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 침몰의 배후 음모론
타이타닉 침몰의 진실
출처: https://www.instiz.net/pt?no=3503214&page=1
1912년 4월 10일, 영국 잉글랜드 햄프셔 주 사우샘프턴.
이날 정오 무렵 영국의 해운 기업 화이트 스타 라인社가 건조한
세계 최대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의 처ㄴ... 첫 항해가 이루어진다.
이렇듯 총 2,224명을 태운 타이타닉은, 4월 10일 정오 무렵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출항해
프랑스 셰르부르와 아일랜드 퀸스타운에서 기항(寄港)한 뒤
4월 11일 14시경 목적지인 미국 뉴욕으로 향한다.
그리고 4월 14일 23시 40분경, 타이타닉은 운명의 밤을 맞이하게 된다.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대형 재해 전에는 반드시 작은 사고 및 징후들이 일어난다는 게 그것이다.
타이타닉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담으로, 당시 선장이었던 에드워드 스미스는 빙산 해역을 가능한 한 빠르게 벗어나고자
북부 항로보다 안전했던 남부 항로 루트를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허나 따뜻한 겨울로 인해 빙산이 떠내려와 오히려 남부 항로 루트가 위험한 길이 된 데다,
이처럼 지뢰밭을 통과하듯 빠르게 질주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는 항해법이었다.
23시 40분경, 타이타닉은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섬 부근 해역에 도달한다.
그리고 여기서, 망지기 프레드릭 플리트가 망루에서 육안으로 관측을 하던 중
전방 450m에서 높이 20m가량의 빙산을 발견한다.
프레드릭 플리트는 기겁해선 곧장 무전을 쳤고,
무전을 받은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는 이를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에게 보고한다.
결국, 타이타닉의 선수(船首) 우현 부분이 30만t짜리 빙산과 충돌하고 만다.
(타이타닉과 충돌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빙산. 수면 위로 노출된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0시 40분경, 승객들은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라 갑판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승객들은 이때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하면서,
첫 번째 구명정에는 여성과 아이들 28명만이 마지못해 탑승한다.
한편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과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의 감독하에
각각 우현과 좌현에서 구명정 대피가 유도되었고,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의 지시에 따라 여자와 아이를 우선적으로 탑승시킨다.
1시 45분경, 마지막 구명정이 내려지면서 갑판에는 1,500여 명의 사람들이 남게 된다.
그리곤 곧 선수 부분이 완전히 침몰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선미(船尾)를 향해 필사적으로 뛰어든다.
2시 20분경, 동력이 나가 조명이 꺼진 타이타닉이 굉음과 함께 두 동강 나면서
선미 부분도 본격적으로 침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타이타닉과 함께 남겨진 이들은,
오로지 구명조끼에 의지한 채 차디찬 북대서양과 마주하게 되고 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한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메아리치는 비명을 들으며.
이날 타이타닉에 탑승한 총 2,224명 중 1,514명이 북대서양에서 삶을 마감하고 만다.
에필로그 1
* 다음은, 당시 타이타닉 생존자들의 목격 진술에 따른 것이다.
에드워드 스미스(1850-1912)
: 당시 화이트 스타 라인의 최고참이자 타이타닉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침몰 때까지 승무원 및 승객들을 지도하며 타이타닉과 최후를 함께 한다.
토마스 앤드루스(1873-1912)
: 타이타닉의 설계자.
토마스 앤드루스는, 침몰 때까지 승객들이 부양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을 바다로 던진다.
이후, 그는 1등실 흡연실에서 조용히 자신이 설계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
월리스 하틀리 악단
: 타이타닉에서 악단을 맡았던 8인의 연주가.
월리스 하틀리 악단은,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도 두려움에 찬 승객들을 위해 연주한다.
연주가 끝난 후엔 서로의 행운을 빌며 헤어지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타이타닉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토마스 바일스(1870-1912)
: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가톨릭 사제.
토머스 바일스 사제는, 구명정의 승선을 두 번 모두 거절한 후 다른 사람들의 구명정 승선을 돕는다.
이후 구명정을 타지 못해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한다.
그리고 최후까지 갑판 위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미사를 드린다.
스트라우스 부부
: 미국 내 유명 백화점 메이시스의 공동소유자였던 이시도어 스트라우스와, 그의 아내 아이다.
이시도어 스트라우스가 여성과 아이들에게 구명정 승선을 양보하며 아내 아이다만을 승선시키려 하자,
아이다는 자신의 모트를 하인에게 건네주고 구명정에 태운 뒤 남편과 함께 하겠다며 승선을 거부.
이후 둘은 팔짱을 낀 채 함께 최후를 맞이함.
벤자민 구겐하임(1865-1912)
: 미국의 광산왕 마이어 구겐하임의 여섯째 아들로, 향락을 즐기던 바람둥이.
당시 타이타닉에는 현지처였던 프랑스의 가수 레옹틴 오바르와 함께였다.
그는 레옹틴 오바르와 그녀의 하녀 엠마 세이지서를 구명정에 태운 뒤,
구명조끼를 벗어 던지고는 자신을 따르는 하인 빅터 질리오와 함께 1등실 로비에 앉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곤 브랜디와 시가를 즐긴다.
"아내에게 내가 의무(주: 신사도)를 다했다고 전해주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입고서 신사답게 갈 것이오."
에필로그 2
: 타이타닉 침몰 당시 '여성과 어린이를 우선적으로'라는 신사도 정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인해 여성 및 어린이들의 생존율은 아주 높았다.
1등실의 경우 어린이는 6명 중 5명이 생존했고, 2등실은 24명 중 24명 전원이 생존한다.
여성의 경우 1등실은 144명 중 140명이, 2등실은 93명 중 80명이 생존한다.
반면, 남성의 경우 1등실은 175명 중 57명이, 2등실은 168명 중 14명만이 생존한다.
문제는, 3등실 승객들이었다.
3등실은 상부와 엄격히 격리되어있던 데다(당시는 1900년대 초였음) 구조가 복잡했고,
승객 대다수가 이민자라 영어에 취약해 승무원들의 지시를 신속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3등실의 당시 생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어린이: 79명 중 27명 생존
여성: 165명 중 76명 생존
남성: 462명 중 75명 생존
에필로그 3
: 타이타닉 침몰 14년 전인 1898년,
미국의 작가 모건 로버트슨이 단편소설 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영국의 한 호화 여객선이 첫 항해에서 빙산과 충돌해 침몰한다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호화 여객선의 이름이 타이탄이며
타이타닉 침몰 사고 때처럼 4월경 유사한 속도로 동일한 해역을 항해하던 중
우현 부분이 빙산과 충돌한다는 것.
게다가, 이러한 타이탄은 타이타닉과 선박 특징들이 극히 유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타이탄 역시 부족한 구명정으로 인해 3,000명의 승객 중 절반 이상이 사망한다는...
이렇듯 소설 속 타이탄과 타이타닉은 소름 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러나, 사실 은 개정판이었다.
말인즉슨, 모건 로버트슨의 이 1898년作 단편소설 초판은
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였던 것.
한편, 는 타이타닉 침몰 사고가 있었던 직후 새로운 제목으로 개정되어 재간행이 이루어진다.
물론, 소설 속 세부 내용도 수정되어서 말이다.
에필로그 4
: 화이트 스타 라인社가 보험금을 노리고서 타이타닉과 흡사한 여객선인
올림픽을 대신 출항시켰다는 음모론이 있다.
여러 번의 사고로 인해 애물단지가 된 올림픽을, 타이타닉으로 속여 출항해 사고를 유도했다는 것.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악질적인 음모론에 불과하다.
비록 두 여객선의 내외부가 유사한 디자인이긴 하나, 갑판에 서면 한눈에 차이점이 드러나기 때문.
|작성자 스위프트