루 다니며 일반사회와 교회의 많은 유명인사들을 만났으며 예수회에 대해 많은 호의를 얻게 되었다.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 파브르에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획득'은 베드로 카니시우스였다. 그들이 마인츠에서 만났을 때 서로를 마음에 품어오던 이상형으로 인식하게 된다. 영신수련을 마친 후, 카니시우스 또한 1543년 스물 두살이 되던 생일에 예수회에 합류한다. 후에 카니시우스는 파브르의 선업을 이어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톨릭 쇄신의 선봉에 서게 된다. 이냐시오의 명으로 포루투갈로 향하던 중 파브르는 벨기에의 루벵에서 병을 얻는다. 그곳에서 건강을 회복하기 까지 3개월을 머물러야 했는데, 그는 다시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었다. 다시 독일로 돌아온 그는 '거룩한 사람들, 그들의 표양으로 영적 냉전지대에 불을 붙이게 될, 매일 기도하고 외치며, 깊이 탄식하면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예수회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1544년에 포루투갈 왕의 요청에 따라 이냐시오는 파브르에게 그곳으로 가도록 권한다. 8월에 도착하여 6개월을 머무르는 동안 코임브라와 에보라에서 많은 학자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을 안내하고 지도한다. 그는 또한 예수회를 위한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는데, 바레또 두 형제는 후에 이디오피아와 고아 지방에서 탁월한 봉사를 하게 된다. 1545년 3월에 파브르는 스페인의 바야돌리드로 갔다. 그곳은 이전에 선교한 어느 곳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대화에 있어서 응답했던' 곳이다. 안토니오 아라오즈와 그는 포루투갈 예수회원들의 관대한 도움으로 알칼라, 바야돌리드, 바르셀로나에 예수회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예수회에 대한 결실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교황의 요청에 따라 이냐시오는 파브르에게 트렌트 공의회에 가도록 명한다. 그는 스페인을 떠나 1546년 7월 17일에 로마에 도착한다. 그에게 지난 7년간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 걸쳐 10,000킬로미터가 넘는 긴 여정이었다. 피로에 지친 그는 매우 깊이 병이 든다. 7월 31일에 그는 고해성사를 보고 다음 날 미사에서 성체를 모신 다음 병자성사를 받은 후에 8월 1일 오후 평화로이 눈을 감는다. 이냐시오는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예수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애처로운 세상에서 다음 세상을 향해 파브르가 떠난 이후, 로마에 있는 우리들은 확실한 희망에 차 있습니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 지상에서 그간 우리를 도왔던 것 보다, 아니 우리와 함께 남아서 이룩할 수 있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그가 머무르는 천국에서 우리를 도울 것이라는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합니다.'
3. 그의 메시지 1) 그의 섬세한 온유함 그의 진실함과 성실함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끌렸으며 그를 편안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교도들을 결코 힘이나 논쟁으로 개종시키려 하지 않고 인간적이고 이해심어린 접근에 의해 설득시키려 하였다. '사람들은 당신의 말과 행위는 잊겠지만, 당신으로 인해 그들이 느꼈던 감정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이 진실이라면, 파브르의 훌륭한 교훈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영감을 주는 것이다. 2) 영적 대화 3) 영신수련 고해성사 (지금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에 관하여 사제인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고해를 듣거나 고해성사를 줌에 있어서 자네는 언제나 온유하고 참을성 있는 관대한 마음이어야 하며, 친절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해야하고 절대로 고해자의 짜증나게 하는 행동에 귀찮거나 냉소적인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하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참아내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서있기에 이 위대하고 거룩한 임무가 자네를 성가시게 만드는 원인이 되게 해서는 절대로 안되네.' 4)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기 (1) 하느님께 대한 항구하고 온전한 신뢰 (2) '오로지 우리 주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열망, 그것은 (3) 어떤 것에서도 자신의 영광과 흥미를 찾지 않는 이기심 없는 봉사에서 증명된다. (4) 댓가를 셈하지 않는, 언제라도 준비된 순명과 (5) 창조물과의 교감인데 피조물이 장애가 되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과 연결시켜 친교를 나누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는 아주 상반되는 것이며, 우리들에게 종종 영향을 미치는데, 자기 우월감, 개인주의, 공명심, 집착의 노예가 되는 것, 피조물에 대한 착취와 학대 등이 그것이다. 베드로 파브르의 삶은 우리에게 그가 어떻게 복음에 철저하면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았는지 보여준다. 어떤 회헌도 쓰여지기 이전에 그는 벌써 하느님께 뿌리 내린, 타인을 위해 온전히 내어주는, 진정한 예수회의 정신을 명백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오늘날 새로운 장을 엮어가는 진정한 예수회원이 되기를 고무한다. 렉스 패이 신부는 예수회원이며 위의 글은 인도 예수회 소식지인 Jivan에 실린 글임.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창설자 성 아냐시오 로욜라 사제 Sant’ Ignazio di Loyola Sacerdote St. IGNATIUS of Loyola Loyola, Spagna, c. 1491 - Roma, 31 luglio 1556 축일:7월31일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St. Peter Canisius San Pietro Canisi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8 May 1521 as Peter Kanis at Niemguen, Holland-1597 at Fribourg, Switzerland Canonized:1925 by Pope Pius XI 축일:12월21일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St. Francis Borgia San Francesco Borgia Sacerdote 28 October 1510 at Gandia, Valencia, Spain-30 September 1572 at Ferrara 축일:10월10일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San Francesco Saverio Sacerdote ST. Francisco Xavier 1506 at Javier, Spanish Navarre-2 December 1552 at Sancian, China of a fever contracted on a mission journey Canonized:1622 by Pope Gregory XV Apostle to the Far East. 축일:12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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